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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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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 "그는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졸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팔꿈치까지 피를 묻히며 충성할 정도로. 그럼에도 그는 [[스탈린주의]], 소련 시스템, 그리고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럼에도 그는 [[굴라크|강제수용소]] 문을 열어 수백만 명을 풀어주었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출판을 허가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을 쌓아올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했지만]] 소련의 재래식 병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했으며, 미국과의 화해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었다. 그는 잔인하고, 독선적이었으며, 무자비하였지만, 너그러웠고 대중적이었으며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 >뉴욕 타임스에 실린 [[레몽 아롱]]의 평가. > 스탈린주의자인 동시에 반(反) 스탈린주의자였고,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냉소주의자이었고, 자화자찬하는 떠벌이인 동시에 신경질적인 박애주의자였고, 트러블메이커인 동시에 피스메이커였고, 믿음직한 동료인 동시에 압제적인 꼰대였고, 대정치인인 동시에 무식한 정치꾼이었다. >---- > 로버트 서비스, 영국의 역사학자 흐루쇼프가 남긴 말들 중 "내가 한 일들 중 의미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사형당하지 않고 그저 유배되게 소련을 변화시킨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탈(脫) 스탈린화 정책을 펼쳤고, 재임 기간 내내 수많은 유머러스하거나 탈 권위적인 일화를 다수 남김으로써 소련을 말 한번 잘못했거나 태업했다[* 태업(怠業): [[노동쟁의]] 행위의 하나. 겉으로는 일을 하지만 의도적으로 일을 게을리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손해를 주는 방법이다. 물론 저건 사전 상의 정의로,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숙청의 칼을 꺼내들기 이전 개막장스러운 인간들이 지방 공산당원입네 설치며 무단 태업과 결근을 일삼던 역사적 사례로 인해 소련에서 태업죄는 단순히 "너 해고" 정도로 끝나는 죄가 아니었다. 스탈린 시절 '''"할당량만큼 사람을 잡아들일 수가 없어 전진긍긍하던 지역 엔카베데가 아침 시간 출근하던 통근 버스를 붙잡아 시간을 끈 뒤 출근 시간이 지나자 태업을 기도했다며 승객들을 모조리 잡아다 굴라크에 던져버리는"''' 웃을 수 없는 촌극도 왕왕 일어나서 문제지. 이 "할당량" 문제가 원체 심각했던지라 엔카베데와 경찰은 굴라크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체포를 남발했는데, [[수용소 군도]]를 보면 굴라크에 끌려간 이웃집의 갓난아기를 어떻게 하냐며 동네 주부가 경찰서에 찾아오자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 주부와 아기까지 전부 잡아들여 굴라크로 끌고간 사례, 집시 한 무리가 나타나 주인 없는 벌판에 텐트를 치자 지역 경찰서장이 기회다 싶어 모조리 체포해버린 막장 사례들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하면 [[굴라크]]로 끌려가거나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고생을 해야 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사회 분위기를 지닌 나라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닌 국가로 변화시켰다. 또한 스탈린 시절 누명을 쓰고 처벌받은 사람들을 석방하거나 복권시켰다. 본인도 물론 독재자라는 평가지만, 적어도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로 분류하던 서방 학계의 정의에 혼란을 줄 정도로 사회 억압을 풀고 광신적인 지도자 숭배를 완화했으며 피의 숙청이 난무하던 정치 문화를 온건화했고 모든 잉여생산물을 철저히 수탈해 공업화에만 쏟아붓던 스탈린 식 경제 정책을 완화, 민생 경제를 향상시킨 업적을 이뤘다. 결국 스탈린은 군사력과 경제개발계획에만 집중하여 국가적인 국력 증대에만 몰두한 반면에 흐루쇼프는 경제성장을 통한 민생에 더 신경쓴 것이다. 흐루쇼프가 시행했던 정책 중 상당수는 브레즈네프 시기에도 폐지되지 않고 시행되었고, 스탈린 시대에는 소련이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인민들이 여전히 궁핍한 삶을 면치 못했는데 나름대로의 자유를 주면서도 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며, 이런 점에 있어 흐루쇼프가 소련에 남긴 유산은 크다. 피가 피를 부르던 소련 정치를 순화한 인물이기도 했다. 스탈린 시절만 해도 권력 투쟁에서 패한 경우는 대부분 처형되었는데, 흐루쇼프는 [[라브렌티 베리야]]를 제외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베리야는 살인과 고문, 강간을 밥 먹듯 즐기고 스탈린을 제외한 모든 인원들과 척을 맺는 등 성격이고 인간 관계고 할 것 없이 개차반 중의 개차반이었던지라 '''자신이 수장이었던 NVKD 빼고는 전부 베리야를 죽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스탈린 사망 이후 흐루쇼프, 몰로토프, 주코프, 코네프 등 정치국원 및 고위 정치원들은 전원 베리야의 모가지를 따버려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였고, 결국 베리야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저 인원들 중에서는 주코프와 코네프 등 서로 원수지간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조차 베리야의 숙청에는 서로 협력할 지경이었다.] 다른 정적들(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을 당에서 추방만 했을 뿐, 처형이나 감금 같은 물리적인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정적들은 비록 권력을 잃고 야인이 되었으나, 모스크바에서 고액을 받는 연금생활자로 지내거나 혹은 지방의 한적한 기관으로 좌천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방침은 후임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고, 흐루쇼프 자신도 그 길을 따라 야인이 된 후에도 고액 연금수령자로서 수혜를 입었다. 재밌는 건, 흐루쇼프가 숙청하면서 죽이지 않고 좌천시킨 정적들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만 빼면 전원 흐루쇼프보다 오래 살았다. 살벌한 권모술수가 난무했던 중앙정치에서 벗어나 현실에 체념하고 유유자적 살아서인지 스트레스를 덜 받은 듯하다. 정작 흐루쇼프도 만 77세에 죽었으니 단명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1964년 실각하고 7년 뒤에야 죽었으니 그의 정적들과 똑같은 말년을 보낸 셈이다.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판해서 스탈린 체제의 억압성을 수정하려 한 것이 높게 평가받는데, 이것이 그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켜 실각하게 되는 단초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부분. 흐루쇼프의 시기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나중에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의 주축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 현대의 러시아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편으로, 긍정과 부정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평가가 접전을 이룬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주었다는 점 때문에 역적이라 비난하고 아들인 세르게이 흐루쇼프를 낙하산으로 공업 관리직에 앉히며 혈연주의와 [[노멘클라투라]]의 출현을 가속화했다는 비판과 정교회에 유화정책을 펼친 스탈린이나 브레즈네프에 비해 러시아 정교회를 탄압한 것을 안좋게 본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 정책을 폈다가 결국 소련해체와 경제파국으로 이어져서 러시아 현지에서의 평가가 매우 나쁘지만, 흐루쇼프는 농업정책만 빼면 경제정책을 잘 펼쳐 빈곤이 퇴치되어 생활수준이 크게 올랐고, 스탈린 시절의 억압적인 정책을 폐기하면서도 우주진출 등 소련의 위상을 올리는 업적을 남긴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리버럴한 러시아인들은 그가 스탈린주의적 통치를 끝장낸 공을 인정하는 편. 처음엔 [[중국]]의 [[마오쩌둥]]도 그의 1957년 자유화 정책을 좋게 보아서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을 펼친다. 이것은 흐루쇼프의 자유화를 모방하여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이 마오쩌둥까지 비판하는 데 이르자 마오쩌둥은 이를 바로 취소하고 반우파투쟁을 벌여 자신에 대한 비판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인 탓에 [[중국공산당]]에서의 평가가 나쁘며 이런 탓에 '''중소결렬'''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집권한 후에도 유지되었는데, 덩샤오핑은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은 중국에 나쁜 짓도 많이 했지만 좋은 일도 많이 했으니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그를 비판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여전히 스탈린을 옹호했으나 흐루쇼프에 대해서는 욕만 퍼부었다. 이에 흐루쇼프를 탈스탈린화를 추진한 영웅으로 생각하는 팔라치가 언쟁을 벌였으나 서로 좋을대로 생각하자고 마무리되었다. [[북한]]은 현재까지도 흐루쇼프에 대해 수정주의자로서 혁명을 후퇴시키고 미제국주의와 평화공존을 추구한 인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즉,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포함한 수정주의 노선은 사회주의 배신자들의 노선이었고,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변질시켰으며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분리주의]])는 철저히 탄압했지만, 우크라이나에 정치적 기반이 있었던 만큼,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소련 연방정부에 강하게 주장해 관철시켰고 , 우크라이나 지역인사들을 소련 고위직에 대거 끌어들여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우크라이나 사단이 소련 고위직을 점유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강하다.[* 당장 후임자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생전 육성을 들어보면 러시아어에 우크라이나 억양이 상당히 강하고 우크라이나어 육성을 남기기도 했다.] 심지어 소련시절을 흑역사로 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조차도 대개는 흐루쇼프에 비판적이지만 우크라이나 최초의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초대 총리인 볼로디미르 빈니첸코를 존경했다면서 흐루쇼프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조금은 우호적인 시각도 더러 있다. 다만 그가 크림반도를 내주어 러시아가 폭주하는 결과를 낳았고 러우전쟁의 원흉이 되어 나비효과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는 시선도 있다. 서방권에서는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문제를 제공했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가 매우 나쁘지만, 서방과 지속적으로 교류와 대화를 시도했고, 전임자인 스탈린에 비하면 비교적 온건했기 때문에 비교적 스탈린보다는 좋은 쪽으로 평가된다. 특히 브레즈네프 시절에 "흐루쇼프 해빙"이 모두 되돌려졌다는 냉전적인 견해가 있었고, 고르바초프 시절에도 서방권에는 이런 견해가 널리 펴져 있어서 브레즈네프를 소련 붕괴의 원인을 만든 암군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흐루쇼프 시절의 여러 자유화 조치가 브레즈네프 시절에도 상당수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로버트 서비스 같은 서방의 보수적인 역사학자들도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의 여러 조치들을 과거로 되돌리기는 했지만, 흐루쇼프를 본받아 스탈린식의 공포정치나 국가 폭력은 자제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를 축출하고, 기록말살형 수준으로 그의 업적을 무시했지만, 흐루쇼프가 추구한 자유화를 좋게 평가했다고 볼 수 있다. 그와 별개로 과거 동구권 영향권이였다가 현재 서방권으로 편입된 헝가리, 폴란드에서는 [[1956년 포즈난 시위]], [[1956년 헝가리 혁명]]을 탄압한 전적 때문에 아예 원수로 취급한다.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 등 당시 [[쿠바]] 지도부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에 꼬리 내린 것에 반발했다. 이는 미국이 쿠바를 군사적으로 계속 위협하는데도 소련이 쿠바의 안보를 보장한 당초의 약속을 어겼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흐루쇼프 집권 기간 동안 어느 정도 소련-쿠바 관계는 냉각되었고, 게바라는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소련 지도부를 맹비난했다. 실제로 미국 [[CIA]]는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암살시도를 계속 했고 본인들이야 어쨌든간에 미국의 위협을 계속 받았기 때문에 소련이 자신들을 내팽개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게바라는 당시 CIA의 사주를 받은 [[볼리비아군]]에 잡혀 처형되었고, 카스트로도 여러 번의 암살시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나중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흐루쇼프 회고록이 진품으로 밝혀진 후, 소련 시절에 유출되지 않은 더 신랄한 원고가 출간되었는데, 그중에 카스트로가 핵전쟁 그까짓거 저질러버리자고 미친 요구를 소련에 해댄 것이 적나라하게 다 밝혀졌기 때문에 엄청나게 당황한 카스트로는 흐루쇼프가 자신을 음해한 것이라면서 기관지 그란마에 기밀문서를 일부 공개하는 강수까지 두면서 자신은 핵전쟁을 일으키려 한 적이 없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당시 핵전쟁 무서운 줄 몰랐던 카스트로가 소련 측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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