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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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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자비한 숙청광 === >'''종파분자와 계급의 원수는 그가 누구이건 3대에 걸쳐서 씨를 없애야 한다.''' >---- >1968년 김일성 [[교시(북한)|교시]][* 정작 웃긴 것은 그 조건에 가장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이 바로 [[김형직|누구보다 강경한 __반공주의자__]]와 [[강반석|독실한 개신교도]]의 아들인 '''김일성''' 본인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T4 작전]]으로 무고한 장애인들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는 실제로는 오늘날 기준으로도 매우 특이한 장애인 [[잠복고환]]이었으며, 책을 똑바로 들 줄 아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몰아 학살한 [[폴 포트]] 역시 실제로는 부농 출신에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고 교사까지 지낸 엘리트였다.]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은 [[6.25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도 어김이 없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은 잦은 전술적 실패와 자신의 오류를 부하에게 전가하면서 처형을 명령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 씌웠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 제 3, 4사단은 남진하여 서울을 점령했는데 제1사단장 [[최광]]의 진군이 문제가 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제1사단은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한국군 제1사단의 조직적인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진군이 타 사단에 비해 지연됐다. 당시 고랑포 → [[임진강]] → [[문산읍(파주)|문산]] → [[서울특별시|서울]]로 진군 경로를 하달한 이는 전쟁 계획을 세우고 지침을 내렸던 최고 사령관 김일성이었다. 임진강에 도달한 제1사단장 최광은 예하 연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최광을 체포하여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일성은 제1사단의 부진한 진격에 대단히 신경질적이었으며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일절 반성이 없었다.''' 김일성의 작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던 사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수원시|수원]] 점령 실패에서도 나타났다. 북한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 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달성됐으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 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김일성은 수원 점령에 실패한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문책의 칼날을 들이댔다.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으며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소장이던 [[최현(북한)|최현]]은 제2사단장으로 임명됐다. 김일성의 책임전가성 문책은 전쟁 후에 더욱 잔인하게 나타났다. 전 주소 북한대사 [[리상조]]와 소련 유학생 허웅배(1928~1997)[* 참고로 그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의병장 [[허위(독립운동가)|허위]]였다. [[http://www.koreanhistory.org/9062|허웅배에 관한 글]]]의 김일성 정전[* 북한의 암살을 피하기 위해 전 비서 임은이라는 가짜 신분을 내세웠다.]에 따르면 6.25 전쟁에서의 무참한 패배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피의 숙청'을 단행케 한 계기가 됐다. '''자신의 전략이 없음으로 인해 패배한 전쟁의 책임을 군사령관에게 전가'''하고 개인 [[독재]]의 길을 여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의 숙청은 그 잔인함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림은 자신이 희생의 직전까지 갔는데 그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장군 중 95%에 해당하는 70여 명이 학살 내지 처형되고 당·정·군의 간부급 20만 명이 숙청됐다.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합하면 희생자 수는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417113|한다.]][*출처 림은, '北韓 金日成王朝 祕史' 한국양서, 1982, pp. 326 - 327.]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을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시|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는데 '''김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억까|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김무정을 실각]]'''시켰다. 6.25 전쟁에 대한 피해와 책임을 자신이 지게 될까 두려웠던 김일성은 자신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과 [[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http://news.joins.com/article/4012467|시작했다.]] 결국 박헌영은 6.25 전쟁 책임론에 휩싸여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당하는데 당시 체포당한 이유는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에 내통한 [[간첩]] 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리승엽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서울 점령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는데 휴전 직후 미국 [[스파이]], 반당종파분자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위에서 해임당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재판 직후 증인으로 나와있던 리강국 등 주요 남로당계 간부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다 김일성으로부터 신변 위협을 느껴 [[소련]]으로 [[망명]]한 [[박길룡]]에 따르면 박헌영은 7월 19일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세운 [[꼭두각시#s-1]]답게 김일성 역시 스탈린식 개인 숭배를 자신에게도 적용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후원자였던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에 의해 스탈린의 신격화가 중지되었다. 한편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신나게 써먹었다가 갖다버린 연안계와 소련계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리를 [[갑산파]], 심지어 혁명을 한 적도 없는 김영주같은 낙하산들이 채우고 완장질을 하는 현실에 기가 막혀서 김일성에게 이를 시정해줄 것을 수차례 강력히 요구하였다. 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인사정책에 대한 항의가 들어오자 이들을 조금 승진시켜줌으로 달래려 했다. 하지만 그간 김일성의 토사구팽과 무도한 정치에 질려있던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서휘]], [[리필규]] 등은 조선로동당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그의 정치를 시정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와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들 김일성 우상화 반대 세력에 협조적이였던 소련이 헝가리와 폴란드의 소동을 거치며 북한의 지도부 교체가 가져올 혼란을 두려워해 전원회의 전 이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중국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파악도 못했으며 이들 8월 그룹조차도 그 시대의 이상적인 공산주의자들로, 김일성은 젊고 능력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맑시즘을 잘 배운 자기들이 옆에서 지도하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렇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본 김일성은 잔혹하게 이들의 항명을 진압한다. [[서휘]],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과 당적은 모두 박탈되었으며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은 [[내각]] 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했다. 이것이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었다. 또 [[8월 종파 사건]] 등을 통해 김일성이 숙청한 연안파의 수가 '''6만 명 내지 9만 명'''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며,[* 정황상 이들의 가족까지 포함한 수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https://www.khan.co.kr/feature_story/article/200112282016251|#1]]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75|#2]] 이후 1958~1959년까지 1957년 8월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중 무려 '''1/4'''가 숙청되었다고 한다.[* 1959년 7월 19일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보궐선거(120만 명의 투표자 중 무려 14명이 반대포를 던졌고, 이후 이 투표는 2023년 이전까지 반대표가 나온 마지막 북한 선거가 되었다)의 언론매체 보도를 금했다는 것을 보면, 숙청 규모가 매우 컸던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도 8월 종파 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하는데 8월 종파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반대파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후 1958년 1차 당대표자회를 열어 반대파들에게 동정적이었던 [[김두봉]], [[박의완]], [[오기섭]] 등도 모조리 숙청하는 등 북한에서 김일성 친위세력을 제외한 세력은 거의 씨가 마르고 만다. 최후의 분파였던 [[갑산파]]는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김일성과 이견을 보이다가 [[갑산파 숙청 사건|결국 숙청되고 만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으로 이러한 숙청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김원봉]] 등 월북한 인물들도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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