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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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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백두혈통)] 김일성은 김태서가 시조인 [[전주 김씨]]의 후손이다. 물론 현재 전주 김씨 족보에서는 8대손 김계상 이후의 가계가 누락되어 있는데 남한에 있는 전주 김씨 사람들이 족보상 먼 친척인 김일성 일가를 그만큼 증오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김계상 때 전북 전주에서 이북 평안도로 이주한 후의 족보는 6.25 때 족보가 파괴되고 구성원 대부분이 이북에 있기 때문에 족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원조부: 김계상 / * 태조부: 김차형 {{{-2 (1699년 ~ 1768년)}}} / 태조모: 나씨 {{{-2 (1703년 ~ 1744년)}}} * 열조부: 김욱 {{{-2 (1728년 ~ 1813년)}}} / 열조모: 도민숙 {{{-2 (1735년 ~ 1811년)}}} * 현조부: 김민수 {{{-2 (1770년 ~ 1854년)}}} / 현조모: 고송희 {{{-2 (1772년 ~ 1832년)}}} * 고조부: 김송령 {{{-2 (1810년 ~ 1899년)}}} / 고조모: 나현직 {{{-2 (1811년 ~ 1897년)}}} * 증조부: [[김응우]] {{{-2 (1848년 ~ 1878년)}}}: 북한에서는 그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민중들을 선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이끈 주동자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이건 역사왜곡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감사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장교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물론 당시 기록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사건 당시 김응우는 21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는 1807년생으로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회한 고위 관료였다.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지는 뻔한 일. / 증조모: 리씨 {{{-2 (???? ~ ????)}}} * 조부: [[김보현(북한)|김보현]] {{{-2 (1871년 8월 19일 ~ 1955년 9월 2일)}}} / 조모: [[리보익]] {{{-2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 부친: [[김형직]] {{{-2 (1894년 7월 10일 ~ 1926년 6월 5일)}}}: [[개신교]] [[미션스쿨]]인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동문들과 '민족주의'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아들과 달리, 이 단체의 목표는 일종의 준비론에 가까웠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는 자신의 아들과 달리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훗날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점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 외조부: [[강돈욱]] {{{-2 (1871년 2월 3일 ~ 1943년 11월 14일)}}} / 외조모: 위돈신[* 김일성의 조부모 4인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1917년에 사망했다는 설과 1940~50년대에 사망했다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 모친: [[강반석]] {{{-2 (1892년 4월 2일 ~ 1932년 7월 31일)}}}: [[베드로]]의 음차인 그 반석이 맞다.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차녀로, 그녀 본인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참고로 숙부인 [[강량욱]]은 장로회의 목사였다.[* 북한에서 성모마리아처럼 숭배되는 김일성의 어머니지만, 김형직 사후 안도현 만보라고 부르는 중국 동네에서 아편농사를 지었던 조광준이라는 홀아비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07/2017020700202.html|재혼했었다]]. 그걸로 인해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엇나가고 말았다는 설이 있다. 물론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불리할 가정사가 있다면 철저히 숨기며 김일성 일가를 미화하고 있다.] * --본처--: 김혜순, 김일성이 만주에 있던 시절 여자라 정식 혼인관계였는지는 불확실하나 1940년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조선족 순사와 재혼하고 자연스레 헤어짐. * --정처--: [[김정숙(북한)|김정숙]] {{{-2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 본래 회령지역 지주에게 첩으로 팔렸다가 탈출하여 김일성의 부하 지갑룡의 아내로 1933년부터 1940년까지 6년간 있다가 지갑룡이 생사 불명일 때 김일성이 데려다 살다가 김정일을 낳으면서 아내로 격상되었다. 참고로 김혜순이 있을때도 김일성과 불륜 사이였고 생사불명이던 지갑룡은 멀쩡히 살아있었다고.. * 후처 [[김성애]] {{{-2 (1924년/1928년 12월 29일 ~ 2014년 9월 추정)}}} 타자수 출신으로 김정숙이 김정일을 임신중에 불륜으로 간통해서 ''' 김정숙이냐 나냐 선택하라'''고 김일성에게 요구했고, 김정숙이 난산으로 위험할 때 치료를 거부하고 사실상 자살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 첩실 * 지순옥: 빨치산 시절 부하 강홍석의 아내였으나 김일성이 몇 달 데려다가 살았다고 한다. 김정숙처럼 아들을 못 낳아서 아내로 승격 실패.. * 홍귀원: 벽초 [[홍명희]]의 딸로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비서였으나 김성애가 임신 중, 김일성이 간통하여 임신시켰고 1956년경 출산 중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 제갈 아무개: 김일성의 주석궁 안마사 내지는 [[간호사]]. 김일성의 많은 자식들 중 하나인 김현의 모친. 이외의 알려진 것은 없다. * 김송죽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610336|기사]]: [[기쁨조]] 출신이라고 한다. * 김순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449&aid=0000054067|기사]]: 김일성 말년에 전담 [[간호장교]] 였다고 한다. * 형제 * [[김철주(1916)|김철주]] {{{-2 (1916년 6월 12일 ~ 1935년 6월 14일)}}} * [[김영주(북한)|김영주]] {{{-2 (1920년 9월 21일 ~ 2021년 12월 13일)}}}[* [[1993년]] - [[1998년]] [[9월]]까지 부주석. [[2003년]]부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 자식 * [[김정일]] {{{-2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 * 김만일 {{{-2 (1944년 ~ 1947년)}}}: 3살 때 김일성 관저에 있는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다가 그 연못에 빠져 익사했다. * [[김경희(1946)|김경희]] {{{-2 (1946년 5월 30일 ~ )}}} * [[김평일]] {{{-2 (1954년 8월 10일 ~ )}}} * [[김영일(북한)|김영일]] {{{-2 (1955년 9월 30일 ~ 2000년 5월 10일?)}}} * [[김현(북한)|김현]] {{{-2 (1971년 ~ ?)}}}: 김일성과 제갈씨에게서 태어온 사생아다. 북한 당국에서 존재를 철저히 숨겼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를 통해 김현의 존재를 알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001년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일에게 처형당했다. 사람들의 추측으로 정통성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김현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동갑이다. 그런데 2015년에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있으며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 김백연 {{{-2 (1987년 ~ )}}}: 위에 나온 김송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종회|아버지와의 나이차가 참으로 장대하며]] 동년배 내지는 1살 연하로 확정된 '''[[김여정]]의 고모다.''' 김일성 집안은 본디 '''[[개신교]] 집안'''이었다. 어머니 강반석이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딸이었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부모가 기독교인임을 부정하고 김형직은 [[무신론]]자. 어머니 [[강반석]]은 [[숙모|삼촌어머니]] 현씨와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며 기독교인 집안임을 부정한다. 김일성은 교회에 나가기 싫어했고 아버지가 안나가도 된다고 맞장구를 쳤으며 강반석은 심심해서 나간거라고 애써 기독교의 영향을 부정하며, 오히려 자기가 기독교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와의 인연을 친아버지처럼 여겼다고 과시했는데 이 사람은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의 부친이다.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가 아들처럼 돌봐주었다고 했지만 손 목사 가정에선 이를 부정한다. 그저 안면만 있는 사이이며 손원일 제독과는 학년이 많이 차이나서 알지도 못했을 거라고. 다만 손목사가 김일성이 길림시절 다른 어려운 조선 청년들을 도와 주었을 수도 있고, 만년의 김일성이가 손 목사를 장문에 걸쳐 칭송했기 때문에 이런 인연으로 손제독의 형 손원태 박사는 미국 거주중에 김일성 에게 초청받기도 하고 사망 시 조문차 방문하고 방문기간에 생일을 맞은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직접 차려 주기도 했다. 북한이 1946년에 내놓은 공식 김일성 전기인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에 따르면 1930년대에 한영애란 여자와 [[하얼빈]]에서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으나 난리통에 헤어졌고 이후 최희숙[* 1909년생으로, 김일성 유격대 소속이었으나 1941년 사망하였다. [[대성산혁명렬사릉]]이 준공되자 [[김정숙(북한)|김정숙]], [[김책]], [[최용건]] 등과 함께 맨 윗단에 안치되었다.]이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일본인들이 김일성을 홧병 걸려 죽게 하려고 사로잡아서 눈알과 심장을 뽑아 죽였다고 김일성은 주장했는데 소련에 의해 우상화된 김일성의 전기인만큼 신뢰성은 낮다. 한영애는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의 수괴가 되자 6·25전쟁 도중에 김일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동하다가 공습으로 죽었다 한다. 이후 최희숙의 친구인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난' 여자인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김일성은 구술하고 있는데 이후 이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은 철저히 말소되었고, 그나마 연재처였던 [[로동신문|정로 신문]]은 199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책자 형식으로 편찬하여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비치중이니 큰맘 먹고 서초 국립중앙도서관 5층까지 가서 뒤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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