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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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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tablealign=center><tablebgcolor=white,#1f2023><nopad> [youtube(D30i0cqs9Lc)] || || '''스탈린, 대숙청을 감행하다! 그런데 왜?'''[* [[함께하는 세계사]]의 영상.] ||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설득과 해명, 다른 사람들과의 세심한 작업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침을 강요하고 자신의 견해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지도 집단에서 배제되고 도덕적 , 육체적 파멸이 뒤따르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 >스탈린은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말은 논쟁 상대인 개인 또는 사람들의 사상적 잘못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할 필요성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 스탈린과 견해가 다르거나 단지 적대적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단순히 중상모략을 받은 모든 사람을 혁명적 준법성의 모든 규범을 위반하며서 매우 잔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인민의 적' 개념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사상 투쟁을 전개하거나 자기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빼앗고 없애버렸습니다. > >그 결과 혁명적 준법성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과거에 당의 노선을 지지했던 그 어떤 잘못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문, <[[https://ko.wikipedia.org/wiki/%EA%B0%9C%EC%9D%B8%EC%88%AD%EB%B0%B0%EC%99%80_%EA%B7%B8_%EA%B2%B0%EA%B3%BC%EB%93%A4%EC%97%90_%EB%8C%80%ED%95%98%EC%97%AC|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br]1956년 2월 25일, 제20차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 >"이제야 모든 걸 말할 수 있게 됐어. 묻고 싶어...... 전쟁 나고 몇 달 사이에 수백만의 병사와 장교들이 포로로 잡힌 게 누구 때문이지? 알고 싶어...... 전쟁 전에 우리 붉은 군대의 훌륭한 지휘관들을 독일 첩자니 일본 첩자니 몰아세우고 총살시켜서 다 죽여버린 게 누구지? 정말 알고 싶다니까...... 히틀러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때, 부됸늬 기병대만 믿고 두 손 놓고 있던 게 누구냐고? 누가 '우리 국경은 철통같이 단단하다......' 이따위의 말로 우리를 안심시켰느냔 말이야? 전쟁 나자마자 우리 군대가 탄환 남은 거나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누구 때문이냐고...... >묻고 싶어...... 이제는 물을 수 있어...... 내 인생은 어디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지금도 우리는 무섭거든. 두려워......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 >----- >-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빨치산]] 연락병 발렌티나 예브도키모브나 엠-바의 증언. 뒤의 성은 증언자 본인의 요청으로 인해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잘라냈다. 그의 남편 바네치카는 전쟁 발발 직후 스몰렌스크에서 독일에 포로로 잡혀 죽을 고생을 하다가 자력으로 탈출했고,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반독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소련군이 돌아오자 공식적으로 현역 복귀하여 여러 차례 수훈을 받았다. 그러나 종전 직후 그의 포로 이력을 문제삼은 [[NKVD]]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어 7년간 시베리아의 콜리마 굴라그에 수용되었다. 그동안 아내 발렌티나와 그의 아들은 반역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전쟁 전 교사였던 발렌티나는 자신들에게 지워진 부당한 평가로 인해 직업을 잃고 공사판에서 벽돌을 날라야 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507-508p] 대숙청은 말 그대로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단적인 공포 정치이자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대학살극이었다.[* 보통 숙청이라는 것은 일부 주동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정치적인 생명만 끝장내고 귀양이나 투옥, 수용소행이라는 온건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당한 이들은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반혁명분자로 고발당하거나 공안기관의 의심을 사면 바로 [[비밀경찰]]이 닥치는 대로 끌고 와 [[고문]]하면 죄가 없어도 자기의 죄를 불고 약식재판[* 사실 이것조차 생략한 경우가 많다.]을 거쳐 처형되거나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끌려갔다. 대숙청 희생자 중 50% 이상이 이미 1930년대 초부터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 등으로 탄압당하던 부농과 지주 등 농민들이었지만 이들은 농촌에 숨거나 저항하기라도 했는데 도시에 거주하던 희생자들은 대다수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결백이 밝혀지리라 믿거나 자포자기해서 저항이나 도주 없이 순순히 체포되었다. 그러나 운 좋아도 사형만 면하고 굴라크행이었지 무죄로 인정받는 일은 없었다.[* 1934년의 제17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했던 1827명의 대표들 중에서 1939년의 제18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생존자는 37명이었다.] 이렇게 비밀경찰이 닥치는 대로 고문해서 자백을 받고 총살해 1937년 여름부터 1938년 가을까지 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700,000명 이상이 처형되었고 2,000,000명 이상이 수용소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했다. 공식적인 희생자는 총 '''681,692'''명이지만 실제로는 최소한 '''950,000에서 1,200,000명'''이 처형당하거나 감옥에서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거기에 죽지는 않았지만 고문이나 시베리아 유형 등으로 고통받은 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다.[*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 때 나온 거니 대체로 축소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으나 흐루쇼프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당장 [[NKVD]]가 굴라크 등의 문제와 엮여 있었고 대숙청 기간의 소수민족 박해를 인정하면 소수민족 간의 분란이 있을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적당히 걸러서 발표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굴라크에 끌려간 사람은 수백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예조프가 벌인 마구잡이 숙청은 많은 인재를 유실시켜 소련의 국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고 예조프는 이 때문에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실각당하고 처형되었다. ||<nopad> [[파일:external/f0b6de689ffee4ace3da30dc4ac575305a2f37aad024f58f83b579402258c1ba.jpg|width=100%]] || || 대숙청 당시의 희생자들의 사진 || ||<tablealign=center><nopad> [[파일:Great_Purge_Resolution_of_Central_Committee.jpg|width=100%]] || || 스탈린, 몰로토프가 서명한 대숙청 당시 숙청 대상자 목록[br] [[데스노트|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살생부|사람은 숙청당했다.]] || ||<nopa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oroshilov%2C_Molotov%2C_Stalin%2C_with_Nikolai_Yezhov.jpg|width=5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Commissar_Vanishes_2.jpg|width=50%]] || ||<-2> [[니콜라이 예조프]] 숙청 전후 사진[br]왼쪽부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보로실로프]] [[원수(계급)|원수]][* 당시 국방장관이라고 할 만한 국방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몰로토프]][* 당시는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후에는 외무장관이라고 할 만한 외무인민위원.], 스탈린, --예조프--.[* 위 사진은 '인민의 에어브러시질'로 가장 유명한 사진이지만 [[https://www.intellectualtakeout.org/blog/stalin-erased-his-enemies-history-literally|4명이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스탈린 혼자 남은 사진이 된 사례]]보다는 양호한 편이다. 사진은 좌측부터 [[https://wblog.wiki/ko/Nikolay_Antipov|니콜라이 안티포프]], 스탈린, [[https://ko.wikipedia.org/wiki/세르게이_키로프|세르게이 키로프]], [[https://ko.wikipedia.org/wiki/니콜라이_시베르니크|니콜라이 시베르니크]]. 사실 이 중에서 대숙청으로 사망한 사람은 안티포프 하나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 심지어 숙청을 주도한 [[NKVD]]의 수장부터 두 명이나 숙청당했다. 초기 대숙청을 주도했던 [[겐리흐 야고다]]는 1937년에 체포돼 1938년 처형되었고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예조프]]도 1938년 11월 실각한 이후 1년 만에 체포돼 1940년 2월 처형당한 데다 [[기록말살형|각종 기록과 사진에서 지워졌다.]] 물론 장관들만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전임 요원들의 대부분이 숙청되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숙청자는 내일의 [[사형|시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피라미 요원들은 [[굴라크]]에 이송돼서 짧게 형을 살다가 굴라크 간수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평생 거기서 썩어야 한다는 점에서 좌천 및 귀양이라고 봐도 된다. 물론 고위 인사는 얄짤없이 [[총살형]]이었다. 오죽하면 나중에는 NKVD에서도 인력이 부족해서 당원이 아닌 사람을 데려다가 썼다. >스탈린은 격분했다. 군부는 카렐리야 지협(Isthmus)에 있는 핀란드의 방어선, 이른바 만네르헤임 선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설명하면서, 정보기관에 대한 비난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결국 하나의 주된 비난으로 모아졌는데, 이는 바로 보로실로프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국방인민위원이었으니 말이다. 엄밀히 말해 군사적 실패에 대해 비난받을 사람이 그 외에는 없었다. 적어도 스탈린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책임은 보로실로프에게 있었다. 그는 사전에 예상하지 못했고, 철저히 준비하지 못했으며, 이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샤포슈니코프가 참모총장이었다. 그의 참모들이 핀란드에 대한 작전 계획을 세우는 일을 맡았고, 우리 군 내 주요 직책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샤포슈니코프는 유능한 전문가로 평가받았지만,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문 역할에 머물렀다. 군사 문제는 그 당시 적군을 대표하는 보로실로프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 스탈린은 비공식적인 대화에서 우리 군부와 국방인민위원부, 특히 보로실로프를 자주 비판했다. 때로는 모든 책임을 보로실로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 점에서 스탈린에게 동의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보로실로프가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기간 국방인민위원의 자리에 있었으며, "보로실로프 사수(Voroshilov marksmen)"[* 보로실로프 문서에 있듯이 보로실로프처럼 사격실력을 높이자는 운동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이름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보로실로프의 자만심은 우리 인민의 경계를 무디게 하고 긴장감을 낮췄다. 그러나 책임이 온전히 보로실로프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우리가 모스크바 근처 스탈린의 다차에 방문했을 때를 기억한다. 스탈린은 화가 난 상태로 보로실로프를 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격앙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보로실로프를 호되게 꾸짖었다. 이에 보로실로프도 분노하여 얼굴이 붉어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스탈린의 비판에 대항하여 이렇게 외쳤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보로실로프가 고함을 질렀다.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 버린 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 스탈린은 이에 적당히(appropriately) 대답했다. '''그러자 보로실로프는 삶은 새끼 돼지가 담긴 접시를 집어 들어 테이블에 내리쳐 깨뜨렸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사건은 단 한 번뿐이었다. >---- >Memoirs of Nikita Khrushchev vol. 1 스탈린은 1940년 핀란드에 대한 승리 속에서도 패배의 요소가 숨어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매우 위험한 패배로, 우리 적들이 소련을 '진흙 발을 가진 거인'으로 확신하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그로 인해 국제적 정치 결과가 매우 불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소련군]]도 숙청을 피할 수 없어서 많은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많은 능력 있는 장교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장교가 되어 [[독소전쟁]] 초기 소련군이 추태를 보이는 데 기여했다. 게다가 대숙청 이전에도 소련군 장교단의 질이 그렇게 높지 않았는데 이는 장교의 숫자를 부족하게 만들어 질적 저하를 더 심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는 소련군의 경직을 불러와 독소전 초반에 독일의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스탈린의 트롤링은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소련은 이때 독일에 비해 전쟁 준비가 거의 안 됐기 때문에(스탈린 본인부터가 1943년은 돼야 혹시 독일이 쳐들어와도 안전하게 막아내리라 봤다)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더라도 독일의 파상 공세를 온전히 막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소련 국외로 도피한 자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NKVD는 국외로 도피한 인물들도 집요하게 추적하여 요원을 파견해 암살 공작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레프 트로츠키]]가 이렇게 암살당했으며 예브헨 코노발레츠(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지도자), [[만주국]]으로 도피한 친일 러시아인들 등 [[러시아 내전]] 후 해외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의 상당수와 민족주의자들도 이들에게 암살당했다. 대숙청 이전의 일이긴 하지만 사회혁명당의 지도자였던 [[보리스 사빈코프]] 역시 NKVD에 의해 소련으로 유인, 체포되어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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