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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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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록 == > '''인민들을 너무 배불리면 [[민주주의|딴 생각]]을 [[개소리|품게 된다]].''' >---- >김일성[[https://www.dailynk.com/%EC%9D%B8%EB%AF%BC%EC%9D%80-%EC%A2%80-%EB%B0%B0/|#]] > '''[[강반석|어머니]]는 [[칠골교회|예배당]]에 다녔지만 [[예수]]를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믿지 않았다.]]''' >----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1권, 제 1 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에서 > 종래 만주에서의 각종 항일단체는 어느 것이나 그 가는 곳에 따라서 자기의 운동에 광분하여 각 단체간의 연락 통제를 도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국제공산당은 동아(東亞)에서 유일한 ‘파쇼’국가인 일본제국을 타도하고 중국의 실지(失地)회복과 조선의 독립 그리고 공산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항일인민전선의 결성과 아울러 조선공산당의 결성에 대하여 그 지도관리 업무를 중국공산당에게 위임하고, 중국공산당으로서는 위의 위임에 기초하여 재만 각종 무장단체를 규합하여 동북항일연군을 조직시켜 그 일익 (一寶)으로 삼고, 기타 채만 각종 사상단체들도 모두 항일인민전선운동으로 통일하여 그 영도 아래 둔 상황으로써, 이후 조선에서의 공산주의운동도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 등의 파벌운동을 청산하고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조선 전민족을 항일의 기치 아래 규합하여 좌익인민전선의 결성을 도모하고 조선의 독립과 아울러 공산화에 매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 > 1937년 1월 장백현 19도구 산중에서 열린 회견장에서 한 말.[* 출처는 와다 하루끼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p.152.] >'''사령관님, 우리 항일 [[빨찌산]]도 해방전에 참전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 >---- >1945년 9월 하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장군을 처음 만나서 한 요청.[[https://www.joongang.co.kr/article/2634493#home|#]] 이 요청은 그가 거절했지만 김일성이 권력을 얻고 난 후 김일성 자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진공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황당한 [[역사왜곡]]이 이어졌다.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하며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 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나가야 하겠습니다. >---- >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처음으로 연설한 내용[[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228661.html#cb|#]] >임금이 일제 때보다 높은 데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강요하여 나섰습니다.''' >---- >1945년 12월 17일, '직업 동맹에 대한 지도에 관하여' 중. [[평양]] [[사동구역|사동]]에서의 '''노동자의 동맹[[파업]]을 비난'''하며.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대항하며 키운 노동자의 저항 역량은 김일성이 [[조선직업총동맹]] 같은 단체에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통제하여 없애버렸다. >"해방된 이후에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회합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또 한 방면으로는, 이번 우리 회합이 가지는 의의는, 우리 조국의 남쪽 반부를 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시도가 노골화되고 있는 조건 하에서 집합하게 되었으며, 사방으로 우리 조국에 닥쳐온 위기가 가장 엄중한 시기에 소집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의의를 가지고 소집되는 우리는 남북조선의 정치적 문제를 정당하게 토의하고, 민족 분열의 위험을 타파할 기본 대책들을 강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 조국의 정치 정세는 아주 복잡하고 지극히 첨예합니다. 우리 조국의 정치 정세가 지극히 첨예한 일면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지지 하에서 우리 삼천만 민족을 분열하고, 우리 조국의 강토를 자기네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책동하는 데 있습니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이 무모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유엔 조선위원단이라는 명의로서 남조선에서 소위 전민족적 정부, 단독선거를 실시하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에는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우리 조국의 정치 정세가 특이한 것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기다려온 단일민족인 우리 삼천만 조선민족이, 38선을 경계로 인공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조선 인민은 각각 남북이 분리된 조건 하에서, 조국의 영예와 자유와 민주독립을 위하여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북조선 인민들은 소련의 진정한 우의적 성원 하에서, 우리 조국을 민주주의적으로 재건하는 역사적 위업에 있어 거대한 성과들을 달성하였습니다. 북조선에서 우리가 전취한 이 위대한 성과들은 북조선 인민들을 자기 정권 기관인 인민위원회 주위에 철석같이 결속시키고, 통일시키는 튼튼한 물질적 토대로 되었습니다. 북조선 정치 정세에 대한 총화와 우리 조국의 정치 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특수 현황들은 간단히 이러합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 조국이 처하여있는 이러한 복잡 다난한 환경과, 극난한 각종 문제들을 내포한 조건 하에서 집합된 우리의 회의는 반드시 우리 조국에 조성된 정치 정세를 기탄없이 터쳐놓고 토의하며, 우리 조국의 분열과 유엔 조선위원단의 책동과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투쟁할 유일한 공동 대책들을 반드시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지금 조국에 위기가 닥쳐온 엄중한 이 시기에 처한 우리가 통일되지 않고 또는 우리 조국을 분열할 위기를 배격하지 않고 우리 조국의 남쪽 반도를 미 제국주의자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기도를 분쇄하며 일대 구국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 조선 인민들과 후손들에게 대하여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다는 것을 각오하여야 하겠습니다.'' >---- >1948년 4월 19일 [[남북연석회의]] 개회 연설 >'''조국통일이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소련]]에 가서 [[스탈린]] 동지를 만나 [[조선인민군]]의 공격허가를 받아오라.''' >---- > 1950년경, 6·25 직전 평양주재 소련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실린 김일성의 발언.[[https://imnews.imbc.com/replay/2000/nwdesk/article/1864339_30735.html|#]] >국제정세도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제2차세계대전후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된 반면에 국제민주력량은 급속히 장성강화되였습니다. 특히 '''[[국공내전|작년에 중국혁명이 승리함]]'''으로써 세계의 정치적력량관계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로 국제민주력량은 더욱 강화되였으며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되였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는 리승만괴뢰도당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장개석]]도당은 리승만괴뢰도당을 도와줄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쏘련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나라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고있습니다.''' >---- >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개전 당시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비상회의에서 한 연설《결정적인 반공격[* 국군이 1~2km 이미 침공했으니 남침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군대가 질은 좋겠지만 북침을 실행하는 국군에 비해 수가 적으니 분발하라는 등 거짓말을 늘어놓기에 바빴다.]으로 무력침범자들을 소탕하자》에서 >'''야, 이 자식아! [[6.25 전쟁|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박헌영|너]]도 책임이 있어!''' >---- >1950년 11월 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 >10월 10일 한국군과 UN군이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진격해 오자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한 라디오 방송.[* 후에 김일성은 10월 12일 밤 평양을 비밀리에 탈출하여 덕천으로 도주했다가 일주일 후 평양이 한국군과 UN군에 의해 점령되자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나중에 중공군이 개입하고 난 뒤 12월 6일이 되어서야 평양으로 나왔다.] >[[천리마 운동|천리마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이팝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인민은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를 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 > [[반공주의|반공]]은 [[미국 제국주의|제국주의자]]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들고나오는 상투적인 구호입니다. > 사람이 건전한 인격을 갖추려면 다면적인 지식을 섭취해야 하지 않습니까. 학교당국은 어째서 새것을 한창 섭취해야 할 청년들에게서 세계적으로 공인된 선진사상을 연구할 권리마저 빼앗습니까. 맑스나 레닌의 저작들이 보통책방에까지 흘러나와 글을 아는 사람이면 다 읽는 판인데 유독 화성의숙에서만은 어째서 그런 책들을 못읽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 김일성 회고록《[[세기와 더불어]]》, 제1권 제2장 제3절 타도제국주의동맹. > 우리가 해방직후에 조선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떠들었다면 누가 그것을 인정하였겠는가? 인민들은 우리의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란 것은 한 이부자리를 쓰고 살며 한 가마 밥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까지 악선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제가 사회주의를 싫어하였고, 북한이 사후 행할 정책이 거부감이 심하리라는 예상이 있던 건 사실이나 대신 [[평안도]] 같은 지역은 자발적으로 민족자본가, 기독교 민족주의자가 있던 곳이었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50_0020_0010_0020|#]] [[함경도]]는 좌파가 제법 있었으나 오기섭 같은 토착 공산주의자도 이 발언이 있고 난 후 수년 뒤 숙청된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유진오]]가 밝혔을 만큼 사회주의는 단순히 [[공산주의]]와 다른 진보적 사상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의 정책이 너무 폭력적이기에 사람들이 꺼린 것이다.''' 실제로 북한에 살았던 사람들이 드러내던 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대한 옹호를 목격하고 사회통제가 더 강화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때에 우리가 사회주의 구호를 들었다면 인민들은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 “사회주의 혁명의 현단계에 있어서 당 및 국가사업의 몇가지 문제들에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55년 4월 4일) [[https://repo.kinu.or.kr/bitstream/2015.oak/666/1/0000597245.pdf|#]] > 우리 [[북한|북반부]]에서 '''종교인들은 모두 착취 계급의 대변자'''로서 거의가 다 우리를 반대하여 왔으며 우리 공산주의자들을 마귀라고 욕하고 빨리 망하라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종교인들을 함께 데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신교|기독교]] [[가톨릭|천주교]]에서 [[집사(직분)|집사]] 이상의 종교 간부들을 모두 재판해서 처단해 버렸고 그 밖의 일반 종교인들 중에서도 악질들을 모두 재판했습니다.''' 그리고 '''일반 종교인들은 본인이 개심하면 일을 시키고 개심하지 않으면 [[정치범수용소/북한|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 > 1962년 [[사회안전성]]에서의 연설에서 > 해방직후에 있은 일을 한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중략) 나는 그때 청년들에게 우리가 나가는 길은 (중략) 조선식민주주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군중속에서 누군가 불쑥《장군님도 공산주의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거짓말|숨기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보듯 1955년만 해도 일본 때문에 사회주의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던 김일성이었다.]''' >---- > 1974년 12월 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근로자》8페이지에서 >소련을 모델로 삼는 것이 이 나라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지는 젼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자기 백성들을 너무 잘 먹이는 것을 경계한 것처럼 보인다. 1977년,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당시 동독 서기장.]와 만났을때 그는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더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 여기서 사상이 나태해지고 행동이 산만해진다는 것은 경제가 성장해서 국민들 삶의 질이 높아지면 국민들이 독재자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대한민국]]과 [[카자흐스탄]]도 경제 성장이 된 후에야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한국에서 경제부장관이었던 [[김재익]]이 "경제가 성장하면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로 발전된다" 확신하였고 실제로 신군부에 협력했다는 비판에도 김재익의 경제정책은 한국이 신군부를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당연하지만 제대로 된 국가지도자라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말이며,''' 김일성의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북한은 잊을 만하면 식량난에 시달리는 나라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베른트 쉐퍼가 말했듯이 "어떤 동독 지도자 입에 올렸을 경우 무사하지 못했을" 발언이었다. 발라즈스 스잘론타이는[* 오역이다. 발라즈 샬론타이로 번역하는게 맞다.] "김일성은 일관되게 정권의 사회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경제적 '조정' 보다 그렇지 않은 것을 선호했다"고 지적한다. >---- >B.R. 마이어스 저,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중에서- >우리 행성에서 핵무기가 있는 한 핵전쟁의 위협은 가셔질 수 없으며, 인류는 항시적인 핵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배치를 금지하고 지금 있는 핵무기들을 축감하며 나아가서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 빨리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북한의 핵개발|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위에서는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매-- >지금 일꾼들은 마치도 리순신([[이순신]]) 장군을 우리 시대의 영웅보다 더 나은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려 하고 있다. ‘조국해방전쟁’([[6.25 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는 리순신보다 나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 일꾼들은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도 리순신 장군만 자꾸 내세우고 있다.[* 정작 김일성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리순신 장군들과 같은 우리 선조들의 영예로운 업적과 용감성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이 신성한 투쟁에서 우리의 인민군 장병들과 전체 인민들을 영웅적 위훈에로 고무 격려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사후에는 그나마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급적 한계를 언급하고 외세 배격을 강조하는 하에 북한에서 연구되고 있다.] >---- >1967년, 김일성저작집에서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gounikorea&logNo=220934869735|#]] >노동자들에게 생활에 빈 짬을 주지 말라. >---- >중앙일보의 1995년 보도에서. 인민이 짬을 가지면 딴 생각을 품게 되므로 인민에게 끊임없는 사상교육을 해야 한다는 기조라고 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3012042#home|#]] 실제로 '''자는 시간을 포함하여 8시간만 쉬고 나머지 16시간은 일하면서 사상교육 받으라'''는 내용의 저 기사에서 언급되는 사회주의로동법 제33조는 지금도 [[https://www.unilaw.go.kr/Index.do|여기서 검색하면]] 나온다. >내가 죽으면 나의 혁명동지들이 묻혀있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어달라. 그곳에서 내 옛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 >---- >1994년,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아들 [[김정일]]에게 유언처럼 남긴 당부. 그러나 김정일은 이 유언을 무시했고, 체제 선전을 위해 아버지의 시신을 [[엠버밍]]했다. >남조선 당국자들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고 민족 단합이 아닌 외세와의 야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을 [[문민정부]]라 칭하지만 역대 군부독재 정권과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북한의 핵개발#s-3.1|있지도 않은]] [[북한의 핵개발|핵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충돌(동)질 하는 건 미국입니다![* 그러나 그 자손들인 김정일과 김정은은 핵개발을 자신들의 '치적'이라고 자랑하듯 선전하고 있다.] >---- >1994년 생전 마지막 신년사 중. >동무들이 당의 결정을 아는가? 농사제일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 세가지 제일주의인데 화학비료는 [[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남흥화학]]하고 [[흥남비료연합기업소|흥남화학]]을 생산정상화하도록 만들라. 비료만 생산정상화하라. >금년에 [[비날론]]은 계획된 대로 하고 명년에는 5만톤 만부하를 걸어야 돼. 그 다음에 [[세멘트]]를 우리가 정상화해야 돼. 세멘트를. 세멘트가 1 200만톤이란 말이야. 세멘트를. 난 세멘트를 만부하 역시 걸라는 게다. >허구 배무이(선박건조)를 많이 해야 돼. 배무이. 배무이, 그전에 내가 말한것을 백척을 맨들라(만들어라). 그 다음에는 전기를 앞세워야 돼. 내가 늘상 말하는것 같이 전력, 철도, 이거는 어떤고 하니 인민경제의 선행관(앞세워야 할 부문)이라고. >금속문제를 마저 해결해야 되겠어. 금속은 지금 어떤고 하니 우리가 구체적대책을 세워야 한다, 전기하고 금속만 풀면 우리 나라에서는 잘 살수 있다고, 우리가. >내가 이번에 [[지미 카터|카터]] 보고 회담할 때 지금 유엔에서 제재하겠다 하는데, 하려면 해라. 이때까지 우리는 제재받고 살았지 제재 안 받고 산적이 없다. 다 제재한다고 우리를. [[일본]]놈들도 제재하지, [[미국|당신들]]도 다 제재하지. 우리 제재 받고 살았다. 제재받고도 이만큼 살아나가는데, 제재하려면 더 똑똑히 해라. 우리 못살 거 뭐이가? 그랬더니 '제재 취소하겠다.' 그래. 취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나도 마찬가지다. 못사는가 봐라. 우린 더 잘산다. >---- >1994년 7월 6일 생전 마지막 지시 中[[https://youtu.be/L8GBat7Ecbo|#(02:13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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