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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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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징조 === 그러나 1940년 7월부터 [[나치 독일]]과 [[소련]]간에 [[발칸반도]] 방면에서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하며 전운이 드리워졌다. 이안 커쇼의 '아돌프 히틀러 2권'에 따르면 소련군이 루마니아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자 독일 군부에서 이를 경계하여 히틀러의 명령 없이 전쟁 계획을 검토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 독일은 소련과 바로 얼마전까지 전쟁을 벌이던 핀란드와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독일군을 진주시켰고, 이어 루마니아의 총리 [[이온 안토네스쿠]]가 9월 14일 '국민군단국가' 선언을 하면서 독일군의 진주를 허용하며 소련과 독일의 사이가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앞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킨 폰 리벤트로프는 소련을 반영국 동맹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불타던 히틀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1940년 11월 독일을 방문한 몰로토프에게 리벤트로프는 영국의 중동 영토를 소련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하였지만, 몰로토프는 동맹 참여의 조건으로 터키 내 소련군 주둔 허용, 핀란드에서의 독일 철수, 불가리아에 대한 소련의 우위권 인정, 일본의 남사할린 반환, 스웨덴에 대한 독일 입장 정리를 요구하였다. 즉 소련은 자신들의 관심사가 중동 영토가 아닌 '''발트해와 발칸반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거부한 것이다. 이 협상의 결렬로 리벤트로프는 더 이상 히틀러가 전쟁을 결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리벤트로프는 자신이 성사시킨 불가침 조약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이후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며 리벤트로프가 몰로토프에게 '서기장에게 나는 어떻게든 이 전쟁을 막아보려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진심으로 소련과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수천만 명의 인명을 잃은 소련의 눈에 그딴 변명이 먹혀들리가 없었고 리벤트로프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소련과 미국, 영국, 프랑스 재판관 전원 만장일치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1940년 12월 18일, 히틀러는 국방군에 소련에 대한 공격 계획을 작성할 것을 명령하였다. 1941년부터 나치 독일의 소련에 대한 침공 징조 서방 세계와 [[추축국]]의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에니그마(기계)|독일 측 암호]]를 [[앨런 튜링|해독]]해 내서 당시 [[영국 총리]]인 [[윈스턴 처칠]]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직접 경고하기도 했고, 1941년 봄에만 180건이 넘는 독일 항공기의 소련 영공 침범 사례도 있었으며, [[일본 제국]]에 상주하던 전설적인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어가며 독일의 침공이 곧 개시될 것을 소련에 알렸지만 '''스탈린과 소련 방첩국, 정보국은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전쟁 반대파였던 주소련 독일 대사 프리드리히 베르너 폰 데어 슐렌베르크 백작이 수 차례 전쟁을 경고했음에도 결과는 같았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였던 독일의 한 인쇄업자가 독일군에 납품한 숙어집을 소련 영사관에 보냈는데, 여기에는 "항복하라", "손들어", "집단농장 의장이 어디 있나", "공산주의자냐?", "발포한다" 따위의 [[러시아어]] 표현이 실려 있었다.[* 안토니 비버/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31~32] 6월 16일 [[베를린]]에 파견된 소련 측 간첩들도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지속해서 알리고,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하루 전'''인 6월 21일 독일군 [[탈영]] 병사였던 알프레트 리스코프(Alfred Liskov)는 독일군 내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였는데, 그가 "독일이 내일 공격할 것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할 정도로 징후는 있었다.[* 리스코프는 독소전 개전 이후 대독 프로파간다에 동원되다 코민테른 조직에 배정되어 코민테른 요원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리스코프는 코민테른 지도자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하였고 <코민테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등의 글을 게시하며 코민테른 지도자들을 배신자라고 비판한 끝에 1942년 1월 NKVD에 체포된다. 다행히 수사는 6개월만에 종결되었지만 리스코프는 당국에 의해 노보시비리스크로 옮겨졌고 이후 리스코프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기밀 문서에조차 43년 후반에서 44년 초 사이에 실종된 것이 마지막 기록으로 나오는 등 그의 이후 운명은 알려져있지 않다.]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서도 공격하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강력히 명령했으며, 이는 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임박했음에도 손 놓고 있다가 이륙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대거 궤멸되는 참극을 초래했다. 물론 스탈린도 히틀러가 쳐들어올 것에 대비를 하긴 했는지, 폴란드 점령 후 [[스탈린 선]]을 뜯어서 앞에 [[몰로토프 선]]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많은 장군들이 숙청되었고,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유능한 장군들도 숙청의 칼날은 피하지 못했다. 이는 안 그래도 부족한 장교진의 인력난을 부추겼고, 살아남은 이들도 스탈린이 무서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등 유무형의 피해는 독소전쟁 초기 소련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다. 참고로 소련은 독일이 서부에서 [[영국 본토 항공전|영국과 전쟁]]을 치르는 내내 독일에 물자를 제공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하루 전에도 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다. 여담으로 물자를 실은 기차와 또 하나의 기차가 베를린-모스크바 선로를 왕복했는데 그 기차에는 독일, 소련 민간인이 타고 있었다. 이걸 보고 안토니 비버는 '평화와 전쟁은 정말 한 끗 차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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