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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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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부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 ==== >본고는 군부 숙청 직전인 1936년 적군 기병에서 복무하고 있던 199명의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을 분석대상으로 하여, 이들의 인적정보 및 경력 정보를 기반으로 군부 숙청을 분석하고자 한다. >---- >이정하, 1930년대 소련 군부 숙청의 원인 ― 적군(赤軍) 기병 지휘관의 이력 분석을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 2019, vol., no.59, pp. 364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는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된 1990년대부터 활발하게 등장하였으나, 군부 대숙청에 대해서는 수정주의적 시각에 관한 연구는 그보다 훨씬 늦게 등장했다. 아마 1940년 [[겨울전쟁]]이나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초창기 소련군이 보여준 무능한 모습, 정치권력을 의식하는 소극적 장교진 등을 이유로 대숙청의 부정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것이 너무나 상식적이었으며, 권력의 중추인 무력집단으로서 군부에 대한 숙청은 '스탈린의 개인적 권력 강화'라는 전통주의적 시각과 굉장히 잘 부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기존 러시아 사회의 봉건적 구조 위에서 혁명과 내전, 스탈린 혁명 등의 급진적이고 폭력적 변화를 겪기 시작한 소련의 근대화 과정과 그에 수반되는 사회갈등에 주목하는 수정주의적 연구 경향은 최근 들어 초기 붉은 군대의 형성과 발전을 바라보는 데도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에 따른 연구 결과들도 마찬가지로 속속 등장하는 추세다. 즉, 수정주의에 따르면 군부 대숙청 또한 나머지 사회에서 벌어진 대숙청의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군부 대숙청을 폭넓은 시야에서 이해하려면 군과 군부가 소련에서 가졌던 위상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경험한 파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총력전 체제를 감당할 수 없는 [[러시아 제국]]의 후진적 시스템은 전쟁 말기에 총체적으로 파탄났고 이미 국가는 기능부전 상태에 들어갔다. 무질서가 전 러시아를 휘감았고, 혁명은 그런 무질서 상태에서 빚어진, 어느 정도 높은 개연성을 가진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나서도 당연하게도 혼란은 더욱 심해졌는데, 수정주의 문단에 잘 나와 있듯이 애초에 지하정당이던 볼셰비키는 은행을 털고 파업을 종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 거대한 관료기구를 통솔하는 데는 역량을 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이어지는 러시아 내전에서 전쟁 승리를 위해 볼셰비키는 구 제국군 장교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군부 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 일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유토피아주의와 정권을 살리고자 하는 현실론의 불가피한 타협이었다. 특히 1920년대 신경제정책 시기를 거치며 소련에서는 "전문가들(Spetsy)"이 부상해 관료 집단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후 탄생한 소련 정권은 러시아 제국의 미비한 관료제를 철저한 근대 국가의 치밀한 관료제로 재편하고자 하였고 이는 엄청난 신규 인력 수요를 발생시켰다. 그렇게 들어온 이들은 어중이 떠중이들로, 극단적 혼란기를 이용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다수였다. 형성 과정에서 이런 상이한 인적그룹을 안게 되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공산당은 구세대들을 점차 신세대로 교체했다. 따라서 30년대쯤 가면 붉은 군대에서는 이런 신세대들이 거의 상위 직급에 올라섰다. 하지만 이 혁명 세대들은 근대 국가의 관료제 안에 포섭되어 있었지만 그 사회적 구성이나 행동양태는 전근대에 더 가까웠다. 대체로, 붉은 군대의 상당수 병력은 트로츠키가 주도하는 무자비한 징집제와 처형으로 충당되기도 하였지만 많은 수는 현지의 자발적인 세력 형성으로도 충원되었다. 이는 러시아 내전의 주요 전장이었던 광활한 남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마을 별로 청년들이 토지개혁을 이뤄내기 위해서 자경단과 민병대를 조직하고 백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파르티잔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파르티잔들은 주로 기병으로 조직되었는데, 지리적 특성과 당시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발전 수준 상, 광활한 남러시아-우크라이나의 초원지대에서는 전략 기병과 [[타찬카]](기관총 포대를 단 마차)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모스크바를 노리던 백군 주력을 막아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지휘관들은 이런 이유로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파르티잔 출신의 기병대 지휘관들인 경우가 잦았다. 문제는 이 지휘관들은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끌며 소련 국가 탄생에 기여하였지만, 소련 국가가 안정되고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붉은 군대의 중요한 골칫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첫째, 이들은 시작부터 강력한 규율과 정치적 통제를 전제하고 모집된 병력이 아니라 상당히 자율적인 사회집단이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 내의 이익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였고 이는 어느 정도 내전기를 통해 배태되었다. 둘째, 수정주의 문단에 설명된 것처럼, 이런 힘을 통제할만한 근대적 규율 체계가 당시 소련 공산당이나 국가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는 조직적이고 합리적 시스템의 논리보다는 개인의 비공식적 관계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고, 하부 집단에 대한 상부 집단의 일관된 통제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었다. 통제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적 카리스마 혹은 후견-피후견 관계에 입각한 거래를 통해서 채워졌던 것이다. 이미 내전기부터 파르티잔 계통의 부대에서 이런 문제는 표면화되고 있었다. 예컨대 당이 약탈을 금지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 심한 경우 상급 당조직에서 정치위원이 파견되어 이를 분명히 경고하였고 심한 경우 처벌까지도 갔으나 몇몇 집단에서는 이에 대해 반란으로 대항하기도 하였다. 분명히 같은 공산주의를 추구한다는 슬로건을 걸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소비에트 정권이 추구했던 것은 계급이 사라진 '진정한 공산주의'보다는 근대 국가로의 전 사회적 전환이었다. 여하튼 1920년대에 소련 국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 군부 또한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자체적인 이익집단으로서 활동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내전 때 방대하게 팽창했던 군은 굉장히 많은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먹는 하마나 다름 없었다. 당은 군축안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으나, 군 조직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당지도부의 골머리를 썩혔다. 또한, 이해관계와 인적네트워크로 엮여 오염된 당시의 감사체계는 소련 군 내부의 비리를 방지할만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일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러시아 내전 당시 어디서 활약했는가를 두고 내부의 파벌이 자리잡았고 이것이 분파주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스크바 정치국의 상황을 반영했다. 전쟁의 주 무대가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였던 만큼 파벌도 이 둘로 갈렸다. 우크라이나는 독일 및 폴란드와 접경한 곳이자 민족주의적 반군도 있던, 전략적으로 복잡하고 중요했던 곳이니 만큼 당시 군사인민위원회를 맡았던 트로츠키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한편 남러시아의 경우 볼가강의 수운 네트워크를 통해서 모스크바에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위치였다. 이곳이 뚫린다면 또한 모스크바가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붉은 군대는 캅카스와 남러시아에 자리잡은 [[안톤 데니킨|데니킨]]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야 했다. 볼가강 변의 차리친, 후에 스탈린그라드로 알려지게 되는 도시가 이곳에서 중심적인 지휘부가 되었다. 이곳에 부임한 정치위원이 트로츠키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던 스탈린이었고, 보로실로프나 부됸니 같은 군인사들이 이 때 스탈린과 중요한 인연을 쌓았다. 내전의 경험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트로츠키와 인맥을 형성한 그룹과 남러시아를 중심으로 스탈린과 인맥을 형성한 그룹이 병립해서 소련 군부 내에서 강력한 양대 파벌을 형성하게끔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군부의 파벌화 경향은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중앙 정치에서의 갈등과 맞물렸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형성된 파벌이 트로츠키가 숙청당하자 30년대 내내 군부 내부를 통일된 조직으로 만드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한 것이 가장 중요했다. 트로츠키의 후원을 받던 군 인사들은 통수권자로서 스탈린과 보로실로프를 극히 불신했고, 그들을 소련의 통수권자가 아니라 특정 파벌의 대표 정도로나 인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탈린의 후원을 받은 집단 또한 당중앙의 의도와 배치되는 행동을 이어갔는데 이는 그들이 중앙 정계와의 끈을 믿고 규율을 따르고 통제를 받아야 하는 그들의 위치를 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갈등은 1934년 나히모프 사건, 투하쳅스키를 주축으로 한 장군들이 보로실로프를 몰아내려고 하던 계획의 적발 등으로 이어졌고, 2차 5개년 계획이 진행되면서 점차 심화되던 소련의 당-국가 시스템의 진화와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었다. 행정과 집행 권력을 중앙으로 일원화하고자 하는 스탈린의 의도는 당원에 대한 정기적인 관리와 주기적인 숙청[* 가벼운 처벌부터 출당과 때로는 투옥, 이어서 사형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징계]으로 구현되었다. 군부는 소련 정권의 특성과 파시즘의 발호로 가중되는 안보적 위협 때문에 필히 당중앙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정리가 되었어야 했고, 스탈린은 이를 정리했다. 따라서 군부 대숙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막스 베버가 말하였듯 근대 국가는 "폭력의 독점체"고, 근대 국가라면 군은 자율적 활동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필요에 의해 다스려지는 객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련 군부는 내전기 파르티잔 활동으로 형성되어 자율적으로 행동하고자 한 경향이 강했으며, 더욱이 소련 성립 이후 사회 전반에 나타난 파편화와 혼란으로 인해 정치권력의 단일한 도구로 기능하지 않았다. 소련 군부는 각자의 출신과 직급 등으로 파벌화 되어 있었고, 이들은 자율적 주체로 자신들의 이익을 정치적인 수단과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종종 드러냈다. 이런 그들의 "노력"은 파벌 갈등, 독직, 비리, 횡령 등을 포함하곤 했다. 하지만 당-국가는 자신들의 손아귀에 폭력을 절대적으로 독점하도록 만들고자 했고, 이 충돌이 결국 군부 대숙청으로 이어졌다. 이하 살펴볼 실제 군부 대숙청에 희생된 군인들의 다양한 숙청 사유는 당시 소련 군부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추측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일반적으로 숙청은, 아무 맥락 없이 "이 자는 트로츠키주의자" 또는 "파시스트 첩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체포, 고문을 거쳐 형식적 자백이 동반되는 약식재판이 이어지고, 그 뒤 처형이나 수용소행이 이어진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숙청 사유'가 낯설게 들릴 수도 있다. 물론 위의 일반적 이미지는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으며, 특히 수십만의 무고한 소련 시민에 대한 "대규모 작전(Massovaya Operatsiya)" 약식재판과 처형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합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간부 당원 및 군부에 대한 숙청은 이런 단순한 이미지보다는 조금 복잡한 양태를 띤다. 실제 숙청의 양태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료는 소련이 남긴 다양한 행정서류들이다. 관료국가를 지향했던 소련답게 숙청에는 흔히 숙청 명령서가 동반된다. 명령서에는 다종다양한 숙청 사유들이 동시에 기재 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사유는 그 수많은 사유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 사유들이 결국 붉은 군대와 소련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으니 숙청 대상자는 결국 소련 내부에 침입한 첩자이자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1.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군관구에 대한 숙청 예로님 우보레비치[* 리투아니아계였으며, 리투아니아식 이름은 예로니마스 우보레비추스(Jeronimas Uborevičius)였다.]와 이오나 야키르는 군부 내 스탈린의 핵심 측근들이다. 기존의 통설은 이들이 군부 내의 "기갑파"를 대표하며 보로실로프와 부됸니의 "기병파"와 갈등했기에 숙청당했다는 것이지만, 보로실로프는 오히려 기갑군을 적극 지지했던 것으로 밝혀져서 이 가설은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스탈린은 오히려 이들을 신용하여 각각 벨로루시 군관구와 우크라이나 군관구의 군관구 장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지역 군관구에 들어가서 스탈린의 친분을 무기로 군관구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군관구 내부에서 본인들의 파벌을 만들었으며, 스탈린은 이들이 자신의 통제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의도적인 인사 정책을 실행했다. 이를테면 다른 군관구와의 인원을 주기적으로 교환하게끔 한 것이나, 야키르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군관구를 키예프와 하리코프의 두 군관구로 분할한 것이 그렇다. 하지만 이 문제는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우보레비치는 자신의 지역 영주 같은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부대 내의 장갑차를 사적 유용하여 자녀의 등교를 지원하도록 했고 부대의 유류 보급품을 횡령해서 외국에 밀매하기여 착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런 행위는 공산권이 아닌 민주주의 자유진영에서도 숙청감이다.] 이에 대해 군최고통수권자인 스탈린은 야키르와 우보레비치에게 모스크바 중앙군의 보직을 맡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야키르는 와병을 핑계로 오지 않는 등 인사변동에 저항했다. 우보레비치도 비슷하게 대응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이들에게 기회를 줬으나, 계속하여 보직변경에 응하지 않자 명령 거부를 근거로 숙청했다. 2. 우크라이나 분파(친 트로츠키)에 대한 숙청 러시아 내전 당시 트로츠키와 인적 신뢰를 쌓고 군부 내에서 활약한 인사들은 필연적으로 스탈린에 불신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이 갈등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졌다. [[프리피야트]] 늪지를 지나 측면이 과도하게 노출되었을 때 붉은 군대는 폴란드군에게 각개격파 당하는데[* 당시 폴란드 전선은 크게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서부전선군과 예고로프가 지휘하는 남서전선군으로 나뉘었는데, 벨라루스-우크라이나 중간에 자리잡은 거대한 프리피야트 늪지 때문에 두 전선군 간의 연결이 약해진 상태에서 각자 폴란드 영내로 진공했다가 서부전선군은 [[바르샤바 전투(1920년)|바르샤바 전투]]에서 박살이 나버렸고, 남서전선군은 [[르비우]]를 두들기다가 서부전선군이 파멸한 직후 마찬가지로 박살이 나버렸다.], 이 중 북부에 있던 우크라이나계와 남부에 있던 남러시아계는 책임을 서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이는 정치권의 갈등까지 반영하게 되었다. 결국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스탈린이었고, 따라서 스탈린의 비호를 받을 수 있던 남러시아계 분파가 군 조직 내부에서도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는 1935년 보로실로프가 주축이 되어 붉은 군대에 계급을 수여할 때 가장 극심해졌다. 트로츠키계 군인들은 러시아 내전에서 유사한 활약을 했어도 스탈린계 군인들에 비해서 낮은 계급을 받곤 했기 때문이다. 보로실로프는 이에 대해서 어떤 편향성이나 불공정함이 당연히 있을 것이고, 이는 최선을 다해서 교정하겠다고 해명했으나 군부 내의 특정 그룹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실제 소장 계급을 부여받은 이가 멋대로 별을 하나 더 붙여 중장 계급이라고 강변한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최고 지도자인 스탈린은 어떻게 못해도 군행정가로서 보로실로프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우크라이나 파벌 안에 생겨났다. 하지만 최고 지도자인 스탈린의 위임을 받은 국방장관을 끌어내리려는 음모는 결국 군에 대한 문민통제에 반하는 것이었다. 물론 우크라이나 파벌의 반발은 트로츠키의 정치적 몰락이 가시화되면서 예견된 것이었다. 중앙위원회 회기 당시 스탈린 파벌이 트로츠키를 격렬히 비판해 승기를 거머쥐었을 때에도 일화가 있었다. 당시 트로츠키 계파였던 붉은 군대 소속 중앙위원이던 슈미트는 군도를 빼들고 스탈린에게 겨눈 뒤 "죽여버린다"는 식의 엄포를 놓기도 했었다. 3. 남러시아 분파(친 스탈린)에 대한 숙청 하지만 스탈린은 자신과 친분이 있다고 하여 남러시아에서 같이 싸웠던 군인들의 행동을 무한정 용인해주지는 않았다. 스탈린과 친분이 있던 우보레비치나 야키르가 숙청당했듯, 러시아 내전 때 스탈린과 함께 활약했던 군인들 또한 숙청의 대상에서 피해갈 순 없었다. 그들의 피해가 전반적으로 트로츠키계보다는 적었다고는 해도 말이다.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의 사례는 가장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다. 그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부상한 갈등은 군부 내의 균열을 드러내준 인물이었다. 스탈린과 친분이 있었고 같이 차리친에서 활약한 예고로프 원수는 당연히 보로실로프, 부됸니와도 친했다. 예고로프는 자신들의 실책을 계속 비판하는 투하쳅스키와 우크라이나계 파벌들을 적대시 했고, 1930년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투하쳅스키와 우크라이나계 파벌의 실책을 비난하는 굉장히 공식적인 문서가 될 수 있었다. 예고로프는 출간 전에 지지를 받기 위해 이 책을 같은 파벌에 있던 보로실로프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보로실로프는 "우리는 이미 붉은 군대의 중책을 맡고 있고, 다른 당사자들 또한 그렇다. 우리가 날카로운 역사가가 결코 될 수 없고 객관적인 시야로 저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라고 답했다. 기분이 상한 예고로프는 스탈린은 당연히 지지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책의 헌사를 스탈린에게 바쳤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고 잠시 묻혀 있던 갈등은 이 회고록 때문에 표면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통일된 당지도부 아래에서 군의 통합을 추구했던 스탈린이나 보로실로프가 용납할 수 없는 독단행동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즉시 예고로프를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이 나오고서도 8년 동안 기다린 뒤, 1938년 숙청이 막바지에 이르자 그때서야 예고로프를 공식적으로 비판했다. "불만이 있으면 중앙위원회에 나와서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제기해야하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멋대로 갈등을 조장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예고로프는 곧 투옥되고, 감옥에서 죽었다. 최종적으로 숙청당하지는 않았지만, 숙청 위기까지 몰렸던 부됸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부됸니 역시 스탈린, 보로실로프와 친했으나, 기병대는 사실상 부됸니의 군대라 인식되었고 부됸니 또한 그 생각을 어느 정도 긍정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부됸니는 자신의 기병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군기문란이 심했다. 이러한 것들은 숙청의 잠재적 사유로 꼽혔고, 숙청 직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4. 군기문란 이상의 군인들은 파벌문제도 그렇고 군기문란 문제도 매우 심각하였다. 우보레비치, 야키르, 투하쳅스키는 서부의 국경지대를 맡던 핵심 인물이다보니 많은 지원을 받았다. 특히 그들의 기갑군 구상은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이에 외국 인사들까지 초청한 소련 내의 대규모 기동훈련을 열게 되고 이는 소련의 항공전력과 기갑전력을 과시해서 산업화의 성과를 홍보하고자 하는 국가적 행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훈련을 감독하던 군관들은 훈련이 보여주기 행사를 위해서 조작된 정황을 엄청나게 많이 포착하였다. 이 '기동훈련 사건' 또한 후에 숙청 사유로 등장했다. 훈련을 수행하지 않고 훈련시간으로 등록한 일과 같은 사소한 서류 조작은 매우 흔했다. 횡령도 다반사여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는 자바이칼스크 군관구에서 건축자재를 횡령하여 발각되기도 했고, 이는 그의 숙청 사유 중 하나가 되었다.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는 몽골에 파견 되었을 때 그의 병사들을 거의 관리하지 않았다. 어떤 병사들은 몽골의 불교 사찰에서 금박을 긁어내서 털어갔고, 다른 병사들은 라마승을 강간하고 부대 옆에 주도적으로 집창촌을 만들어 이 같은 일들이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사례들은 군부 대숙청이 단순히 스탈린의 폭정에 저항한 유능한 장교진에 대한 탐욕스러운 권력욕으로 이루어졌다는 통설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지방당이나 여타 기관에 대한 숙청과 마찬가지다. 군부 대숙청은 스탈린의 권력을 늘려주었고, 군을 경직화시켰다. 이는 히틀러가 초기에 소련을 침공했을 때 재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 대숙청 이후 소련이 확보한 군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고려한다면, 군부 대숙청 없이 다가오는 전쟁에서 소련이 생존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스탈린의 전략적 오판과 전술적 실책들, 무능하고 타격받은 장교진들은 분명 재앙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대숙청이 없었다면 독소전쟁 당시도 붉은 군대의 각급 부대는 지휘관 나름대로의 자율성을 간직한 채 러시아 내전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독자적 행동을 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대숙청 없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62군의 추이코프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볼가 강변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천왕성 작전의 미끼로 던져지는 과감한 구상을 실현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키예프 방어전에서 스탈린이 위치를 고수하라는 어리석은 명령들로 쓸데없는 손실이 발생했다고 후세인은 쉽게 욕할 수 있지만 상부 명령 없이 퇴각하는 일이 대규모 발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명령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블라디미르 레닌]] 시절부터 적대적으로 간주하던 [[적백내전]] 당시 기용한 구체제 전문가들을 내전 종식 이후 대체 인력이 나오자마자 빠르게 물리적으로 대부분을 제거한 것,구체제에서 교육을 잘 받을 수 있던 계층의 입대를 반혁명적이라는 이유로 봉쇄하고 교육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던 노동계층 출신 장교의 육성만 시도한 것과 동시에 인상과 처우 개선이 이뤄지는 1935년 이전에는 숙련 노동자보다도 열악한 봉급과 처우를 제공한 것 등의 실험적인 조치와 전반적인 혹독한 대우로 이미 붉은 군대의 장교단은 대숙청 이전부터 수준이 '''원래''' 낮았고 대숙청은 정치적인 면이라면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수정주의도 A.A 스미르노프가 주장했다.[[https://m.blog.naver.com/laguel/222394774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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