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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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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에 대한 과소평가 ==== 히틀러는 일단 쳐들어가기만 하면 강압적인 공산 통치에 염증을 느낀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하여 소련 체제는 공격하는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히틀러가 소련을 두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나치 독일|우리]]가 [[바르바로사 작전|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소련|저 엉터리 건물]]은 [[자멸|스스로 무너진다.]]'''"[[https://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01/dec/15/weekend.jonathanglancey|#]] >(We have only to kick in the door and '''the whole rotten structure''' will come crashing down.) 하지만 결국 무리하게 공격해서 자멸하게 된 것은 나치 독일이었다. 그런데 소련을 과소평가한 것은 히틀러만의 독자적인 오만이라고 할 순 없고 당시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게 생각했다. 몇 안 되는 예외가 직접 [[할힌골 전투|소련과의 전면전]]을 겪은 [[일본 제국|일본]] 정도일 것이다. 사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지의 일부는 처음에는 독일군을 [[대숙청|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 준 군대로 환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독일군의 보답은 학살, 파괴, 약탈뿐이었다. 독일이 이러한 행위들을 저지른 것은 [[나치즘|열등한 슬라브족을 멸살시키기 위해 취한 학살]]이며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본토 방어전으로 밀려서 학살 대상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이런 끔찍한 전쟁범죄 행위가 멈췄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독일군의 잠재적 협력자가 될 뻔했던 우크라이나인이나 발트 3국[* 단 발트3국의 경우 유대인을 제외하면 나치의 학살이 거의 없었으며 소련을 몰아낼 명분이 있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아직도 나치에 대한 반감은 적다. 소련의 점령 이전에 나치 독일에게 메멜을 강탈당했던 리투아니아가 다른 발트 3국보다 나치에 대한 반감이 많은 편이다.] 모두 독일군에 등을 돌렸고 후방에서 [[빨치산]]을 하든지 소련군에 앞장서 입대했다. 히틀러와 독일군은 이 침공 작전에 대해 낙관적이었는데, 소련이 비록 거대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서방에서 육군력이 강했던 프랑스도 수도인 [[파리(프랑스)|파리]]가 함락되자 바로 무너졌던 전례가 있는 만큼 소련도 그렇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 [[대숙청]]으로 소련군이 반신불수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소련군이 군사 작전을 펼쳐 봤자 그 범위만 컸지 결과는 프랑스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당시의 독일은 소련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소련의 역량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 소련군이 막대한 병력을 잃자 소련은 얼마 못 가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스탈린만이 군대에 대한 정보와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한 결과 외부에서 소련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정보의 부족 때문에 소련 정복은 쉬울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랄산맥|후방]]에 배치된 공업 시설의 생산능력이 제대로 증명되고 극동에 남아있던 정예 병력이 대규모로 집결하기 전까지는 [[소련군]]이 연전연패했다. 독일은 후방 병력 견제는 [[일본 제국|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일본도 소련과 상호 간에 불가침 조약까지 체결하고 있었으며 조약의 체결 시점이 불과 독소전쟁 발발 2개월 전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독일의 태도가 일본이 독일을 돕지 않고 대소 중립을 유지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는데, 일전에 [[독소 불가침조약]] 당시 방공협정 동맹인 일본과 아무런 의논 없이 체결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은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이었는데 독일이 일본의 뒤통수를 제대로 치게 되자 일본 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히라누마 기이치로]] 총리대신과 그 내각이 일제히 총사퇴를 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그런데도 2년 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도 히틀러가 일본에 알리지 말라고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일본 외무장관이 조약을 맺기 한 달 전에 [[베를린]]을 방문해 독일을 따라 일본도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추진 중이라는 상황을 알리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이러니 일본 입장에서도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히틀러의 장단에 맞추어 만 2달 정도밖에 안 된 대소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을 도울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초반에 전투 한번 했다 하면 수십만씩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무지막지한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저력으로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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