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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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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 명령(Verbrecherische Befehl)과 교육 ==== > "우리는 해독한 기생충을 제거하듯 세계 유대인들을 제거한다. 우리가 그들을 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적을 격퇴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다. 유대인을 제거하는 투쟁은 신이 원하는 종족의 순수함과 건강함을 위한 도덕적 투쟁이다. 그리고 새롭고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이다." > ---- > - 1939년의 국방군 [[정훈교육]] 교재(Schulungshefte) 제5권에 실린 C.A. 호베르크 박사의 논문, '독일사 속의 유대인'의 마지막 문단.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22p에서 발췌. > "전쟁 목적은 모스크바의 통치자로 대변되는 하등 인간 빨갱이 족속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인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 앞에 서 있다. 세상은 이 사명이 어떻게 완수되는지 목도할 것이다." > ---- > - 국방군 선전국 소식지인 "부대 소식(Mitteilungen für die Truppe)"의 기사 중 하나. 소련 침공 직후인 1941년 6월 발간된 J 12호에 수록된 문구이다.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38p에서 발췌. 당장 전쟁이 시작된 1939년에 국방군 지도부, 즉 육군 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나치당 이념을 장병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내부적으로 합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가르치기 위한 정훈교육 교재를 제작해 일선 장병과 소부대 지휘관들에게 배포했다. 상단에 있는 인용문이 바로 해당 교재에 수록된 논문을 발췌한 것으로,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며 장병들에게 주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나치즘은 독일 국방군의 공식적인 이념이 되었다. 동 시기, 국방군 선전국(Wehrmachtpropaganda) 또한 설립되어 독일 장병들에게 인종주의를 주입했다. 국방군은 학살에도 깊게 연관되었다. 그들 자신이 직접 저지른 학살 행위 또한 상당했으며, 간접적인 조력은 더욱 심각했다. 미국 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D. Snyder)는 저서 《[[블랙 어스]]》에서 국방군, 친위대, 보안대, 친위특무대와 질서경찰 등등은 모두 서로 얽혀 있었으므로 이들의 책임을 무 자르듯이 나누어 [[국방군 무오설|국방군 전투부대만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가령 국방군이 친위대를 지휘하거나 친위대가 국방군에 협조 요청을 보내는 경우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특무대는 다 합쳐 봐야 3000명 규모였고, 이 때문에 그들의 학살에는 현지인, 국방군, 다른 친위대 부대들, 질서경찰 등의 조력자들이 항상 따라붙었다. 특무대의 학살은 그들을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유대인 학살과 비유대인 학살, 포로 학살, 빨치산 진압 또한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녔기에 역시 쉽게 분리될 수 없다. 집단 총살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였으며, 가스실 희생자들의 경우에도 비유대인들과 포로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세부 유형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전방 부대들은 즉흥적인 [[포로 학살|포로 학대 및 학살]] 사건의 큰 축을 담당했다. 전방의 독일 병사들에게 있어서는 포로를, 그것도 '열등인종' 포로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그냥 살해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소련군이 침략자 독일군에게 가한 포로 학대 소식들이 들려오면서 독일군 병사들의 이런 학살 행위는 '열등인종' 적들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서 정당화되었다. 가령 1941년 10월 7일 북부집단군 소속 독일 제61보병사단장 지크프리트 헤니케[* 최종 계급 보병대장. 1943년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봉기 진압작전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후 소련 NKVD에 잡혀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휘하 병사들이 소련군에게 살해당한 독일군의 시신 세 구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수감 중이던 소련군 포로 93명을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독일사단]]의 일원으로 독소 전쟁에 참전한 [[기 사예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소련군이 독일군 포로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산채로 묶어 수류탄으로 터뜨려 죽이는 걸 목격했고 전투에서 본인을 비롯한 동료들이 전투 중 항복한 소련군들을 죽여버리기도 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국방군 장교단과 병사들은 치안 안정화를 담당하는 협조 요청이 들어오면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보통 아주 순순히 협조했다. 상술한 것처럼 [[아인자츠그루펜|특무대]]들의 경우 집단군 및 그 산하 야전군들에 배속된 존재들이었으므로 국방군 지휘관 다수는 특무대의 행동을 직접 보고받았다. 본인들이 치안전쟁에 직접적으로 투입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다. >II. Im rückwärtigen Heeresgebiet >Kommissare, die im rückwärtigen Heeresgebiet wegen zweifelhaften Verhaltens ergriffen werden, sind an die Einsatzgruppe bzw. Einsatzkommandos der Sicherheitspolizei (SD) abzugeben. > >II. 후방지역의 경우 >후방사령부 작전지역에서 미심쩍은 행동으로 인해 체포된 정치장교는 '''[[아인자츠그루펜|특무대(Einsatzgruppen)]]''' 또는 '''보안대 특공대(Einsatzkommandos der Sicherheitspolizei[* 약칭 SiPo])''''에 넘긴다. >---- >- 1941년 6월 6일, 국방군최고사령부에서 하달한 <정치장교에 대한 처우에 관한 지침(Richtlinien für die Behandlung politischer Kommissare)>. 일명 "[[정치장교 명령]](Der Kommissarbefehl)"이라 불리는 그것이다. 후방에서 벌어진 학살의 경우 '파르티잔 토벌전(Bandenbekämpfung)'의 성격을 띄었으며, 그 양상이 더욱 심각했다. 이름은 파르티잔 토벌전이지만 실제로는 군사 작전이라기보다 [[인종 청소]]에 가까웠다. 주로 국방군 육군 [[집단군]]들의 후방 지역(Rückwärtiges Armeegebiet)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이들은 3개의 국방군 보안사단들과 수 개의 국방군 비밀 야전 경찰 제대들을 거느리고 지역 안정을 담당한 제대였다. 후방지역은 북, 중앙, 남부 집단군별로 하나씩 해서 총 세 곳이 존재했다. 후방지역 세 곳의 활동을 중앙에서 감독하던 인물은 국방군 병참감이자 후방사령부(Befehlshaber des rückwärtigen Heeresgebietes) 사령관 [[에두아르트 바그너]] 대장으로, 그는 국가보안본부 총수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장과 함께 국방군과 친위대의 협력의 기본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1941년 4월 28일 두 사람은 "육군 내 보안경찰과 보안대의 특수 임무 규정"을 설정했고 이는 육군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브라우히치]] 원수의 명의로 예하부대에 하달되었다. 이 규정은 국방군과 친위대, 그리고 경찰이 공조하여 '토벌'을 벌이는 기초적인 협력 지침으로 기능했다. 바그너와 하이드리히의 지침으로 인해 후방지역은 같은 지역들의 친위대 및 질서경찰 사령부의 조력을 받아 국방군, 친위대, 질서경찰들을 전부 지휘할 수 있었다. "독일국방군"의 번역자인 경상대학교 사학과의 [[https://www.dbpia.co.kr/author/authorDetail?ancId=14111|김승렬]] 교수에 따르면 세부적인 협력 체계는 다음과 같다: 친위대 보안대(SD)는 육군최고사령부와 협력하며, 그 산하의 친위특무대(Einsatzgruppen)는 후방사령부(Befehlshaber des rückwärtigen Heeresgebietes)와 협력한다. 실제 학살을 수행하는 특공대(Einsatzkommando/Sonderkommando)는 각 집단군과 야전군에 배속된다. 또한 국방군 [[집단군]] 사령부들은 각자의 후방 지역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무대는 생활과 보급, 이동에 관해서는 소속된 국방군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곳도 제재를 가한 곳은 없었다. 국방군은 본격적인 '[[홀로코스트|최종 해결책(Endlösung)]]'의 수립에도 관여되어 있다. [[독일 공군(나치 독일)|국방군 공군]]의 총사령관이자 [[제국원수]]였던 [[헤르만 괴링]]은, 1941년 7월에 국가보안본부장으로서 친위대 보안대와 비밀경찰의 수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듬해 초 하이드리히가 괴링의 명령에 따라 여타 나치 인사들을 모아 연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반제 회의]]다. 이곳에서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절멸(Vernichtung)로 확정됨에 따라 곳곳에 절멸수용소가 세워지고 학살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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