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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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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능한 전쟁광 ===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인류 역사에 일찌기 없던 특출한 군사사상과 전략전술, 영군술로 무패백승을 펼치며 한 세대에 두 제국주의를 이긴 명장'[* 정확히는 [[1945년]]에 [[일본]]을, [[1953년]]에 [[미국]]을 항복시켰다는 주장을 말한다. 물론 이 주장은 모두 허위 날조로, 실제 역사 속에서 일본을 패망시킨 것은 미국이었던 데다가 6.25 전쟁에서 북한은 적화통일의 야욕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을 식민지배한 나라([[프랑스]])와 미국을 모두 이긴 명장은 김일성이 아닌, [[베트남]]의 [[보응우옌잡]]이다. 애초에 [[디엔비엔푸 전투]]만 봐도 보천보 전투랑 비교하는 것이 디엔비엔푸 전투에 대한 모욕이다.]이라고 허위 날조하고 있으나, 실제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똥별|매우 형편없었다]]. 실제로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옆집 할머니, '''아니 지나가던 어린애가 지휘해도''' 이길수 있었을 압도적인 물량 차가 났던 전투인 [[보천보 전투]]나[*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은 약 170명이 동원된 반면 보천보에 있던 일본 병력은 군도 아닌 [[순사]] 5명이 전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죽지 않았다. 정작 이 전투에서 전사한 건 유탄에 맞은 요리사와 2살짜리 여자 아기, 이렇게 꼴랑 2명 뿐이다.] 6.25 전쟁 중의 [[오산 전투]] 정도였다. [[6.25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도 3일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자 바로 승리했다고 자만하여 퍼레이드를 여느라 시간을 지체한 것도 모자라 탱크를 보병과 똑같이 운영[* 2차대전 동부전선에서 전차 비싸다고 독일의 한 지휘관이 보병을 앞세워서 진격하여 전차가 보병 진군속도에 맞추는 삽질하다가 보병은 물론 전차 피해도 컸다. 반면 전차를 앞세워 기동전을 펼친 다른 방면 독일 기갑부대는 적이 방어선을 짜기 전에 기습이 가능하여 성공하였다. 소련은 물론 미군도 전차와 보병이 굳이 같이 이동한다면 전차에 병력을 태워 빠르게 전진했다.]하여 '''탱크들이 보병의 이동속도에 발을 맞추어 천천히 진격해야 했고,''' 국군과 UN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고 말았다. 빨치산 경험만 있었지 기갑부대 운영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이런 멍청한 전략을 짰던 것이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joosungha/seoullife-03292024110220.html|#]]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시]]를 떠나 [[덕천시]]로 도주했고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시]]를 떠나 [[강계시]]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남조선 해방을 호언장담했던 그는 스탈린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림은이 당시 김일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유배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림은,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金日成 王朝', 沃村文化社, 1989) p 252.] 이 때문에 6.25 전쟁 중 도움 받는 주제에 중공군에게 자꾸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는 '''"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맹비난하였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린 김일성은 [[유엔군사령부|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으로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이 주도하던 전세가 다시 밀리게 되자 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유엔군이 중공군을 기습하여 중공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 때문에 펑더화이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홍콩]] 유력지 "명보"에 따르면 분노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쳤고''' 그 탓에 김일성이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다만 이 에피소드는 신빙성이 의심되는 이야기이긴 하나, 적어도 김일성이 펑더화이에게 '모욕적인 처우'를 당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실제로도 펑더화이는 북한군이 벌이는 대대적인 양민학살과 조직적인 약탈, 그리고 그로 인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김일성을 불신하였다고 한다. 비록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일부 과장되었다는 평가가 있고 중공군도 잔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지만, 적어도 그런 '삼대기율 팔항주의'라는 허울이라도 있던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은 [[북한군]]만큼 막나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펑더화이]]와 [[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전세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펑더화이와 쑹스룬이 지휘한 [[중국 인민지원군]]이 주도한 것이다. 게다가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북한군은 진짜로 '''한 게 없다.'''[* 당장 [[백마고지 전투]]와 [[장진호 전투]]도 중국군이랑 싸운 것이다.] 정확히는 공군은 전쟁 초반에 괴멸당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대규모 전투는 다 중국군이 맡았기에 6.25 후반 전투 중 북한이 자랑하는 전투는 비교적 덜 치열했던 동부 고지에서 벌어진 [[가칠봉 전투|1211고지 전투]]와 [[351고지 전투]][* 이것 역시 북한이 15분 만에 완승했다고 과장했다.] 이렇게 2개밖에 없을 정도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joosungha/seoullife-07262024092418.html|#]] 게다가 1960년대 이후, 한국과의 군비경쟁에서 우위를 가지기 위해 '''국가 예산의 30%를 군비에 지출시키고 100만이 넘는 젊은 인력들을 군대에 10년 이상 징집시키면서''' 북한 경제에 큰 주름을 가져다 주었다. 국부의 상당수가 지출 대비 경제적 효과 창출 효과가 매우 제한적인 군대에 투자된 것은 물론이고 젊은 노동 인구들이 10년 이상 군대에 강제로 복무하게 되면서 북한 경제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 외에 그의 군사적 실책에 대해서는 [[4대 군사노선]] 참고. 그리고 6.25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허락받으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는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지만, 김일성은 끈질기게 스탈린을 설득하며 전쟁을 부추겼고, 결국 스탈린은 [[http://news.kbs.co.kr/tvnews/news9/2010/06/24/2118018.html|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6.25 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 북한이 이 전대미문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북한을 침략해 일어난 '[[민족 해방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셈. 이렇게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은 북한 경제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전쟁 이전의 북한은 [[원산]]이나 [[청진]] 등에 공업단지가 꽤 많이 조성되어 있어서, 이것만 열심히 굴렸어도 북한은 [[동독]]같이 공산주의 국가 치고는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될 수 있었겠지만, 김일성이 무리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한국을 구하려는 일념에 참전한 [[미군]]이 원산 등의 지역에 [[원산 폭격|대규모 함포사격]]과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바람에 그 많던 공업단지를 깡그리 잃었으며, 북한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나마 소련과 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70년대 초중반까지는 국부에 한정해서는 남한보다 더 잘사는 나라로 남아 있었지만, 70년대 이전에도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이나 그 후유증을 극복한 뒤의 [[배급제]]로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삶의 질이 남한보다 뒤쳐지는 경우도 많았으며, 남한의 [[한강의 기적|기적적인 경제성장]]과 북한의 온갖 경제 실책들로 이제는 북한이 극빈국인데 한국이 선진국인 정반대 포지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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