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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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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의 종식 (1985년 ~ 1991년)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450> [[파일:COLD_WAR_END.jpg|width=100%]] || || 1990년 1월 31일 [[맥도날드]] 모스크바 1호점 개점 || 맥도날드의 소련 입성은 냉전의 종결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면으로써 당시 서방 국가들뿐 아니라 러시아 국민들에게도 엄청난 쇼크로 다가왔던 사건이기도 하다. 냉전 시절 자본주의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프랜차이즈가 공산주의의 심장에 들어섰다는 것은 [[소련]]과 [[공산주의]]가 이념적으로 [[미국]]과 [[자본주의]]에게 완전히 패배[* 이전부터 흐루쇼프 집권기 이후 코시긴 개혁을 통해서 이미 소련은 계속해서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본주의의 수용이 오히려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을 낳았다. 맥도날드의 입점은 그 개혁의 종지부이자 소련이 완전히 자본주의를 수용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였음을 의미했으며 개혁, 개방 정책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많은 공산국가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이 때부터 중국, 베트남 같은 공산국가들 역시 개혁개방을 했다.] 당시 소련 붕괴와 함께 [[구소련]] 국민들은 초강대국 [[소련]] 시절에서 벗어나 더 이상 미국을 대등한 관계로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때문에 미국과 자본주의는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더 발전되고 선망하는 국가로 발돋움했으며 그 증거로 당시 소련에서 맥도날드의 인기는 엄청난 수준을 넘어서 매출 최고 기록을 갱신할 정도였다. 모스크바 [[맥도날드]] 1호점은 [[자본주의]]의 맛을 보기 위해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밤낮을 줄을 서 가며 햄버거를 주문했다. 러시아 젊은층들에게 있어 미국은 이념적으로 우월한 선진국이자 가보고 싶은 나라였으나, 소련의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으면서 해외 여행은 엄두도 못 내고 대신 맥도날드라도 향유하는 유행이 퍼졌다. 덕분에 당시 모스크바 맥도날드 1호점은 전 세계 맥도날드 모든 지점 통틀어 연매출 1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담으로 이렇듯 소련과 러시아의 개혁, 개방을 상징하는 프랜차이즈였던 맥도날드는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일으키자 32년 만에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1989년, 동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되었는데 주인공은 [[레흐 바웬사|바웬사]]나 [[바츨라프 하벨|하벨]]이 아닌 [[미하일 고르바초프]]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를 개선하고자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해 돈만 먹는 군비 경쟁을 줄이고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평화 외교ㆍ군축 협상을 실시해 서구권에서 엄청난 외교적 인기를 구가하며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하지만 이는 억눌린 불만을 터트리고 혁명을 일으켜 동구 공산권 붕괴로 이어졌다.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버려도 동유럽이 친소파로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8월 쿠데타]]까지 터지며 정치판도 난장판이 되고, 결국 [[보리스 옐친]]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소련 붕괴]]가 일어나게 된다. 냉전 말엽에 소련의 경제가 위기를 겪으면서 소련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수를 쓸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다행히 소련은 미국과 NATO를 향해 발악하지 않고 [[소련 붕괴|스스로 붕괴되었다.]][* 정확히는 소비에트 건국의 주요자들이 퇴직하며 등장한 기술 관료들(테크노크라트)이 특권을 누리기 시작하면서 생긴 공산귀족, [[노멘클라투라]]들에 의해 강제로 소비에트를 해체하고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새로운 국가를 건국함으로써 냉전도 막을 내렸다.][* 여기서 '만약 소련이 체제 붕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면?'이라는 대체역사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게임이 바로 [[월드 인 컨플릭트]]이다.] 세계를 양분했던 두 거대 세력의 대결치고는 마무리가 허전한 감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종주국이었던 소련은 물론이고 다른 공산권 국가들 사이에서도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과 [[베트남]], [[라오스]] 같이 공산 국가이긴 했지만 소련의 영향 아래 있지는 않았던 아시아의 공산 국가들도 차차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나 베트남의 [[도이머이]] 정책과 같은 개혁/개방 정책으로 선회하였으며 동유럽의 수많은 공산국가들도 소련의 영향력을 벗어나 유럽 연합을 향해 뭉쳐 나갔다. 물론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처럼 개방 정책을 크게 실시하지 않은 국가도 있으며 [[북한]]이라는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변형시킨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내세우며 문을 닫아건 나라도 있다. 사실 미국이 냉전 말기에 냉전을 이기기 위해 큰 공작을 한 것도 아니고 고르바초프의 실책을 통해 반사이익을 얻은 것에 가깝다.[* 다만, 이 시기에도 종주국인 미국 답게 첩보전에서는 여전히 소련 및 공산권에 대한 정보력과 작전력이 강성했었다.] 소련에 강경하던 레이건 정권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대소 강경 정책에서 유화 정책으로 돌아섰다. 소련을 [[악의 제국 연설|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며 강경책을 펼치던 레이건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자 소련을 비난하여 자극하지 않고 유화 정책을 펼쳤다. 비록 레이건이 [[상호확증파괴]] 개념을 극단적으로 싫어해 [[SDI]]에 집착해서 SDI 포기를 요구하는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레이건은 SDI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겠다며 미국과 소련이 SDI를 공유하면 핵무기가 무력화되어 결국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게 될 거라는 이상론을 주장했다. 사실 2차 집권기의 레이건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모든 핵무기를 폐기해야 된다고 수시로 주장했고 화성인이 침공하면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야 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극단적인 강경파도 아니었던 닉슨도 2차 집권기의 레이건이 지나치게 소련에 유화적이라고 레이건을 비판하기도 했다.] 비록 SDI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INF 협정을 체결했고 레이건은 소련을 방문해서 더 이상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베를린에서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명연설을 하기는 했지만 [[립서비스]]였고 레이건은 2차 집권기에 냉전 승리를 위해 특별히 큰 공작을 하지는 않았다. 부시 집권기에도 미국은 소련에 유화 정책을 펼쳤다.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위성국들이 민주화되자 미국은 환영했지만 동유럽 공산 정권 붕괴를 위해 큰 공작을 하지는 않았고 소련의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로 위성국들의 공산 정권이 무너졌다. 미국은 동유럽 민주화와 독일 통일에 만족하고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물론 이 약속은 어디까지나 구속력이 없는 국무부 장관의 구두약속이었기 때문에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신생국 및 민주화된 동유럽 국가들이 가입하면서 나토는 확장되었다. 심지어 미국이 강제로 나토에 가입시킨 국가들은 전무하다. 그러나 이것이 훗날 소련의 후계국인 러시아의 불만으로 작용하게 되고, 결국 강경파 푸틴이 집권한 뒤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불만을 표출하게 된다. 자신들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발트 3국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하려 하자 결국 이를 빌미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된다.] 이후 소련이 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으로 흔들렸지만 미국은 독립운동 지원은 커녕 소련 붕괴 직전까지도 소련의 내전을 우려하며 오히려 독립 요구를 말리려고 했다. 1991년 7월에는 양국이 전략무기를 감축하는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1991.7.31)|제1차 전략무기감축협정]]을 맺었다. 8월 쿠데타 전에는 공산당의 권력이 살아 있었고 소련이 평화적으로 붕괴될 거라고 예상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전에는 고르바초프의 요청으로 부시는 우크라이나에서 독립 반대 연설을 했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쓴 이 연설에서 부시는 미국은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않을 거라며 독립운동을 자기파괴적인 민족주의라고 발언해 미국 보수파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2000년대 아버지 부시는 당시 독립운동을 노골적으로 미국이 지원해서 독립운동이 과격해졌다면 전쟁이 날 수 있었다고 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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