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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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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 * 역사적으로 주요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엘리트나 중산층 출신이 많았던 반면 흐루쇼프는 진짜 프롤레타리아 출신 혁명가로서 공산주의 국가의 대명사였던 소련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드문 사례다. 저우언라이와 말싸움할 때 일화를 보면 흐루쇼프 본인은 이 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 은둔생활 후 회고록 작성에 착수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회고록을 위한 구술녹음자료[* 생애의 젊은 시절 항목에서 이미 설명됐지만 흐루쇼프는 사실상 반문맹 상태였다. 글을 읽을 순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글을 쓰진 못했으며 기껏해야 자신의 이름을 적는 수준에 그쳤다.]를 만들었는데 모종의 사정으로 복사본이 유출돼서 서방에 흘러들어가게 된다. [[KGB]]에서는 녹취자료를 관리 중인 흐루쇼프의 아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그 원본을 입수, 보관하게 되고 이 원본은 소련 붕괴 전후에 공개된다. 서방에서 유출된 회고록이 출판되자 소련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그것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작품임을 언명하고 흐루쇼프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회고록의 내용을 부정한다. 사실 이 라디오 방송 출연은 실각 후 그가 유일하게 공식 석상에 나온 때다. 당연히 회고록이 조작이라는 것 자체가 강요된 거짓말이다. 하지만 CIA가 여러모로 개입한 것은 맞으며, 특히, 번역과정에서 의도적인 오역으로 소련 체제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한 사실도 있다. 여하튼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던 서방에서는 흐루쇼프 회고록의 진위 여부를 두고 대단한 논란이 벌어졌으며 1971년에 한국에 번역된 흐루쇼프 회고록[* 당시 제목은 흐루시초프 비록]은 역자 서문에서 이 부분을 짚고 시작하고 있다. 흐루쇼프 회고록은 격동의 소련 현대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그가 겪은 스탈린 시대의 불합리성 및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내용이었으며,[* 물론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이 관여한 여러 범죄나 사건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의 사건에서 소련이 보인 반응에 대한 훌륭한 연구 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주목할 것은 당시에도 논쟁 중이던 [[6.25 전쟁|한국 전쟁]]의 기원에 대해서 [[김일성]]이 스탈린을 방문해서 남침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확답을 받았다는 증언인데, 종래의 내전설, 남침 유도설, 소련 명령설[* 냉전 시기에는 [[김일성]]은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지만 스탈린이 강력하게 명령을 내려서 남침했다는 설이 유행하기도 했다.]을 완전히 부정하는 자료였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400><nopad> [[파일:1959_07_Nixon_and_khrushchev.jpg|width=100%]] || || 1959년 7월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제1서기]] || * [[옥수수]]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흐루쇼프 본인이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처녀지 개간 운동]] 때문에 그렇다. 주 개간 후 재배 작물이 옥수수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흐루쇼프라고 검색만 해봐도 옥수수가 가장 먼저 연관 검색어로 떠오르며, 옥수수를 끌어안으며 [[함박웃음]]을 짓고있는 흐루쇼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건 [[:파일:흐루쇼프 옥수수.webp|이 사진]]. ] 본인이 공산진영 지도자답지 않게 [[팝콘]]도 즐겨 먹는 등 옥수수를 좋아했으며 [[1959년]] 방미 시에 본 [[아이오와]] 주의 옥수수 대농장에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흐루쇼프 시절에 그렇게 보급을 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영역에서 몰도바 빼고는 옥수수는 보급되지 못했다.[* 여담으로 소련이 해체된지 20년 정도 지난 2011년에 우크라이나 흑토 지역에서 옥수수 생산량이 급증했지만 흐루쇼프가 세운 계획은 “밀을 심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 적은 양의 물을 투입하여 옥수수를 생산한다”였으므로 원래 비옥한 우크라이나에서 옥수수 생산 늘어난 거 가지고 농담으로나마 흐루쇼프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들다.] 2020년대 기준으로는 전 세계 옥수수 수출의 19%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존에 심던 밀이나 해바라기씨만큼은 아니다. 옥수수는 어차피 국제 시장에서는 브라질산 혹은 미국산 옥수수가 원체 저렴한 가격에 유통되기 때문에 심어도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동유럽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 입장에서는 옥수수보다는 밀이나 해바라기, 메밀, 목화 등을 재배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 우크라이나가 세계 옥수수 생산량의 3.22%, 러시아는 그보다도 적을 정도로 다른 작물에 비해서 생산비율이 적다. * "소련에서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흐루쇼프는 바보다!'를 외치다가 체포돼서 징역 2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서기장 모독죄로 3년에, '''국가 기밀 누설죄로 20년'''을 더한 것이라더라"는 농담이 한때 미국에서 돌았는데, 이 농담을 만든 사람이 ''''흐루쇼프' 본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상당히 유명한 공산주의 블랙 유머로, 브레즈네프부터 옐친까지 상당히 많은 바리에이션이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전두환 시리즈]]로 번안되어 알려지기도 했다. 단순 유머로도 볼 수 있지만, 소련 사회의 개방을 상당히 진척시킨 흐루쇼프의 업적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스탈린 시절에 저런 유머를 입 밖으로 내거나 편지에 적어 보냈다면 본인은 물론이요 왕조 시절마냥 3족이 전부 굴라크로 끌려가거나 몰래 총살당했을 것이다. 자기 발을 밟은 공산당원에게 욕설을 했다고 내란죄로 루비얀카에 끌려가고, 스탈린의 업적을 찬양하는 의미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는데 (10분이 넘는 눈치싸움 끝에) 가장 먼저 박수를 멈추고 자리에 앉은 자가 그날 밤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굴라크에 끌려가던 게 스탈린 시절의 일상적인 사회 풍경이었다. * 흐루쇼프와 관련되어 돌던 농담이 있다. 흐루쇼프가 협동농장을 찾았다. 농장에 들어가자 [[돼지]]들이 "흐루..흐루.."거리며 울고 있었다. 이를 본 흐루쇼프가 말했다. '''"돼지들이 발음을 똑바로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잘 시키시오"''' 한국어의 "꿀꿀"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의성어가 "흐루"(хру)인데, 이를 본인의 이름(Хрущёв)와 섞은 농담이다. * [[익스플로러(인공위성)|익스플로러 1호]]를 보고 고작 5kg라는걸 알고 '''[[우주 경쟁|작은 오렌지만 하군!]]'''하고 놀렸다. 참고로 저 말은 미국을 놀려먹는 의도였다. * [[펩시]]를 세계 굴지의 음료회사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1959년 모스크바 엑스포 당시 미국에서 펩시 담당자도 소련으로 왔는데 펩시 담당자가 느닷없이 흐루쇼프에게 콜라를 권하자 흐루쇼프는 기꺼이 받아마셨고, 닉슨과 같이 건배도 했다. 그리고 흐루쇼프가 기꺼이 콜라를 받아마신 사진이 세계 각 언론을 통해 전파되면서 펩시의 판매량은 급속하게 늘어나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고, 브레즈네프 시기에 펩시가 소련에 진출하면서 1986년에 [[코카콜라]]가 소련에 진출하기 이전까지 소련의 콜라시장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 *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대통령]]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휘하에서 [[미국 부통령|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1959년 유명한 이른바 '주방 논쟁'(kitchen debate)을 벌이기도 했다.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라는 발언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 "[[정치인]]들이란 다 똑같다. 개울도 없는데 [[교량|다리]]를 놔주겠다고 공약을 하니 말이다."라는 뼈아픈 일침을 남기기도 했다. * 1960년대 흐루쇼프를 취재하던 이집트 기자 무함마드 하이칼[* 훗날 내무부 장관,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이 [[시가(담배)|시가]]를 피우자 흐루쇼프는 시가를 빼앗아 재떨이에 문질러 꺼버렸다. 이에 기자가 의문을 표하자 흐루쇼프는 "이건 [[자본주의]]의 상징이오. 당신은 나세르의 친구이니 시가를 피울 수 없소"라고 강하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 [[쿠바]] 혁명이 일어난 후 하이칼이 다시 흐루쇼프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엔 흐루쇼프가 웃으면서 하이칼에게 시가 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하이칼이 놀라서 "놀랍습니다, 각하. 지난번 저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라고 하자 흐루쇼프가 "물론이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카스트로 동지]]가 혁명을 이룩한 이후로 이 시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시가가 되었다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큐브릭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졸지에 3차 대전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해결해 보고자 긴급히 소련 대사를 펜타곤 전시상황실에 소환하는데, 이때 대사가 하바나산 시가를 좀 가져다 달라고 하자 옆에 있던 미해군 제독이 "자메이카산 시가도 꽤 괜찮은데 한 번 피워 보시겠소?"라고 묻자 대사 왈,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제국주의자들 돗대는 영 내키지 않아서 말이지."라고 하자 제독이 "오. 빨갱이들 꽁초만 피우시겠다?"라고 하며 서로 맞디스를 하는 장면이 있다.] * 서적 "냉전의 역사"에 따르면 마오쩌둥과 회담 중 "베를린은 서방의 아킬레스건이오. 그것은 '물집이 생겨 통증을 주는, 유럽에 놓인 미국의 발'이었소." 및 '''[[베를린]]은 서방의 [[고환]]이다. 서방세계가 아파서 소리지르게 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베를린을 꽉 움켜쥔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 스탈린 사후 국제혁명의 노선 문제와 당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 문제의 입장 차이로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 사이에서 분쟁이 벌어졌을 때 이 갈등을 봉합하고 '''형제 사회주의 국가의 연대와 우애'''를 유지하기 위한 회담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때 중국대표로 회담에 참여한 사람은 [[저우언라이]]였다. 한참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어졌지만 양국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열받은 흐루쇼프는 저우언라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부르주아 지식인 계급 출신인 당신이 노동자 계급 출신인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소!"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심각한 계급적 문제를 가지고 있지요. 자신의 출신계급을 배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회담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흐루쇼프는 손님인 저우언라이에게 행렬의 선두 자리를 양보했고, 서겠느냐는 저우언라이의 사양에 대해 "당신을 내 뒤에 두면 그 지팡이로 내 머리를 후려칠까봐 무섭소."라고 대답함으로써 복수했다. * 한 번 꽂힌 유머는 주변 사람들이 질리도록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콘라트 아데나워]]에 관한 농담이었다고 한다. 그는 독일의 문제는 아데나워의 알몸으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뒤쪽은 [[서베를린|좌우로 갈라져 있고]], 앞쪽은 [[아재 서요|못 일어서기]] 때문이라고. 흐루쇼프 치하만 해도 서독은 전쟁의 참화로 개발살이 났기 때문에 했던 말이다. * 생전에 소련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에게 1971년 죽기 일주일 전 본인이 먼저 전화를 걸어 사저로 불러서 "나는 당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탄압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시인(문학)|시인]]이라서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정치가]]였다. 정치가라는 것이 얼마나 역겨운 직업인지 당신은 모를 거다. 정치가는 쫓겨나지 않으려고, 그저 소리지르는 수밖에 없는 자리다"라며 옙투셴코에 대한 탄압을 사과했고, 옙투셴코는 흐루쇼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 닉슨과 통화를 하면서 "쿠지카의 어머니를 보여주겠다(Показать кузькину мать)"[* 러시아어 및 영어 [[위키백과]]에 항목이 존재한다. 러시아어판에서는 '쿠지카'로 되어 있고 영어판에서는 '쿠지마(Kuzma)'로 되어 있는데, '쿠지카'가 '쿠지마'의 애칭(diminutive) 정도 되므로 별 차이는 없다. 흐루쇼프의 영향 때문인지, 영어판 문서가 러시아어판보다 더 길고 자세하다.]라고 엄포를 여러 번 놓았는데, 미국 측에서 "쿠지마와 그 어머니가 대체 어떤 인간들이기에 그걸 보여주겠다는 건가"하고 어리둥절했다는 이색 에피소드가 있다.[* 흐루쇼프와 코시긴의 통역가였던 빅토르 수호드레프(Viktor Sukhodrev)가 증언하기를, 흐루쇼프가 미국인들에게 처음으로 이 말을 꺼낸 것은 그 유명한 주방 논쟁 때였다고 한다.][* 쿠지카/쿠지마는 러시아 속담에 등장하는 사악한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고, 딱정벌레 종류의 해충 이름이기도 하고, 집에서 애들 때릴 때 쓰는 채찍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 외에 상황에 따라 악마를 지칭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의미의 단어이며, 그런 쿠지카/쿠지마의 어머니 되는 사람을 꺼냈다는 것은 그보다 더 나쁘다는 의미였다.] 이 말은 "혼쭐을 내 주겠다(teach someone a lesson)"라는 러시아어 숙어인데 당시 미국에 이런 숙어를 이해할 정도로 러시아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기에 일어난 촌극이었다. * 이와 비슷한 사례로 1970년 12월, [[에드거 스노우]]와 다시 만난 [[마오쩌둥]]은 그를 배웅하면서 "화상타산 무발무천(和尙打傘 無髮無天)"이라고 하였으나, 중국계 미국인 2세였던 통역가 낸시 탕은 그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오쩌둥이 "자신을 비가 새는 우산을 쓰고 다니는 외로운 스님이라고 생각한다"고 직역해버렸지만, 사실 마오쩌둥이 하고 싶었던 말은 자신은 인간의 법이든 하늘의 법칙이든 구애받지 않고 살아왔다고 한 것이었다. 또한 1995년 11월에 [[에토 다카미]] 당시 일본 총무대신이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망언을 하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이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화를 냈는데 이 때 일본 내 웬만한 지한파나 한국통들도 '버르장머리'란 단어를 해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1959년 미국 방문 당시 안전상의 이유로 [[디즈니랜드 리조트|디즈니랜드]] 방문이 거절되자 TV에서 대놓고 난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데 왜 못 가느냐며 떼를 쓴 적이 있다.[[https://www.voakorea.com/a/a-35-2009-07-07-voa30-91379564/1324140.html|#]] 디즈니랜드는 당시 기준 불과 몇 년 전인 1955년에 개장되었으므로, 꽤나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달라이 라마 14세]]와 만난 적도 있는데, 달라이 라마는 나중에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흐루쇼프는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마치 돼지같았지만 똑똑했다면서 저우언라이 같은 인간과는 친구가 될 수 없지만 흐루쇼프와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금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실 달라이 라마 14세의 경우 [[저우언라이]]에 대한 평가는 유독 박한 편이었고,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을 비교할때도 마오를 높게 평가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달라이 라마 14세의 성격이 행동거지가 거칠고 투박해도 직설적인 사람을 더 선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사적이라는 평판을 받더라도 노회하고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하기야 4세에 달라이 라마의 직위에 올라 10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부터 온갖 정치계의 괴수들과 상대해야 했던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의 입장에서 보면 속내를 알기 힘든 노회한 인물에 비해 그나마 솔직한 인물이 상대하기에 덜 괴로웠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파일:5bbc720a15e9f9796d67a9fe.jpg]] * [[국제연합|UN]] 회의장에서 연설할 때 [[구두]]를 벗어 연단을 치면서 연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위 사진은 합성이고,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소리나 사진자료 등은 남아있지 않으며, 정확히 어느 타이밍에 일어났는지도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사건 자체는 일어났다고 하며, 필리핀의 UN 대변인인 로렌조 스믈로그가 소련을 비방하는 연설을 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구두를 벗어 자신이 앉아있던 책상을 내려찍었다고 한다. 우리 상식에서는 납득이 안 되는 괴상한 행동이지만, [[러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제스처라는 의견도 있다. 이 에피소드는 EBS 인터넷수능 영어 지문에 "흐루쇼프가 서양 사람들이 정치적 논쟁을 매우 좋아해서 그들이 원하는 걸 연설에서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행위를 했다."고 나오기도 했다. 나중에 회의 사진을 분석해 본 결과 흐루쇼프는 양쪽 발 모두 구두를 신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처음부터 이런 행동을 하려고 미리 구두 한짝을 준비해뒀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사실 과도한 흥분이나 제스처를 미리 준비해두는 경우는 흔하다. [[파일:external/img.hani.co.kr/117911124965_20070515.jpg]] * 한창 잘 나가던 때의 흐루쇼프. 관료들끼리 우샨카에 눈을 담으며 놀다가 찍힌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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