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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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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김일성/생애)]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ED1C27><bgcolor=#ffffff><table width=600><width=50%><nopa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m_Il-sung_in_1927.jpg|width=100%]] ||<bgcolor=#ffffff><width=50%><nopad> [[파일:김일성1945.jpg|width=100%]] || ||<bgcolor=#ed1c27> [[1927년|{{{#fff '''1927년'''}}}]]'''{{{#fff , 15세}}}''' ||<bgcolor=#ed1c27> [[1945년|{{{#fff '''1945년'''}}}]]'''{{{#fff , 33세}}}''' || ||<nopad> [[파일:Kim Il-Sung 1950.png|width=100%]] ||<-2><bgcolor=#ffffff><width=49%><nopad> [[파일:Kim il-sung 1984.png|width=100%]] || ||<bgcolor=#ed1c27> [[1953년|{{{#fff '''1953년,'''}}}]] '''{{{#fff 41세}}}''' ||<bgcolor=#ed1c27> [[1984년|{{{#fff '''1984년'''}}}]]'''{{{#fff , 72세}}}''' || [[1912년]] [[4월 15일]] [[평양부(일제강점기)|평양부]]에서 태어났다. 당시 [[평양부(일제강점기)|평양]]과 [[중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 재학 중이던 1920년대 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공산당]] 밑에서 [[만주]] 지역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였으며, 여기서 훗날 친위 부대격으로 활동하며 김일성 체제 성립과 유지에 큰 기여를 하게 되는 [[만주파(북한)|충성도 높은 빨치산 출신 동료들]]을 얻게 된다. [[일본]]의 탄압을 피해 1940년 소련으로 월경해 [[소련군]] 소속 [[제88독립보병여단]]에 입대했고, 해방 후에 한 달여가 지난 1945년 9월 19일 소련군 장교 '진지첸 대위'는 한반도에 도착했다.[* '진지첸'은 소련군 복무 시절 김일성의 이름이었다.[[https://www.chosun.com/J3BKFDKDSFENLNG7LTN3TNG4BQ/|#]]] [[8.15 광복|광복]] 이후 소련 군부에 의해 선택받아 북한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하자 폭력적인 [[토지개혁]]으로 갈등을 조장하여 더 공고한 권력을 추구하였다. [[6.25 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다수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전쟁범죄를 일으켰으며 이후 [[8월 종파사건]], [[갑산파 숙청 사건]] 등을 통해서 중국과 소련과 연계가 깊었던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여 [[1972년]]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채택과 함께 마침내 유일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table align=center><tablewidth=500><table bordercolor=#ED1C27><nopad> [[파일:kimilsung1958.jpg|width=100%]] || ||<bgcolor=#ed1c27><color=#fff> '''[[1958년|{{{#fff 1958년}}}]] 11월 방월 당시 [[호찌민|{{{#fff 호찌민}}}]] 주석과 건배를 하는 모습''' || 전후 한반도 북부의 공업 기반과 사회주의권의 원조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통해 성공적인 전후복구를 마치고 1950 - 60년대에는 [[대한민국]]보다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애초 [[계획경제]]의 한계, 지나친 자립 노선, 과도한 국방비, 미흡한 [[경공업]] 따위의 까닭이 맞물려 차츰 남한에 비해 경제 성장이 밀리게 되었다. [[소련]]과 [[중국]]의 [[중소결렬|대립]] 와중에 [[주체사상|독자노선]]과 [[4대 군사노선|병영국가화]]에 몰두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제2세계]] 국가들과 동떨어진 길로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란 목표도 허울 좋은 집권 명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과 동구권 국가들의 연쇄 붕괴에도 꿋꿋이 정권을 유지했으나, 차츰 정권 유지가 쉽지 않다는 현실 인식 하에 [[미국]]과 [[대한민국]] 등 국가들과 대화 통로를 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평양 집무실에서 [[김일성/사망|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 향년 82세. ||<table align=center><tablewidth=500><table bordercolor=#ED1C27><nopad> [[파일:EP-307139944.jpg|width=100%]] || ||<bgcolor=#ed1c27><color=#fff>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fff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일성''' ||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인민들에게 고깃국과 이밥을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을 50여 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약속이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의 사후 북한은 아예 대다수의 인민이 '''굶주림과 [[아사]](餓死) 위기에 노출된 [[최빈국]]으로 [[고난의 행군|전락했다]].''' 사망 직후 김씨일가 신격화 차원에서 그의 사체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방부처리([[엠버밍]])한 뒤 [[금수산태양궁전]]에 [[박제]]되었고, 그의 장남 [[김정일]]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 등으로 떠받들며 [[주석(직위)|주석]]직을 [[영구 결번]]시켰다. 현재까지도 북한의 국가수반의 직책명으로 주석이 사용된 것은 김일성 이후로 단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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