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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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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권력욕 === 김일성은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고학력인 중졸[* 정확히는 중학교 '''중퇴'''지만 교과과정은 거의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학제는 영국에서 유래한 2단계 학제였다. 그러므로 현재로 치자면 고졸 내지는 고교 중퇴에 해당한다.][* 사실 해방 직후 시점에서도 한반도의 (일본어) 문맹률은 무려 '''78%'''였으며, 1944년 기준 중학교 이상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비율은 고작 '''1.4%'''였다. [[이승만]]이 오늘날 기준으로도 엄청난 엘리트였기에 가려지는 감이 크지만 김일성도 당대 기준으로는 명백한 고학력이었다.]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그 어떤 나랏일보다 중요시'''하는 태도와 함께, 전문적인 능력은 부족했다는 평가.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거의 이해하지 않았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고 본다. 남북통일을 위해 사회주의를 연구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산주의자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면서도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독재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초졸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 같이 학력이 낮아도 추후 사회주의로 나라를 이끌고자 하면 그럭저럭 사회주의 이념으로 나라가 굴러가나 김일성은 티토보다 학력이 높았어도 그렇지 못했다.[* 소련군 장교들은 소학교 졸업을 겨우 한 대다수 항일연군 병사들이 아닌, 중졸에다 나름대로 리더십도 엿보였던 김일성에게서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중국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 것을 감안하면 '학습능력' 자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련의 군대에서 복무했을 때도 몸은 허약하나 두뇌가 명석하다는 평까지 있었을 정도였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011010041424744|#]] 외교적으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완은 있었다. 하지만 진짜 [[권력]]만을 추구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군사적 수완 같은 다른 능력은 부족했다. 권력욕이 너무 강하여 성급하게 일을 벌이다가 망할 뻔한 사건이 [[6.25 전쟁]]이다. [[박헌영]]의 부추김이 있었다고 하나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서 통일은 못하나 국체를 보전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되면 박헌영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6.25 전쟁/전쟁 발발#s-6|계획]]도 있었고, 정전 후 실제로 이를 시행하였다. 심지어 전쟁을 처음 제안한 것은 김일성이 맞다.[[https://blog.naver.com/gounikorea/221595011719|#]] 정부 수립 초기에는 농민의 지지를 얻고자 [[토지개혁]]을 통해 북한 농민들에게 땅을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회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둘러댔다. 토지의 국유화를 북한 주민이 싫어할 것을 예측하여 일단 눈속임을 한 후 실행 여건이 갖추어진 후 실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식 토지개혁은 땅이 포함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반대하는 사회주의의 취지에 어긋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농민과 노동자의 증오와 피해의식을 부추겨 북한의 지주나 종교인, '반동'으로 일컬어진 학생세력 등을 숙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698109#home|#]] 그 뒤 북한에서 권력 기반을 키우는데 집중하다가 더 많은 권력을 얻을 조건이 성숙했다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6.25전쟁을 일으킨다. 김일성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군세를 잃고 [[평양]]마저 함락 당한 끝에 [[강계]]까지 도망쳤는데 만약 [[펑더화이]]와 [[쑹스룬]] 등이 이끄는 중공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완벽하게 망할 뻔했다.[* 중공군 개입이 시작된 1950년 10월과 11월에 미군은 압록강변의 국경도시인 [[혜산시|혜산진]]에 도착했고 한국군은 함경북도 [[청진시|청진]]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반면 이 때 김일성은 중공군이 올 때까지 [[강계시|강계]]의 벙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사실 낙동강까지 밀어붙였던 전쟁 초반에도 소련의 지원과 전쟁을 예측하지 못하고 대비를 못한 [[남한]]의 실책이 겹친 덕에 운좋게 이겼을 뿐이다. 그것도 한국 전쟁 시기 북한편에서 뛰어난 군공을 세운 것은 그의 파벌이 아니라 김일성이 나중에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시킨 [[김무정]] 같은 [[연안파]]였다. 김일성은 점령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지인의 민심을 얻는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학살과 전쟁 범죄를 자행하고]] 인력과 자원을 징발하여 그나마 있던 민심마저 잃어버렸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 동무는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뭐하고 있어?"라고 화를 냈고 마오쩌둥조차 어리석다고 김일성을 비판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도 우선 민심을 얻기 위해 토지개혁으로 땅을 나눠주고 약탈과 학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민심을 얻었다. 학살자로서의 악명은 주로 체제가 안정된 이후에야 집중된 것이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불과 몇년 전 바로 이런 상황을 독소전에서 겪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겪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사람들은 독일군을 일종의 해방자로 여겨 환영했다가 그들의 정신나간 짓거리를 본 뒤 파르티잔으로 돌아섰다.] 권력을 지켜줄 세력만 자신을 지지한다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보였는데, 머슴이나 고용농 등에게 빼앗은 땅을 넘겨주며 농민위원장 등으로 출세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북한인들이 김일성의 실체를 깨닫고 6.25 전쟁 당시 [[흥남 철수작전]]을 통해 월남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굳이 실제로 잘 대해주는 식으로 민심을 얻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반발하면 충성파가 이들을 잘 숙청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 중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그것도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띠는 레닌주의 계열 사상의 안좋은 점만 골라 받아들였다. 전후 권력 기반이 확고하지 않을 때는 [[레닌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뿐 아니라 레닌의 전위당 이론을 통해 모든 정치적 권력이 관료화된 전위당인 노동당에 집중되어 사회의 전 구조가 수직적 통제 하에 들어있어야 하며, 모든 권력이 1인과 일당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하였다. 전쟁이 멈추자 주었던 땅도 다 뺏고 사회주의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체제는 권력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주의의 일부만 빌려온 것이었다. 권력 기반을 더 갖추자 소련의 사상을 갖다 버리고 [[주체사상]]을 주장하였다. [[세종(조선)|세종대왕]], [[이순신]] 같은 민족의 영웅조차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되고, 일체의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지 말도록 하고 자신이 만든 '근로단체' 같은 조직 이외의 동창회와 같은 모임도 금지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북한/이념|도무지 공산주의라고는 볼 수 없는 요소들]]'''을 너무나도 많이 이식하였다. 가령 초강성 민족주의[* 다만 사회주의를 지킨다는 쇼와 해외의 지지기반을 위해 미국의 인종차별을 트집을 잡거나, 해외의 독재자와도 잘 어울리기는 했다.]와 지나친 반외세 경향을 강조한다거나[* 분파마다 차이는 있지만 공산주의는 민족을 초월한 계급적 연대를 강조하며 자문화 중심인 사회를 터부시하여 [[문화상대주의|문화의 우열]]도 대체로 따지지 않는다.], [[핵심계층]]-[[동요계층]]-[[적대계층]]이라는 신분제 사회를 만들어 놓거나[*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이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단 한 번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대립이 사회의 근본 모순이며, 이러한 계급투쟁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변증법적으로 해체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세우는 계급론을 폐기한 적이 없다. 이런 계급구분조차도 생산수단의 사유화 여부에 따른 것일 뿐, 혈통이니 하는 전근대적인 수단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즉, 신분제 사회부터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전혀 맞지 않는 정책이다.], 족벌 세습을 당연시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와 그의 수하들이 [[주체사상]]이라는, [[카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이 들었다가는 무덤에서 뛰쳐나올 법한 '''[[사이비]] [[공산주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경제가 국유화된 '노동자 국가'라는 이념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생산력의 부족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부재로 인한 '기형적 노동자 국가'에 어울릴 법한 사상'''을 만든 것도 그가 공산주의에 무관심했기에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경루동]]에 대한 북한의 선전만 봐도 북한 지도자들이 공산주의가 뭐 때문에 만들어졌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1990년대 [[주체사상파|주사파]]들이 불법 [[월북]]을 통해 김일성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했지만, 김일성 본인은 주체사상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남한의 추종자들이 설파하는 주체사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주체사상 자체가 (여느 설정놀음이 그렇듯이)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끌어다 붙여서 만든 결과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찬 설정인 데다, 애당초 김일성 본인이 사상 자체에 별 관심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유가 크다.[* 물론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의 결함들을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인류사상사의 최고봉' '그 모든 기적들을 다 합쳐도 비길 수 없는 거대한 위력으로 이 세상을 변모시킨 영생불멸의 사상'이라고 터무니없이 [[자화자찬]]하고 있다.] 다만, [[6.25 전쟁]]이 끝난 뒤 [[박헌영]], [[김무정]], [[최창익]] 등 수많은 경쟁자들을 숙청하고 [[최용건]]을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온갖 권력을 휘둘러대고 중국과 소련을 구워 삶아서 중립외교로 제법 수확을 얻은것으로 볼 때, 권모술수 하나만은 대단히 뛰어났다. 운과 환경이 따라주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권모술수의 능력 역시 한국 역사에서 비견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군인으로서는 무능한 정치군인에 불과했어도 정치적으로는 쓸데없는 쪽으로 꽤 수완이 있었던 셈이다. 비록 많은 사람의 민심을 얻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도덕과 상식에는 어긋났지만,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머슴이나 돈이 없는 사람, 교육을 못 받은 사람 등의 서러움과 권력과 인정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여 적어도 자신에게 힘을 합쳐 대드는 것은 어렵게 할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지해 줄 세력을 찾는 능력도 뛰어났다.[* 6.25전쟁 당시에도 남한에서도 인민군이 점령하던 자리에는 머슴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남이 가진 땅은 내 땅이 된다며 좋아했고, 남에게 상전 노릇을 하려고 했다고 하는 경험담이 곳곳에 있다.] 전후행적을 보면 도저히 지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닌것 같은데, 타인의 마음을 꿰뚫고 이용하는 능력 하나 만큼은 대단히 뛰어났던듯 하다. 이들이 새로운 '엘리트'가 되어 김일성 가문의 권력을 유지시킨다는 종국적 목표는 유지할 수 있었고, 한국 전쟁 이후의 고난, [[동유럽 혁명]], 탈냉전 같은 체제 위기에도 이들은 배신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국력이 강한 중국과 소련의 간섭을 남들은 관찰하지 못하는 빈틈을 보아 물리치다 못해 조종을 하였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세습을 한다는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던 일을 해내고, [[방호산]] 같은 인물이 여러 명 나왔다면 진짜 적화통일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며, 한국 정치에까지 북한의 힘을 빌어서라도 상대를 이기고 싶다는 권력욕을 자극하여 내분을 일으킨 '지능'은 어떻게 보면 높다고 할 수 있었지만, 하필 그 지능이란 것이 얼마나 상대를 자신의 욕구에 맞게 잘 조종하고, 언제 상대를 공격하며, 거짓말을 가장 그럴 듯하게 할 것이냐에 관련된 것이었기에 역사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이 한반도가 아니라 국력이 더 강한 곳에서 태어났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어두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장 아시아의 일개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에 불과했던 김일성을 롤모델로 삼으며 김일성의 행적을 모방한 독재자들 때문에 미래가 완전히 망가진 나라들이 수두룩한데, 하물며 김일성 수준의 인물이 공산권 내 강국의 지도자였다면 미래가 망가진 나라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졌을 것임이 안 봐도 뻔하다. 굉장히 머리가 좋았던 예시로, 1940~1945년 88여단에 김일성이 대대장으로 복무하였을 때의 일화가 있다. 고려인인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C%84%B1%EC%B2%A0|유성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으로 일했다. 그가 부대 규정에 따라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나른한 낮잠을 즐기고 있었을 때, 김일성의 연락군관이 그를 깨워 "급식부로 가 김일성 대대장이 먹을 연어를 타 와라."라는 심부름을 전했다. 해당 부대는 규율이 엄격했으나, 병사들의 인격을 존중하여 장교라도 개인적인 심부름을 부하에게 시키지는 않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유성철은 이 심부름을 거부했었다. 그 일은 그렇게 흘러가고, 이후 여단 본부에서 유성철이 당직을 서고 있을 때 중대장 최용진이 "유가이[* '-가이'는 성씨를 뜻하는 [[https://ko.dict.naver.com/#/entry/koko/e58d8cbcc309412e8a61872a75caff31|-가(哥)]]가 와전된 표현이다. 유명한 [[허가이]]도 '허가, 허씨'라는 뜻.](유성철)는 김일성 대위에게, 내일 아침 회의 장소가 변경됐다고 연락하라."라고 명령했다. 유성철은 회의 장소가 어디로 변경됐는지 되물었으나, 최용진은 그런 것은 알 필요 없다고 짜증을 냈다. 그는 할 수 없이 김일성에게 가 회의 장소 변경 사실을 보고하자 김일성은 변경된 장소를 물었다. 그가 전후 사정을 설명했으나 김일성은 무슨 심부름을 그따위로 하느냐며 화를 냈다. 유성철 역시 기분이 나빠 "중대장이 안 가르쳐 주는 것을 어떻게 하겠소. 내가 뭘 잘못했소."라고 반박하며 밖으로 나와 버렸다. 하찮다면 하찮은 일들이었으나 김일성은 뒤끝이 길었다. 유성철은 훗날 북한 정권이 세워진 후 북한군 작전국장으로 복무하게 되었는데, 문일이라는 동료에게 김일성이 이 두 가지 일로 악감정을 품고 있다고 들었고, 그는 숙청을 피해 1959년에 소련의 [[타슈켄트]]로 탈북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자신이 시킨 심부름을 거부한 일을 그 일로부터 최소 14년 뒤인 1959년까지 기억하여 '[[갑질]]을 못한 원한'을 갚았다는 뜻이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011040086721557|#]],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011250088899464|#]] 스탈린도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다고 하지만,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탈출할 때 잠깐 태워준 마부도 기억해뒀다 보답한 일도 있었다고 하나, 김일성은 자기 위의 여단장인 [[저우바오중]]이나 소련인 장교들에게는 순종적이고 다정다감했었지만 부하들에게는 엄격하고 차가웠다. 사실 [[민족주의]]자이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반미, 반일이라는 일관된 개념은 있었고 우방이라 할 수 있는 소련, 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한쪽에 끌려다니지 않는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나름 독자성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는 일제에 대한 해방을 원했던 북한 주민의 소망을 악용하고,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간섭[* 유사한 사례로 87년 [[6월 항쟁]] 당시 미국의 반대가 전두환의 진압을 방해하는데 기여하였다. [[폴 포트]]의 독재도 같은 공산 국가인 베트남에 의해 종식된다.]을 피하는 용도에 국한된 것이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 전에는 독립운동으로 [[중국공산당]]의 눈에 들어 중국의 [[안투현|안도현]]장이 되기를 꿈꾸던 인물이었으며, '''스스로 '안도 사람''''[* 아예 북간도에서 태어난 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에서 자신의 고향을 강([[두만강]]) 건너 남쪽이라고 하고 만주는 돈벌러 가는 곳이라고 여겼던 것과 대조적이다.]이라고 하였다. 건국 초창기에는 [[조만식]] 같은 민족주의자를 탄압하며 소련에 아부했고, 민족 문화를 '봉건주의'로 탄압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에는 스탈린 초상화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소련군에 있어 [[박헌영]]보다 믿음직스럽기에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한복을 입는 모습이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 [[김구]]를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특히 해방 직후에는 [[오기섭]] 같은 좌익 독립운동가 출신과도 싸우고는 했는데, 소련의 제도를 본받고 노동자의 역량을 키워야 하고 민족 반역자를 최대한 배격하여야 한다는 다른 공산주의자와 달리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면 친일파, 지주라도 '교양하고 개조'하면 된다고 주장하며 세력을 불렸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42517|#]] 이는 '통일전선론'이라고 하여 지금도 어느 정도 유효한 내용이다. 음력설은 한국 전쟁의 정전 이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는 아예 명절이 아니었고, 추석은 1972년부터 '민족 최대 명절' 김일성 생일보다 격이 낮은 명절이 되었다.[[https://nkinfo.unikorea.go.kr/nkp/term/viewNkKnwldgDicary.do?pageIndex=9&koreanChrctr=&dicaryId=81|#]] 판소리, 전통 음식, 사투리 같은 민족 유산도 훼손되거나 사라졌다.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라도 자신에게 아부하면 '탄백작업'에서 보듯 혜택을 주고, [[김원봉]] 같은 좌익 독립운동가도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면 숙청시켰다. 특히 [[일본 제국]]이 미국과 대응한다며 '[[귀축영미]]' 구호를 내세우며 조선인을 착취한 것은 절대로 주민에게 알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 아들 김정일은 일본 군가인 [[라바울 소패]]를 즐겨불렀다고 한다. 70년대부터 초상화 검열 정책이 도입되더니 80년대에는 아예 일본 천황 마냥 초상화가 불에 타면 목숨을 버리고 초상화를 구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06112019094857.html|#]] 순수한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더 많은 권력을 위해 민족주의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에 가깝다. 이보다 더한 좌파 계열의 전체주의 독재권력자는 아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경제성장 자체를 부정했던[* 적어도 김일성은 경제 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고 그래서 실제로 개발 독재 정책을 추진은 했다.] [[폴 포트]]와 [[선군정치]]라는 해괴한 개념을 만들어낸 '''김일성 본인의 아들''' [[김정일]] 정도 밖에 없다. 다만 폴 포트처럼 정치의 진면목을 밝힌 것과 다르게 김일성은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 같은 기만으로 통치를 해왔다는 면에서는 더 간사한 면도 있다. 결국 그의 주체사상은 지적으로 조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전체주의 + 군국주의 + 파시즘 등등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모든 사상들 가운데 자기네들 독재권력 유지에 유리한 것들만 다 뽑아내 섞어놓아 '''그 자신과 후손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극악무도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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