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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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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 === 한편 이런 전통주의적 시각의 틀 안에서 공부를 한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1970년대부터 소련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혁명 이전의 러시아를 연구하던 사학자들이 자신들의 방법론으로 스탈린 체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대숙청도 이런 새로운 분석을 피해갈 수 없었다. 2차대전 시기에 [[독일 국방군|독일군]]이 노획하였던 스몰렌스크 문서고와 같이 서방권에서 가용할 수 있던 소련 내부 자료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각각의 수많은 사회집단들이 각자의 이익을 주장했으며 대숙청에서 대규모 대중참여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요약하자면 수정주의에서는 대숙청은 본질적으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지향하던 소비에트 연방과 스탈린이, 중앙당 및 '''지역당의 기율 와해 상태를 바로 잡아내기 위해 수행한 몇가지 노력들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대폭발을 한 것'''에 가깝고, 흔히 생각하는 키로프 암살에서 예좁시나까지 이어지는 스탈린의 거대 계획이라는 것이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고로 수정주의는 전통주의와 달리 개인이 아니라 다른 기타 요인에 초점을 둔다.] 비유하자면, 난장판이 된 집을 청소하려고 손을 댔더니 쓰레기더미가 제멋대로 기우뚱거리다가 스스로 붕괴된 사고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우선 1929년과 1933년 숙청[* 러시아어에서 숙청을 뜻하는 Chistka(Чистка)는 정기적으로 질이 안 좋은 당원을 솎아내는 개념에 가깝다. 청소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만큼 단순 자격 박탈 혹은 일시 정지부터 심하게는 처형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형태로 이뤄졌다. 특히 폴란드나 독일 등지에 당원증을 팔아 넘기는 행위는 비단 소련뿐 아니라 비공산권 국가에서도 얄짤없이 사형까지 갈 수 있었던 [[간첩]] 행위다.]을 진행하고 당원들의 현황을 조사하면서 스탈린과 중앙당은 '''지역당의 한심한 실태'''를 알게 된다. 소련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특권을 보장해 주는 당원증부터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당 사무실에서 이름이 비어 있는 당원증을 뭉텅이로 빼돌려서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에 팔아 넘긴다든지, 당원이 죽었는데 가족들은 당원증을 계속 갖고 있어 배급 특전을 계속 받아먹는다든지, '''비리나 횡령으로 출당되었는데 당원증만 갖고 다른 동네로 가서 당원 행세를 하고''' 그 지역 요직에 다시 올라 있다든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전반적인 당원의 질도 굉장히 안 좋았다.[* 1929년 숙청 당시 출당 대상자들의 37%가 과음이 사유였다. 그러니까 '러시아 기준'으로도 과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소련-러시아의 술 소비량은 많았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목표였던 당시 소련 입장에선 자기 통제 없이 술에 취해서 일을 그르치던 지역당원들의 모습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특히 5개년 계획을 거치며 엄청나게 팽창한 소련 관료제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혁명에 한 몫 했던 안 했던 일단 행정업무들을 처리할 능력은 있던 어중이떠중이를 받아서 일을 시켰는데 이들의 상당수가 숫자놀음만 하면 끝날거라고 생각한 경제 문제에 천착하느라 다른 조직적인 일, 즉 정치적인 일에서는 아예 개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로 정치와 곧장 이어진 경제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조차도 어려워했다. 심지어 대놓고 중앙정부에 거짓 보고서를 올리는 것마저도 일상이었다. 이를테면 우랄에서는 [[우크라이나]]와의 제철소 수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지질조사국을 갈아 버리면서까지 없는 탄광, 없는 광맥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고 보고서 조작에 생산 장부 조작 등 온갖 막장스러운 일들을 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자원 없는 곳에 세워진 이 공장들은 독소전쟁 때 쏠쏠하게 쓰인다.] 한편 지방을 통제할 당원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해 몇몇 집단농장에는 맡아서 관리하는 당원들이 하나도 없거나 한 명 있으면 많은 정도의 개판이었다. 러시아에 붙어있다는 스몰렌스크가 이 정도였으니 당시든 지금이든 소련-러시아 영토에서 후미진 시골 지역인 중앙아시아나 극동 지역의 부정부패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군인들이 장갑차로 자기 자녀들을 통학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당원과 관료들의 질이 형편없었던 이유는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소수계층을 빼면 전반적인 교육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혁명과 전쟁을 거치면서 기존의 식자층인 귀족과 신부, 부르주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거 해외로 탈출하거나 전쟁 도중에 죽는 경우가 허다했고 새로이 기용된 이들은 고급지식은커녕 키릴 문자나 조지아 문자, 아르메니아 문자, 라틴 문자, 아랍 문자, 몽골 문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비롯한 기초적인 지식에 무지한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며 자질이나 인성도 양아치 수준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능력도 인성도 있지만 기득권의 벽에 부딪친 인재들도 있기는 했겠지만 그보다는 그냥 동네에서 힘 좀 쓰는 양아치 수준인 무학자들이 몇 배로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기존 사회의 모든 것들을 깨부수는 혁명의 특성으로 인해 가진 것 많은 상류층과 적어도 본인과 가족들 먹여살릴 재산은 나름대로 존재하는 중산층은 자기들이 가진 것들이 다 날아갈 위험 때문에 기존 체제에 충성하면서 반혁명적 태도를 보이는 반면 서민층 이하에 속한 사람들이나 범죄자, 어중이떠중이들은 어차피 재산이나 명성, 신뢰와 같은 유무형의 자산을 매우 적게 쌓았거나 아예 안 쌓은 경우가 부지기수인라 잃을 게 없다는 심정으로 혁명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해당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상부 입장에서는 목숨 걸고 자신들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하급자들에게 보상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과거가 구린 이들도 혁명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권력을 받으면서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 기존 관료층이 혁명으로 쓸려나가고 그 감투를 쓰게 된 동네 양아치들의 수준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인수인계는 못 받았고 경험은 없고 할 일은 넘쳐나는 상황이니 유능한 이들도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업무환경에 아무리 문맹 퇴치 교육으로 글을 읽고 쓰는 기초적인 교육을 시켜서 기껏 기용시켰다고 한들 말 그대로 기본적인것만 교육받은 수준인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인재들을 대량으로 배치한 부작용이 소련 관료제의 부정부패였다. 여기에 부채질을 한 것은 공산당의 태생이었다. 공산당 지도층조차 제대로 된 관료가 없었는데 러시아의 공산당은 혁명 이전까지는 지하조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소련 공산당에게는 관료제를 이끌 능력 자체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실제로 소련 건국 초기를 다룬 풍자성 농담 가운데 하나가 어느 지역의 지방당에서 개최한 10월 혁명을 기념 집회에서 지방당 총비서가 연설했던 내용 가운데 혁명 전에는 가난한데다 문맹이긴 했어도 평범한 사람이었던 마리아와 이반 안드레예프는 혁명 이후 빈민층에서 벗어나 서민층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그쳤지만 성격과 행실이 나쁜 건달 트로핌 세메노비치 알렉세예프는 혁명 이후 '''군당비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일이 소련의 지방당에서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애당초 수뇌부 주요 일원이었던 카가노비치부터가 아예 문맹이였고, 그뿐만 아니라 말렌코프, 흐루쇼프 등도 공산당이 밀어줘서 학교에 가기 전엔 무학이었다. 칼리닌은 초졸이었고, 불가닌, 미코얀도 그 당시로는 잘 교육받은 축에 속했다지만 국가 수뇌부라고 봐주기엔 부족한 고등학교 정도 학력에 불과했고 대졸자는 몰로토프 정도로 손에 꼽았다. 그나마 이렇게 중앙에 진출한 자들은 교육 수준이 낮아도 실무능력이 입증된 경우이니 나았는데, 지방 간부들의 수준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식하고 무능해도 공산주의 좀 곁들여서 소리 좀 지를 줄 알고 윗사람한테 잘 굽신대던 전직 한량들이 지방 간부들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셈. 1934년에 당원 관리의 실패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드러났는데 출당을 당해서 이제 '''당원도 아닌 자가 레닌그라드 당 사무소의 경비를 반납하지 않은 당원증으로 속여먹고 세르게이 키로프를 암살해 버렸다'''. 안 그래도 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확인 조치에 들어가려고 했던 공산당 중앙 정부는 화들짝 놀랐다. 여기서 잠깐, 키로프 암살 사건에 대해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에서는 키로프 암살이야말로 스탈린 숙청의 결정적인 전기이며, 스탈린이 이를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정주의 입장에서 키로프 암살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숙청을 연구해 온 학자 게티에 따르면 우선 전통주의적 시각에서 전제해 온 "온건한 키로프" 모델이 근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실제로 트로츠키를 비롯한 스탈린의 정적들은 그를 온건하다고 인식한 적이 없었다. 키로프 본인은 집단화와 산업화를 최전선에서 이끈 스탈린의 충복이었고, 실제로 키로프가 레닌그라드 지역당을 맡았을 때 그가 파괴한 정교회 성당은 전임자인 카메네프와 후임자인 즈다노프보다도 많다. 키로프가 온건파라고 알려진 근거로 인용되곤 하는 1934년의 당대회 연설에서도, 키로프는 좌익 및 우익 반대파에 대해 조소로 일관했고 비밀경찰의 강제노동 활용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가 온건파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물론 스탈린은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자기와 사소한 의견 충돌이나 개인적인 갈등만 있어도 자주 피를 보는 인물이긴 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의 회고록을 보면 그렇다고 보기도 힘들다. 스베틀라나는 스탈린과 키로프의 개인적 신뢰 관계를 언급하며 스탈린이 그의 죽음으로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키로프가 온건파가 아니었고 스탈린과의 관계 또한 좋았을지라도 높은 인기로 스탈린에게 위협이 되었을 수는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대중적 인기를 가진 충신이 숙청당하는 사례는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로프 위협설의 중요한 정황증거로 인용되는 1934년 중앙위 선거도 근거가 그리 확실하지는 않다. 중앙위 선거에서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무더기로 나왔다는 설은 당시 투표 집계를 진행했던 사람 중 하나인 베르호비흐가 1960년에 증언한 것을 그 시초로 한다. 베르호비흐는 정확한 숫자는 기억 안 나지만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123표였나 125표 정도 나왔다고 말했고 지도부를 당혹스럽게 한 투표함은 폐기된 뒤 조작된 공식 통계가 발표되었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스탈린은 당시 1,059표 중에서 3표의 반대표를 받았다.] 그러나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그런 일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고 후에 소련 정부에서 추가적으로 1934년 투표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지만 베르호비흐의 증언을 확인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166표 가량이 비기는 했는데 이것이 단순히 투표에 불참한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그 중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몇이나 나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로프의 인기에 대해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나중에 언론인 펠릭스 추예프와의 인터뷰에서 추예프가 스탈린이 수백표의 반대표를 받았고 키로프는 아무 반대표도 받지 않은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자신과 스탈린은 2~3개 정도의 반대표를 받았고, 키로프가 반대표를 하나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지만, 자신의 기억엔 퍄트니츠키를 제외하곤 그런 경우가 없었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키로프가 스탈린보다 높은 권위를 누렸기 때문에 스탈린이 그를 시기했다는 말에는 크게 화를 내며 키로프를 당정의 지도자가 아닌 듣보잡 선동가 정도로 폄하했다. >몰: 터무니없는 소리! 당대회 속기록을 읽어보시오! 누가 더 큰 권위를 누렸나? 스탈린인가 아니면 키로프인가? 키로프의 논문 및 연설집을 읽어봐. 거기에 뭐가 있나? "나는 스탈린 같이 거대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 이 말은 키로프가 말한 걸 기억나는 대로 인용한 거요. 그런데 거기 어디에 지도적 성격의 정치적 지시가 있는가? 그는 요구하지 않았소. 그는 다른 유형의 사람이야. (...) 키로프는 1917년 당시 당 조직 그 어디에도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소. 그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거요. 그는 지방 신문사에 앉아 있었어.... 그런데 키로프를 서기장으로 밀려고 했다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야! 그것은 그자들의 근시안적인 사고를 말해주는 거요, 불쌍한 인간들! 키로프도 그들을 비웃었어! >---- >추: 혹자는 키로프가 당시 서기장이 되지 못한 게 당의 최대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 >몰: 누가 그렇게 말을 해? 마음대로 말하라고 해. 정치적 지도라는 시각에서 키로프에게 뭔가 가치 있는게 있는가? 그럼 가치로써, 유용성으로써 구별되는 그의 사상이 과연 있는지, 있으면 말해보라고 해! 어디에도 없어! 그 독창성으로서가 아니더라도, 스탈린이 말한 것과 뭔가 구별되거나 아니면 뭔가 새로운 것을 보충한 것이라도 있나? (...) 동무들이 키로프가 더 좋았다거 하는데, 그럼 키로프에 관해 무엇을 아시나? 그가 무슨 일을 했지? 스탈린에 관해서는 그의 저작과 논문들, 그리고 그가 어디에서 일했는지도 우린 다 알고 있소. 그런데 키로프는? 그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거의 일하지 않았소. (...) 그는 대중운동가요. 그런 사람도 매우 필요해. 어떤 경우엔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필요했어, 자기 자리에서 말이오. 반면 더 굵직한 일에 대해서는 그의 능력이 많이 부족했소. 이론적으로 준비된 게 없었어. 그런 강고함도 없었고. 확실히 그런 사람이 국가를 혁신하고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은.... 키로프 암살이 소련인들 입장에서도 굉장히 의문스러운 점이 많은 미스테리 사건이었기 때문에 스탈린 사후 정치국 차원에서도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한 바 있으며 특히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 암살범인 니콜라예프의 일기도 나왔는데 그 일기를 들여다보면 그가 정신적 질환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위대한 혁명적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등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적혀 있다. 키로프 암살이 탄압의 전기라고 하는 것도 의심스러운 건 마찬가지인데 왜냐면 지노비예프는 키로프가 암살되기 이전부터 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로프 암살을 분명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암살 자체를 스탈린이 사주했다고 의심해볼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심을 표할 만한 근거도 충분히 많다. 판단은 알아서. 하여튼 공산당은 1935년 프로베르카(Проверка)[* 사실 뭐 엄청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검사, 점검 정도의 뜻이다.]라고 불리는 작업을 시행했는데 바로 신규 당원의 입당을 막아버리고 각 지역에서 당원 명단을 확실하게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근무태만으로 무지막지하게 지연되었다.[* 사실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다. 5개년 계획으로 다들 맡아야 했던 업무의 양이 엄청 무거웠던 건 분명한 사실. 게다가 이때 중앙당에서는 생산량을 맞추라고 맨날 닦달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사라토프]]와 같은 지역에서는 아예 제대로 하지도 않고 금방 끝내고 치워버렸으며 후에 즈다노프는 이를 보고 매우 어이없어했다.] 그리고 확인해 보니 더 가관인 모습들이 나타났다. 당원 목록에 명단은 올라가 있는데 지역에서 찾아볼 수도 없는 사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고, 기존 문서의 한심한 관리 상태가 또 다시 드러났던 것이다. 중앙당에서는 이와 동시에 당원을 확인하면서 출신 계급을 속인 자, 비리, 횡령, 과음, 근무태만 등의 사유를 보이는 자들을 또 쳐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당의 상급 당원들이 자기들끼리 뭉쳐서 내부의 잘못은 쉬쉬하고 하급 당원을 제물로 보내버리는 정황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지역의 NKVD도 같은 패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이 과정에서 일반 하급 당원이 지역의 상급 당원들과 간부급에게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1936년 구 당원증을 신규 당원증으로 교체하는 작업까지 수행한다. 관료제 내부의 무능을 잡으려고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급진파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기용한다.''' 즈다노프는 지금 관료제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개판인 건 당원들이 정치와 당의 역사에 대해 개념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지역당 조직 내부가 대중들과 유리되어 있어서 민주적인 참여가 제한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당시 공산당에서는 "님 뭔 소리 하시는 거죠?" 라고 통할 만한 급진적인 주장을 하였다. 즈다노프는 심지어 당 조직 내부에서 상급자를 비밀선거로 뽑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치는데, 스탈린은 이에 흡족해하면서 당원들을 이 수단으로 통제하고자 노력하며 각지에 "님들 정치교육 빨리 좀 돌리셈." 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그리고 즈다노프와 스탈린의 합작품으로 나온 것이 바로 1936년의 스탈린 헌법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하여 스탈린의 교시가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붉은 군대 사관학교 연설에서 행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라는 말이었다.[* 이는 간부가 결정권을 독점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이제 산업화 열심히 해서 '''최신 기술 많이 들여놨는데 기술을 쓰는 간부들의 상태가 노답이다.''' 그러니 이제 간부의 숙련도가 소련이라는 국가를 다스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였다. 규율을 철통같이 강조해야 할 사관학교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스탈린이 이 말을 한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즈다노프는 지금 당 내에서 '''중요한 건 비판과 자아비판'''이며 자유로운 비판의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야말로 당 관료조직의 일이 효율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지역당의 자치권을 억제하기 위하여 지역의 독자적인 경제 및 재정권한, 사형을 핵심으로 하는 사법권한을 은근슬쩍 박탈한 상태였다. 한편 중앙당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스탈린 파벌 내부에서의 싸움이 격화되는 중이었다. 트로츠키, 부하린에 대한 강경한 처벌과 산업생산에서의 급진적 움직임을 지지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이들 당 내 반대파들에 대한 유화적인 해결책과 온건한 산업투자를 지지했던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의 다툼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로토프는 당시 소련의 정부부처라고 할만한 인민위원회들의 회의를 주관하는 소브나르콤[* [[소련 장관회의]]의 전신.]의 의장으로 있었고, 오르조니키제는 5개년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모든 국가자원을 먹어치우고 있었던 중공업인민위원이었는데, 몰로토프가 오르조니키제의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오르조니키제 개인의 인망과 중공업인민위원회가 갖는 막대한 권력으로 둘의 다툼은 관료제 내부까지 스며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트로츠키를 지지하던 몇몇 당원들이 어설프게 일을 벌이다가 잡히는 일이라던가, 트로츠키가 소련 내부의 지지자와 사적으로 연락하던 게 걸리는 일 등이 발생하였고 결정적으로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이 벌어짐에 따라 온건파의 입지는 굉장히 취약해졌다. 이 시기에 스탈린이 매우 상징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바로 [[겐리흐 야고다]]를 내리고 '''[[니콜라이 예조프]]'''를 NKVD 위원장으로 앉힌 일이었다. 니콜라이 예조프는 반대파들에 대한 색출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자는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야고다는 그에 반대하고 적당히 몇 놈 잡아서 족치는 수준에서 끝내자고 치워버린 것. 야고다는 우편인민위원회라는 엄청난 중책(...)을 떠맡게 되고 공산당 중앙위 산하 당통제위원회의 의장이었던 예조프가 그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처음에 한 일은, 과거 트로츠키파의 일원으로 현재 오르조니키제의 충실한 부하로 변신한 퍄타코프를 숙청하는 일이었다. 몰로토프는 오르조니키제가 공격받는 것에 신나서 그를 극딜했으며, 퍄타코프는 투옥되었고 오르조니키제는 얼마 안 가서 '''자살한다.''' 이게 자살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이 많을 정도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공산당 내 온건파는 이를 기점으로 몰락한다.'''[* 몰로토프가 오르조니키제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오르조니키제의 장례식이다. 이 날 얄궂게도 몰로토프가 장례식 연설을 맡게 되었는데, 처음엔 오르조니키제를 엄청 칭찬하다가 그가 퍄타코프와 같은 불순분자를 중용한 건 매우 큰 실수였다고 디스했다. 오죽 서로 안 좋았으면 장례식에서까지 그런 말을 하겠는가. 여담으로 오르조니키제가 죽기 직전 중공업인민위원회는 몇 개의 소위원회로 차츰 분리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오르조니키제가 죽자 완전히 공중분해되어버린다.] 러시아의 여러 비극들이 그러하듯, 급진파가 온건파를 압도해버리는 시나리오가 결국 벌어진 것이었고 이때부터 NKVD의 무자비한 지역당원 숙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예조프가 올라가자마자 한 일은 NKVD의 조직개편과 조직장악을 실시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NKVD는 각 지역의 지부들이 지역 당 조직과 사실상 협력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감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정보가 뜨면, 지역의 NKVD 위원장이 나서서 감사 정보를 흘려주는 막장스러운 일도 많았다. 예조프는 야고다 체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유착관계와 업무태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잔혹한 조직개편 및 숙청을 실시하였다. NKVD 지부들의 상부 인원들을 싹 다 교체하고 체포하였으며 기존 야고다와 연줄이 있는 그룹은 다 갈려나갔다. [[사라토프]] 주의 NKVD 의장인 로만 알렉산드로비치 필랴르를 소환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예조프 : 인민의 적을 체포하는 데 왜 이리 안일하게 일하시는지? >필랴르 : 우리는 체포될 필요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했습니다. >예조프 : 그렇소, 그러나 그들은 고립된 개인일 뿐이었지.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위협을 제기하는 이들은 아니오. 여기, 이 리스트를 읽어보시오. >필랴르 : 제가 알기로 이 사람들이 국가적대행위에 가담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아니, 당과 정부와 붉은 군대의 중요 직책을 차지한 공산주의자들을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체포한단 말입니까? >예조프 : 어떤 근거가 없다고? >필랴르 : 법적 근거 말입니다. >예조프 : 이 리스트를 받아가시오. 삼일 주겠소. [[사망 플래그|당신 일을 체크할 테니.]] 필랴르는 3일 후 체포되었고 그의 자리는 예조프의 심복들로 교체되었다.[* 애초에 필랴르가 폴란드 귀족 출신이었던데다가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하기 전에 [[멘셰비키]]에 몸담은 이력이 있었던 것 때문에 숙청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라고 현재 생각된다. 1937년 5월 16일에 체포된 필랴르는 4개월도 채 되지 않은 9월 2일에 반역죄로 유죄 선고를 받고 즉시 총살당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스탈린 사후인 1957년에 복권되었다.] 이제 NKVD는 지역당과 공조하는 관계가 아니라 철저하게 지역당을 감시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많은 지역당의 수뇌부가 멘붕을 겪게 된다.[* 이를테면 스베르들롭스크 주의 당 제1서기인 카바코프는 숙청 당시 NKVD가 진행한 심문에서 "지역 NKVD 대표 레셰토프가 교체되고 새로운 대표인 드미트리예프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소. 우리 발 밑의 땅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어서 나는 곧바로 나와 나의 동료들의 일들이 밝혀지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라는 것을 이해했소"라고 털어놓았다.] 동시에 '''스탈린이 교묘하게 진행한 것이 바로 지역당의 제1서기들을 자리바꿈한 것'''이었다. 제1서기는 대충 주지사 정도 되는 위치라고 할 수 있는데, 지역의 최상급 당원이자 전체 관료제 내부에서 중급 정도에 위치하는 이들의 막강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였다. 1936년에서 1937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지역의 많은 제1서기들의 부임지를 싹 셔플링해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의 권력기반이라고 할 수 있었던 측근들을 같이 데리고 이동하는 것을 금지시켜버렸다. 손발이 잘린 상태에서 완전 타지로 옮겨가게 된 이들의 권력기반은 많이 취약해지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대숙청에 기여한 것은 1936년부터 줄곧 이어진 소련의 경제위기였다. 전통주의적 관점에서는 대숙청으로 유능한 관료진이 썰려나가면서 경제가 악화된 것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경제위기가 대숙청을 불러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몇 년 안정되었다가 또 다시 1936년 안 좋았던 날씨로 인한 작황 현황, 가뭄으로 수로가 말라붙으면서 생긴 수송 문제의 악화, 그로 인한 철도 체제의 과부하, 농업생산의 추락, 목재 생산 및 석탄 생산의 위축으로 인한 연료 수급 문제의 악화 및 건설의 둔화, 노동력 공급의 심각한 부족 등등 온갖 문제가 다 겹쳤으며, 설상가상으로 파시스트 국가들인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부상으로 군비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되고 있었던 것. 특히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잔뜩 들여놓은 신기술과 기계들을 운영 인력들의 미숙한 운영으로 다 말아먹는 것도 주효했다. 지역의 경제주체들이 계획된 대로 예산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일단 추가집행 해놓고 더 달라고 하면 주겠지 하는 식의 방만한 예산 운영도 국가의 재정에 매우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런 경제의 종합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타하노프 운동을 비롯한 각종 자구책들이 입안되었고 실행되었으나, 오히려 소련에 존재하던 사회적 긴장을 더욱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영국과의 국교 단절과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에 그 뒤를 이은 좌익 숙청, 그리고 극동 지역에서 행해진 일본군의 꾸준한 도발같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소련이 곧 있으면 [[일본]], [[영국]], [[독일]] 등지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에 돌입할 지도 모른단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런 상황에 몇 년까지만 해도 잘만 돌아가던 경제가 갑자기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분명 외부의 누군가가 소련을 괴롭히려고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소련을 지배했고, 그 생각은 반절이 맞았다. '''그에 대해서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1937년 2월, 17차 당대회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아주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스탈린보다 즈다노프와 몰로토프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당대회였던 것이다. 그간 스탈린의 모호하면서도 치밀한 행보로 이들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가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즈다노프는 주로 당 내 민주주의의 확대, 일반당원과 간부당원의 긴밀한 연결 및 협조, 경제 문제에만 천착하지 말고 정치와 교육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는 말을 주로 했고 몰로토프는 반대파 놈들 족쳐야 한다는 말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스탈린은 여기에 추임새를 넣으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지지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당원 그룹의 리더십 대신에, 평화롭게 살고자 신중하신 당원들로 구성된 가까운 친구들의 자그마한 파벌들을 잘 이해하고 있소. 그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빨래를 말리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칭찬의 노래나 불러댔고, 그리고 이따금 구역질나고 알맹이 없는 '성공'의 보고서나 보내왔소." 이에 대해 대부분의 당원은 당연히 자신들을 저격하는 것이라고 직감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와중에 [[니콜라이 부하린|부하린]]과 리코프가 출당되어 반대파 사냥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당대회가 끝나고 몇 달 뒤까지도 아무나 잡고 반대파라고 하는 일은 많이 없었다. 흔히 생각하는 대숙청의 모습은 지나가던 사람 붙잡고는 NKVD 요원들에게 끌고가선 "'''얘 트로츠키주의자래요. 숙청해 주세요.'''" 인데, 1937년 6월까지도 그런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과 지역당에 대한 장악을 위한 숙청이 '''이때까지는''' 명백히 구분되던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전국적인 대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들의 직속 상관이라고 공개비판으로 까기를 두려워했던 일반 당원들이 자아비판과 비판을 중요시해야한단 것을 보곤 탄력받아서 [[프라우다]]의 즈다노프 사설을 인용하면서 상급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로 폭격을 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폭로가 진실로 이어진 수 많은 간부들이 갈려나갔고, 설상가상으로 제2차 5개년 계획이 신통치 않게 끝날 기미를 보이자 간부당원 사이에서의 연대도 무너지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몇몇 지역당들은 완전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대숙청에서 지역 행정기구의 숙청은 제1차 5개년 계획 때부터 뿌려져 있던 씨앗이었다. 지역 지도자들은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 막대한 중앙 투자를 받기 위한 열정으로 넘쳤을 때 사기친 것들이 걸려나왔던 것이었다. 지역 지도부가 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지역중심적 행정이었으나 스탈린이 그걸 허용할 리가 없었고, 지역 지도자들은 그를 위해서 자신들의 제도적 이점을 활용해 중앙정부를 속여왔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거짓으로 장부를 작성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탄전을 있다고 속이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명령-행정 시스템"이 진화해가면서 모스크바는 계속되는 지역당들의 '성과 저조'와 그에 대비한 '야심찬 계획'에 분노하고 있었다. 지역도 이런 현상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그들은 중앙당의 통제로 받아낼 수 있는 투자를 받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많은 권한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제 많은 권한을 넘겨받으면서, 그리고 권한을 실행할 능력을 갖추면서 모스크바는 더 이상 지역 지도자들의 도움이 필요없어졌다. 이제 중앙 내부에서의 갈등도 사라져서 [[트로츠키]]주의자, [[니콜라이 부하린|부하린]]주의자같은 스탈린의 경쟁자들은 모두 경쟁에 패배하여 소련에 떠나거나 죽어 없어졌다. 이제 그들의 세력을 쳐내기 위해 지역당의 협조를 받을 필요도 없어졌다. 이미 계획을 만드는 것은 완벽히 성숙해진 중앙 정부 부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제서야 모스크바는 지역에 대한 대규모 테러에 가까운 지역당 숙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지역 간 결탁이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어떤 범죄적 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지역 지도자들이 행한 중앙 정책에 대한 저항이나 조작된 보고서를 올려보내는 일들이 문제가 되었다. 위기가 심해질 때 그들은 거짓말을 하면서 희생양들을 찾았고 희생양들을 모스크바에 올려보냄으로써 무마했으나, 성숙해진 모스크바는 더 이상 지역당의 기만이 속일 상대가 아니었다. 수 많은 사건들이 겹치며 이러한 관행으로도 버티지 못 할 임계점에 도달하자 물결이 바뀌고 말았다. 사실 희생양을 찾아서 모스크바에 제물로 헌납하는 전략은 자기파괴적인 전략이었다. 경제와 정치 간의 상호연결성 때문에, 만약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같이 죽어야만 했고, 이러한 것은 죽음의 물결이 예고되었다. 경제 전반에 걸친 위기가 지소되자 긴장과 갈등과 불만이 모두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지역 지도자들은 이 물결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는 하부 단위에서의 상호 비방과 기소의 물결을 촉진시키며 모가지 수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탈린의 계산은 적중했다. 그러나 그들도 예상 못한 건 그간의 희생양 만들기 관행이 빚어낸 화학적 결합이었다. 즈다노프가 만들어낸 이 상황에서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예조프와 몰로토프의 작품이었다. 3월 지역당 회의에서 시작된 거센 비판의 물결을 버티고, 심지어 얼마 안 가 시행된 선거에서도 상당 수의 지역당 산하의 간부들이 그대로 살아남자,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6월 지역당 회의에서 일반 당원들이 트로츠키주의자와 파시스트 첩자라는 레토릭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꾸준히 지역당원들은 보고서에 자신들의 성과 저조를 사보타주, 외국 첩자, 반대파, 인민의 적같은 존재조차 의문스러운 적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모두 망쳐버렸다는 거짓말을 하던 관행이 이 폭발적 비난의 물결과 맞물려 버린 것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동시에 진행되기 시작하였던 군부 대숙청의 불길이 지역당에 옮겨붙기 시작한다. 소련군은 군관구 체제라 군관구 장이 지역당 회의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를테면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 군관구 장인 [[예로님 우보레비치]]는 스몰렌스크가 수도인 자파드나야 주의 당회의에 참여하였다.] 이들이 파시스트 첩자로 몰려서 숙청당하는 동안 '''"니들 이런 첩자를 당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시켰냐?" 라는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기 때문.''' 스탈린은 지역당원들이 줄줄히 잡혀가서 대가를 치르는 것에 대해 쾌재를 부르기도 하였겠지만, 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할 것을 염려하면서 카가노비치와 [[게오르기 말렌코프|말렌코프]]와 같은 그의 심복을 지방 당 대회에 참관시켜 적절한 교통정리를 시행하는 동시에 모든 지역당의 제1서기들을 갈아버렸다. 말렌코프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로 갔고,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로, 베리야는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그루지야]]로, 미코얀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르메니아]]로 갔다.[* 재밌는 건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 출신, 베리야도 그루지야 출신, 미코얀도 아르메니아 출신이다. 강제로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 셈] 그와 동시에 이제 숙청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대숙청의 가장 과격한 형태인 '''예좁시나'''였다. 이때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는 대숙청의 모습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소하고, 10년 전의 생각 없이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냈던 편지와 동료들에게 했던 사소하고 작은 말과 행동들이 낱낱이 밝혀지며 비판받고, 출신 계급이 어디냐에 따른 충성도 체크가 이루어지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공포정치가 막을 올린 것이었다. 소련 사회 구석구석까지 숙청의 칼날이 기어들어왔는데 가장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곳은 지역당의 수뇌부였다. 고참 볼셰비키는 그들의 명망이 높아서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예조프의 당 지도부 타격 계획이 이뤄지던 때에 지도부에 들어가 있어서 걸린 것에 가까웠다. 한편 중앙당의 스탈린 측근들은 이 대혼란을 기회로 조직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지도부는 이 비난의 물결을 아래로 돌려서 자신들의 곤경을 피하려고 하였고, 일반 당원들 사이에서도 공포정치의 확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소련은 당시 국가 내부에 만연해 있던 사회적 긴장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었다. 이것이 예좁시나 때 터져나왔던 것이다. 관료제 내부의 무능이나 도덕적 오류들은 있는 현실 그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 첩자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음모로 치부되었었고 이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적대관계가 폭발하고 표면화되자 서로가 서로를 진지하게 트로츠키주의자나 파시스트 첩자의 음모라고 생각하며 고발해 댔던 것이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1936년 경제위기로 소련의 사회적 긴장과 갈등이 훨씬 극심해진 상황에서 이런 공포의 물결이 지속되자 상급 당원들은 하급 당원들이 자신들을 없애서 소련을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믿었고, 하급 당원은 상급 당원들이 외국 첩자와 결탁하여 국가를 내부에서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다. 결국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소련군이 붕괴에 가깝게 속수무책으로 털려나가자, 모든 사람들은 이 믿음이 결국 현실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독일군 측에서 진행한 NKVD 포로 심문 작업을 통해 밝혀졌다. 당장 스탈린조차 이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고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독일군에게 항복, 전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숙청 기간 동안 저 간첩이 왜 체포되지 않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당무의 상당부분이 줄곧 대혼란이었던 것처럼 이 예좁시나도 계획된 공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조직들이 죄다 당원 관리도 안 되고 지리멸렬한 상태인데 숙청기관인 NKVD만 빠릿빠릿한 기율로 움직이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누구를 숙청해야 하나부터 어디까지 숙청해야 하나, 이 사람 숙청해도 되는 건가에 대해 전반적인 가이드라인이나 합의가 없이 숙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문단에서 상당부분 참고한 '대숙청의 기원'은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기 이전에 쓰여진 80년대 말의 책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금은 관련한 연구의 진척도가 상당히 높을 것이다.] 또한 즈다노프와 예조프의 두 노선이 별개로 진행되다가 37년에 갑자기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대혼란을 촉발하는데, 스탈린이 이 둘의 화학반응을 예측하고 완전 의도적으로 두 노선을 멱살 잡고 하드캐리한 건지, 아니면 스탈린도 예측 못한 상태에서 두 노선이 결합하며 예좁시나가 터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머리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현대인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이든 정황상 스탈린이 이걸 무작정 확대해서 통제하지도 않고 전부 박살내려고 의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건 확실하다.[* 스탈린 본인의 성격이 모든 것을 통제 하에 두고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 사람이었다. 모든 관료제가 예좁시나로 파괴되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6월에 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서 "일반당원님들, 우리 조금만 속도 줄이죠. ㅎㅎ" 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사설이 실리고 은연 중에 스탈린 본인이 과도한 비난 드라이브는 삼가자는 신호를 여러 방면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특히 즈다노프 노선에 따른 소비에트에 대한 비밀선거 및 자유로운 입후보는 1937년의 하반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후퇴하였다. 모스크바 중앙당이 농촌지역에서의 반대표를 감당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에 더하여, 스탈린의 예조프에 대한 태도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 변화하게 된다. 대숙청을 지휘하면서 NKVD가 너무 많은 힘을 쌓았기 때문이다. 예조프와 NKVD에 대한 온갖 찬양이 언론을 뒤덮었고, [[레닌훈장]]이 NKVD 인사들에게 뿌리듯 수여되었으며 심지어 예조프의 이름을 딴 도시마저 생겼다. 마침내 10월, 예조프는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예조프의 승승장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누가 피에 굶주린 미친 개를 좋게 보겠는가?[* 아마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에서 최초로 목이 날아간 사람이 [[라브렌티 베리야]]인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일 것이다. "야, 그래도 우리들끼리는 같이 스탈린 밑에서 개고생했으니 죽이지는 않겠는데, 쟤는 안 될 것 같지 않냐?"하는 심리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흐루쇼프의 승리 이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말렌코프는 한직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나름 천수를 누렸는데, 베리야는 짤없이 죽었다.] 위에서는 이런 스탈린의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것을 볼쇼이 극장에서 치러진 NKVD 20주년 행사라고 서술했으나, 이는 사실과 맞지 않다. 그 전에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치국 고위 위원들이 그 해 12월 선거에서 최고 소비에트에 진출하게 된 것에 대한 취임연설이었다. 13명의 국원들이 연설을 했는데, 이 중 7명의 국원들은 NKVD의 뛰어난 업적에 대해 한 번 언급이라도 해준 반면, '''스탈린, 몰로토프, 즈다노프, 칼리닌, 보로실로프, 미코얀'''은 예조프와 그의 부하들에 대한 공치사를 한 마디도 던지지 않았다. 예조프에게는 매우 불길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더 불길한 징조가 하나 더 있었다. 그의 연설 중 일부가 검열당해 출판되었던 것이다. NKVD 20주년 행사는 그 얼마 뒤에 있던 일이었고, 이때 스탈린은 그의 치밀한 정치술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일단 행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NKVD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아나스타스 미코얀]]으로 박아놓은 것이 1타였고, 더 중요한 2타는 참석을 안 해버린 것이었다. 사실 행사 다 끝나고 음악 콘서트 때에 참석을 하기는 했다. 프라우다는 스탈린이 음악 들으러 왔다는 식으로 의미심장하게 이를 보도했는데, 프라우다의 편집을 감독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모를 리가 없던 예조프는 점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촉박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스탈린이 그 이전에 집단농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축하하는 자리, 최고 소비에트 투표장 등의 행사에도 참석한 걸 생각하면, NKVD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중간에 음악 들으러 왔다고 둘러댄 이 행보는 예조프를 버릴 것이란 경고이고, 후에 있을 토사구팽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도 예조프의 팔을 잘라놓는 행보는 계속되었다. 그의 부관들은 임업인민위원회나 우편통신인민위원회 등으로 전출되었고, 그의 부하들을 따라 그도 몰락하게 된다. 예조프는 이런 움직임에 위기를 느끼면서 자신을 방어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하게 된다. 특히 예조프식 숙청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즈다노프를 비롯한 당 내 스탈린의 측근들이 공개적으로 당원에 대한 과도한 숙청을 비판하자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들이 이끄는 기관들도 과도한 숙청으로 조직력에 타격을 심대하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예조프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숙청을 더욱 심하게 진행하는 자충수를 두었으나, 내부 단속에 실패하였다. NKVD 극동 지부에서 예조프가 일본 파시스트들과 연계 되어 있다는 증언이 나와버린 것. 예조프는 더욱 초조해져서 최고 소비에트에서 '''"모스크바를 스탈리노다르라고 바꿔야 한다!"''' 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 그냥 한 큐에 거부해 버렸으며 예조프는 자신이 스탈린으로부터 얼마가지 않아 버려질 것이란 것을 체감하게 된다. 특히 결정타는 몰로토프와의 갈등이었다. 위에서 몰로토프-오르조니키제 갈등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숙청 막바지에도 여전히 소브나르콤 의장이었던 몰로토프는 산하 기관의 장이었던 예조프에 대해 또 질책을 가했다. 정보기관이 왜 장관회의 의장 밑인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사실 NKVD의 정식 명칭은 '내무인민위원회'였다. NKVD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식 정부부처였고 예조프는 장관급이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NKVD 또한 각 인민위원회들을 통제하고 조율하는 인민위원회 회의(소브나르콤)의 산하기관이었고 일단은 예조프도 오르조니키제도 서열상으로는 몰로토프의 아래였다. 여하튼 그걸 듣고 예조프는 그동안 느껴왔던 위기의식이 폭발해서 폭탄 발언을 던졌다. >"내가 당신 자리에 있다면 말입니다,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나는 유능한 기관에 그런 종류의 질문은 하지도 않을 겁니다. 소브나르콤의 전 의장[* 인민위원 회의. 즉 훗날의 장관회의에 해당하는 내각이다. 따라서 그 의장은 수상이다.]이었던 알렉세이 리코프도, 내 집무실을 거쳐 갔다는 걸 잊지 마시지요. 그리로 향하는 길은, 심지어 당신일지라도 닫혀 있지는 않습니다."[* 리코프는 부하린파의 일원으로 예조프가 그의 숙청을 담당했다.] 몰로토프는 이 어이없는 협박을 듣고 '저 새끼가 돌았나.' 라고 생각해 이를 스탈린에게 보고한다. 어쨌든 몰로토프는 소브나르콤 의장으로 인민위원에 불과한 예조프의 직속상관이었고, 당내 직위도 정치국 위원으로 후보위원인 예조프보다 높았다. 거기에 이 시점에서는 스탈린의 둘도 없는 최측근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몰로토프는 1922년, 카잔의 집행위원이었던 예조프를 마리주의 책임비서로 승진시킬 것을 중앙위원회에 건의하여 그의 출세길을 열어준 은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조프의 당시 정신 상태는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한 상태였다. 정말로 온 나라안에 간첩이 가득하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고, 스탈린의 줄어드는 총애 속에서 안달복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몰로토프가 자꾸 시비를 걸자 앞뒤 안가리고 이빨을 드러낸 것이었다. 예조프 입장에선 자기 옆 자리의 요원 목을 폴란드나 독일 첩자라면서 바쳐야했던 상황이었으니 결국 그런 공포가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이 전술된 몰로토프에 대한 공격이었다. 어찌되던 자신의 출세길을 열어줬던 상관에게 "너도 나한테 깝치면 숙청시켜 버린다!" 라는 엄포를 질러놓은 것을 묵과할 정도로 스탈린이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닌게 아니라 레닌이 세운 민주집중제의 원칙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절대복종하는 철저한 규율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조프식 막나가는 패악질은 공산당 기율 체계에서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패악이었고 이러한 행태는 스탈린 시대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선군시대 북한에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막장 행각이었다.] 몰로토프의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예조프를 불러서 몰로토프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명령했다. 예조프는 묵묵히 사과하였고 다른 데서 계속 숙청을 진행하였으나 이제 스탈린의 강철 빗자루를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예조프의 기세는 한 풀 꺾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다 1938년 1월, 예조프는 NKVD 자리를 유지하는 한편 [[한직|수로운송인민위원회]]라는 [[좌천|아주 중요한 직책(...)을 겸임]]하게 된다. 그리고 일반 당원들에 의한 무자비한 [[너 고소]]를 억제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잠재적 반대파들을 살려두는 안일한 일은 하지 않았다. 곧이어 [[니콜라이 부하린]]의 재판이 뒤따랐고, 1937년 2월에 그가 "한쪽 극단에서 벗어나서 다른쪽 극단으로 벗어나는 일을 여러분들은 해선 안 된다"라고 말했듯이, NKVD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약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NKVD의 중심인 예조프만큼은 철저히 찍어눌렀다. 1939년 1월 이후, 그의 이름은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언급되는 일이 없었다. 예조프의 심복들도 제거되었고 그들은 베리야의 심복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1939년 3월, 18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이 모든 이야기를 그의 정치적 의도하에 정리하는 연설을 한다. 제1차 5개년 계획 이래로 너무나 많은 당원들이 들어와 조직이 혼란스러워졌으며, 그들이 관리가 안 된 상태였고, 그 이후에 일어난 키로프 암살 사건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1935년의 당 문서 확인 작업, 1936년의 당 문서 교체 작업의 지연, 그리고 예좁시나까지 포괄하는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그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 지금 우리의 당에서, 당원의 수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더 좋습니다.''' 이것은 큰 성취입니다. '당원 교육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숙청으로 해결하려 한다.' 는 이유로 애초부터 예조프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았던 즈다노프는 너무나 많은 불필요한 희생이 있었다며 탄식하나, 스탈린은 당대회에서 즈다노프에게 "분명 무고한 희생이 우리 예상보다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 작업은 어차피 했어야 하는 일이고 결과적으로는 유익했다." 는 식으로 그를 다독였다. 마침내 소련 전 지역에 대해 강철같은 규율을 부과하려던 스탈린의 시도는 소련 모스크바의 중앙당이 막지 못 할,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었던 대혼란으로 종결되었던 것이다. 결국 수정주의적 시각에서의 대숙청은 (적어도 '대숙청의 기원'을 쓴 존 게티의 입장에서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거치면서 영향력이 확대된 지역당을 제압하고 중앙당의 관료제적 상하관계에 입각한 통제를 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소련 공산당이 스탈린 개인의 휘하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그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조직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규율 같은 것도 없는 개판의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앙-지역의 갈등 뿐만 아니라 중앙당 내부에서의 몇몇 명망가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사태를 혼란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즉, 당 내부의 불협화음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숙청을 집행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불협화음이 존재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증거들은 모두 스탈린 시대마저도 일사불란한 규율로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수정주의 측에서는 키로프 암살부터 예좁시나와 예조프의 숙청으로 이어지는 스탈린의 엄청나게 기나긴 계획이 과연 있었는가, 그리고 그 본질적인 목표가 과연 스탈린의 정치-사상적 반대파들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또한 아래의 문단에서 언급되는,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으로 대숙청이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의문도 던진다. 물론 대숙청은 스탈린 개인의 권력을 인류 역사에 그 전례가 없을 정도로 드높여주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을까? 흔히 대숙청하면 언급되는 키로프 암살과 이어지는 카메네프-지노비예프에 대한 재판은 아주 자극적이고, 과거의 혁명동지들을 암살 혹은 처형하여 스탈린 본인의 절대 권력을 수립한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으로 시야를 넓히면, 관료제 기율의 전국적 확립과 중앙당과 지역당의 위계설정이 스탈린에게는 더 중요한 이야기였음을 알 수 있다. 베버가 말한 "폭력의 독점체"로서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스탈린의 시도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숙청은 소련 사회의 거대한 정치적, 제도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 있는 문제로, 단순히 권력에 미친 독재자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숙청에 대한 스탈린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를 테면 단순히 젊은 세대들이 윗 세대를 쳐내고자 한 운동에 스탈린이 편승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그렇다. 몰로토프, 즈다노프, 예조프같은 공산당 내부에서 결코 작지 않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스탈린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수준이라고 평해지던 신흥 관료들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끝내는 팽해버리는 모든 과정을 지휘한 자가 스탈린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보자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 [[효도 카즈타카|마왕]]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 사실 대숙청의 키 플레이어이자 당내 급진파의 양대 노선의 대표라고 할만한 즈다노프와 예조프, 모두 스탈린과 목표를 공유하는 측면은 분명 있었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뒤를 돌아봤을 때 철저하게 스탈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다가 결국 스탈린에게 정치적 위협이 될 수준이라 평가받을 시기에 대책 없이 폭주하여, 국가적 공포의 '책임'을 물은 스탈린의 손에 '처단'당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예조프는 말할 필요도 없이 토사구팽 당한 것으로 이를 보여주었고, 즈다노프는 살아남긴 했으며 예조프의 노선에 줄곧 반대했으나, 결국 예조프의 사업에 엄청난 버프를 걸어준 셈이 되었다. 키로프 암살 이후 즈다노프와 함께 당원 정치교육 사업을 같이 맡아서 그를 핵심 지도부에 끌어온 자도 스탈린이었고, 1937년 2월에 다분히 지역당 지도부의 부패와 유착 관계들을 공격하는 연설로 이 혼란을 촉발시킨 자도 스탈린이었으며, 야고다를 경질하고 예조프를 올린 자도 스탈린이었고, 끝내 예조프를 죽이는 것을 결정한 자도 결국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한된 자료로 인하여 스탈린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였는가를 파악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대숙청의 책임을 스탈린 개인의 비인간성과 권력 욕구, 소련 체제와 공산주의 사상의 특수성 등에서 찾는 전통주의적 입장과는 달리 수정주의적 입장은 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나치 독일]]이 그러했듯 일상화된 국가 폭력, 전국가적 공포로 상징되는 세기에 남을 비극은 단순 통치자 혹은 지배자 개인의 비인간성, 당시 공산주의 체제의 특수성 등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 정부와 중앙 정부, 상급 관료와 하급 관료같은 수 많은 인물들을 걸쳐 복잡하게 얽힌 이해 관계, 습관화된 부패,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야심을 가진 지도자, 위기가 임박했다는 국가의 공포같은 여러 조건이 겹치면 어떤 형식으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전 소련에서 행해진 대규모의 국가 폭력을 옹호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는 있으나, 대숙청의 수정주의적 시각이 귀결하는 결론은 결국 대숙청 같은 규모의 국가 폭력은 단순 스탈린과 소련 사회주의 체제에서만이 아닌, 어느 시기, 어느 국가, 어느 체제에서든 발생할 수 있단 것이다. 여담으로,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르게 스탈린은 결코 자기보다 지위가 높고 나이도 많았던 멘셰비키-볼셰비키 분당 이전(1912년 이전)의 최고위급, 최고참 혁명가들은 '대숙청 때는' 건드리지 않았다. 대숙청이 오기 한참 전에 사망해버린 보그다노프와 플레하노프 등을 제외하더라도, [[막심 고리키]], 마르틴 리아도프 등은 스탈린이 죽인게 아니며, 스탈린 정권때 죽은 최고참 볼셰비키인 솔로몬 로좁스키는 독소전쟁이 끝난 뒤 유대반파시즘위원회 누명 사건 때 숙청당해 사망하였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옐레나 스타소바, 로잘리야 제믈랴치카[* 부수상까지 올랐다.]같은 여성 혁명가들도 살아남았으며 심지어는 사회혁명당 좌파의 대표로 무장봉기까지 일으켰던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도 '대숙청 때' 죽은 것은 아니다.[* 혁명가로써의 입지가 워낙에 거대했기에 수감만 시켰지만, 독소전쟁 발발 후 죄수들을 이송할 수 없었던 NKVD가 스탈린의 승인 하에 결국 사형을 집행하였다.] 소련 대백과사전을 제작한 글렙 흐르지자놉스키[* 흐르지자놉스키는 레닌과 같은 세대의 최원로, 최고참 혁명가 중 한명이었다. 흐르지자놉스키, 마르토프, 레닌 등이 1895년 만든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은 러시아 두번째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이었다.], 보건상을 역임한 미하일 블라디미르스키도 살아남았다. 결국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을 죽였다'에도 반증이 존재하는 셈이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중장까지 오르고 후일 소련 공군 소장을 한 알렉산드르 사모일로 장군은 1944년까진 공산당원도 아니었는데도 건드리지도 않았다. 애초에 스탈린은 10월 혁명이 일어난 직후 트로츠키와 함께 유일하게 레닌을 독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봉기를 반대하다 레닌의 눈 밖에 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나 보그다노프의 이론을 따라가던 부하린 등은 인기와 명성은 있었을지 몰라도 당내 지지도에서 정말로 스탈린을 앞섰을지에 대한 여부는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정말로 스탈린이 보잘것없었다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을 몰아내기 위해 '연합'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스탈린이 그 둘을 손쉽게 쳐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코민테른 서기장을 하는 부하린을 스탈린 개인의 힘으로 쳐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말로 스탈린에게 위협이 되는 경쟁자는 1917년부터 1940년까지 트로츠키였고, 결국 스탈린이 승리하였다. 이러한 스탈린의 권력과 그 안정성이 턱없이 저평가되고 이를 넘어 대숙청의 원인이라 잘못 평가되는 이유는 서방 학자들과 대면할 수 있는 인적 요인의 불균형 때문이었다. 대숙청 이전, 혹은 대숙청 과정 중 소련에서 미국, 영국 등지로 망명한 공산당원들과 소련 공산주의자들은 당연하게도 숙청당하거나 도망친 부하린, 트로츠키 등의 유명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지지자들이었고, 이러한 이들이 스탈린의 권력 우세와 안정성을 객관적으로 마주할 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의 대숙청은 그들의 시각에 의해 왜곡되어 복잡한 인과관계가 묻혀버린 채, 피에 굶주린 지도자의 잔혹한 권력약탈과 폭압으로만 각인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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