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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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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치 생활 === [[김정일|아들]]과 [[김정은|손자]]의 사치와 미식가 행각이 너무 유명해서 가려진 감이 없지는 않지만, 김일성도 경악스러운 수준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애초에 김정일의 사치는 김일성이 물려준 기반을 바탕으로 행해진 것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대해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특혜와 특전도 허용하지 않고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겸허하고 소박하게 생활했다'고 선전을 하고 있으나 김일성의 실제 생활은 '겸허함', '소박함'이라는 단어 자체를 떠올릴 수 없을 수준으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사실 북한은 원래 김일성의 휴양을 위해 각지 명승지에 소규모 특각을 건설하다가 1950년대 말부터 그 규모를 크게 늘려 '특각'이란 이름으로 전용 별장을 대대적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참고로 김정일은 자신이 후계자로 등극한 197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별장을 지었으며, 1960년대에 지은 특각들은 '낡고 어둡다'는 이유로 '당과 수령을 찬양하라'며 작가동맹에 넘겨주는 등 특정 계층들에게 넘겨줬다고 한다. 다만 김일성이 비교적 초기에 쓰던 특각들은 이후 지은 특각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평범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07052016100113.html|#]]] 김일성 부자는 풍광 좋은 곳을 골라 중앙당 8국의 전담하에 'OO공사' 라는 명칭으로 전용별장을 짓도록 했는데, 건축 공사는 호흡과 생체리듬에 최적이라는 해발 500m 지대, 경승지 등 자연적 입지조건은 물론 신선한 외부공기의 실내 유입장치 등 건강을 고려한 설계 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얼마나 김일성 부자의 별장 건설에 세심히 공을 들였냐면, 콘크리트는 300~500마르까[* 북한에서는 콘크리트와 강철 등의 강도는 '마르까'를 이용해서 나타낸다. 참고로 어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는 '스탬프, 표, 기호, 부호, 등급, 계급, 성질, 품질' 등을 나타내는 [[러시아어]] 마르카((марка)에서 유래된 단어다.]의 시멘트와 흙 등 일체의 불순물이 없도록 깨끗이 세척한 자갈, 최상급 모래, 오염된 지표수가 아닌 지하수를 사용하는 이외 딸기 향같은 향기까지 배합하여 제조했다. 이러한 별장들은 전부 군대를 동원해 지었으며, 해외 건축가를 비싼 돈을 주고 초빙하여 설계를 맡겼다고 한다. 물론 공사는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며 내부공사 때부터 일정 구역별로 호위총국 초소를 설치하는가 하면 호위총국 발행 비표를 지급하여 방 또는 층 등 지정된 담당 작업구역만 출입하도록 하고 있고, 도배, 실내장식 등 마무리공사는 아예 중앙당 8국에서 전담토록 조치했다고 한다.[[http://nk.chosun.com/bbs/list.html?table=bbs_23&idxno=3859&page=4&total=247&sc_area=&sc_word=|#]] 김일성이 1년에 자모산 별장[* 김일성의 별장 중에서도 가장 큰 별장이었으며, 관리하는 직원만 150~200명에 별장을 호위하는 직원만 5천 명 정도였다고 한다.]에서 보내는 시간만 한 달이 넘었으며, 문에는 상아로 만든 '''1회용 손잡이'''[* 한번 사용한다고 손잡이가 망가지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김일성이 한번이라도 잡으면 곧바로 새 손잡이로 교체했다고 한다.]가 있었고, 초소구역 안에 사냥구역을 만들고는 그 근처에 콩과 옥수수 밭을 만들고는 일부러 수확하지 않아 동물들이 풍요롭게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이런 별장들 안에서 1년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은 '아미산 대표부'라는 부서를 해외의 유명 도시에 두고는 이 지구상에 있는 최고라는 물건이란 물건을 수입하게 했으며, 프랑스제 헤네시 코냑, 싱싱한 [[잉어]]회[*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을 정도로 신선한 회만 먹었다고 한다.], [[원숭이골]][* 김일성이 먹는 원숭이골은 식탁 위에 오른 원숭이가 김일성이 골을 다 파먹을 때까지 눈을 깜빡이고 있어야 했을 정도로 '신선한' 것이어야 했다고 한다.]을 좋아했고, 이러한 사치품과 해외 식료품 구매 자금은 중앙당 [[39호실]]이 [[마약]] 수출과 골동품, 금을 밀매하는 식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1974년부터 1985년까지 압록강변에 위치한, [[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에 있는 창성특각의 경비대원으로 근무했던 박수철(1959년생)의 말에 따르면, 창성특각은 주변에 수풍호와 원시림이 펼쳐 있고 곰, 멧돼지, 꿩 등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 최고의 명승지에 있었으며, 김일성이 갈 때마다 늘 반나체 차림의 여간호사가 수행했고, 특각에는 아름다운 처녀 관리원 10여명을 배치해 김일성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기쁨조]]의 일원이었는데, 이는 즉슨 '''김일성도 아들만큼은 아니었어도 여색을 밝혔다는 소리다.'''] 그리고 김일성은 5~7월마다 매년 한 차례씩 40일 동안 창성특각에 머무르며 사냥과 수영, 산보, 낚시, 호수 유람을 즐겼으며, 별장 내에서는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게다가 [[수영장]]은 날씨가 좋을 때는 지붕과 담이 자동으로 걷히는 (당시로써는) 최신식이었고 밤에는 불을 밝힌 채 구소련의 노래를 배경으로 정원에서 노래와 춤 잔치가 벌어졌으며, 특각에는 오락실, 음악실, 연회실, 어린이용 놀이방,[* 정황상 [[김정남(북한)|김정남]]을 위한 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물표본실 등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별장에서 김일성 경비는 호위총국(이후 [[호위사령부]]) 소관으로 상주 경비대원은 140명이었고 김일성이 특각에 올 때는 기동대원 500여명이 따로 따라 붙었으며,[* 그러나 김일성이 그렇게 신변 안전에 신경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창성특각은 야산특각과 고산특각, 수영장, 산책로, 선착장, 동·식물원 등의 시설들도 있었으며, 방사선 차단을 위해 지붕에 납이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701220070529461|#]] 또 북한군 대좌(한국으로 치면 [[대령]]) 출신이자 북한의 전직 해외 군수담당 조달요원이었던 김정률[* 1935~, 1994년까지 20여년간 [[오스트리아]]를 위시한 유럽 지역에서 김일성 일가를 위한 물자 조달을 담당했지만,(그가 서유럽에서 구매한 제품 중 무려 80%가 독재자 가족 주위 사람들에게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후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고 믿은 나머지 1994년 10월 18일부터 죽은 척 가장하고 오스트리아의 외진 곳에서 '에밀'이라는 가명으로 한동안 숨어 지냈다고 한다. 참고로 김종률은 북한 주민들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자가 사치스럽게 사는 것은 옳지 않다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왔으며, 처음에는 젊었을 적에는 북한 체제에 대해 희망을 품어왔으나 후에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고는 깊은 배반감을 느낀 나머지 음식점에서 김일성, 김정일과 관련한 말이 나오면 소리를 지르며 '그놈한테 반드시 핵폭탄을 던져야만 할 거요.'라고 외칠 정도로 김일성을 마치 악마와도 같은 존재처럼 여기며 증오하게 되었다.][* 덤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김정률은 숨어 살면서도 부자 나라에서 사는 만큼 먹고 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사과 한 개를 들고 "나는 매일 과일 한 개를 먹습니다. 북한에서는 대부분의 장관들도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 아주 소수의 지도부만이 차지하는 이것이 도대체 어떤 빌어먹은 놈의 체제란 말입니까? 도주자가 장관보다도 더 잘 먹는다면,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도망자인 나는 그 체제를 이겼습니다."라고 '독재자를 고발한다' 저자들에게 말했다. 사실 북한에서는 "'''[[평양]] 시민들에게''' 남새(채소)와 과일도 신선한 것을 늘 떨구지 말고 공급하여야 합니다."라는 [[김정일]]의 말에 따라 평양 시민들에게 사과를 공급하고 있기는 한데, 문제는 선전 사진에 나온 사과들이 죄다 설익은 사과들이다.]이 2010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한, 김일성 부자의 사치 생활을 폭로한 책 '독재자를 위하여'[*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에 '독재자를 고발한다'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다.]에 따르면 김일성은 외국 음식만을 먹었고, 북한의 요리사들을 유명 요리학교 3곳과 오스트리아의 유명 레스토랑에 보내 직접 '가장 좋은 요리법'을 배우게 하기도 했으며,[* 묘사에 따르면 김일성의 수행원들에게 제공된 음식은 그들이 이전까지는 결코 먹어 보지 못했던 '맛 좋고, 영양이 풍부하고, 기름지고 무엇보다도 양이 많은' 음식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김일성은 그보다 훨씬 질 높은 음식을 먹었을 것이며, 김정률이 언급한 요리로는 '아주 고급스런 소스'와 '가장 연한 송아지고기 구이', '비싼 치즈', '값비싼 와인'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는 외국 음식 공급을 전담하는 수행원까지 있었고, 그가 가진 수십 채의 초대형 저택들은 모두 커다란 샹들리에[* 큰 샹들리에는 무려 '''24m'''나 되었다고 한다.]와 비단 벽지, 비단 양탄자, 값 비싼 타일, 조명, 위생 설비, 고급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고, 이 빌라 가운데 몇 채는 지하에 건설돼 있었으며 핵 공격에도 견뎌낼 수 있는 환기 시스템을 갖춘 곳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황장엽]]이 [[평양]] 지하 300m 지점에 '샘물과 풀까지 있는', '북한의 지도층만을 위한 딴 세상'이 존재한다고 밝힌 바와 일치한다.] 덤으로 김일성의 동굴형 주거 복합 건물 최소 2개에는 원자력 방사선을 막아 주는 통풍 설비[* 기계공학자였던 김정률이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김정률은 오스트리아 망명 중에도 스스로 [[잠수함]]을 설계할 정도로 유능한 기계공학자이기도 했다.]도 설치되었다고 한다. 김일성 일가의 별장들은 거의 '오스트리아식' 주택들이었으며, 벽과 천장들을 제외하고는 수없이 많은 '메이드 인 오스트리아' 제품이 설치되었다는데, 실제로 김일성의 별장 내부는 문들과 알루미늄 창문들, 녹슬지 않는 특수 수도관[* 이를 북한에 들여오는 데에 무려 50개 이상의 컨테이너가 필요했다고 한다.]이 다 오스트리아산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은 '자본주의 자가용'인 방탄 [[메르세데스-벤츠 600]]을 위시한 수백 대의 벤츠와 포드, 캐딜락, 시트로엥 등 호화 차량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던[* 김일성은 중소관계 악화 이후 서방 외래품의 성능을 알기 전까지는 소련제 자동차를 선호했다고 한다 김정률이 보위부에 합류한 1970년대 초 기준으로 대략 1000대의 자동차를 보유했다고 한다.] 자동차 애호가였으며, 크고 육중한 리무진을 좋아했고, 1990년대 초에 벤츠 200 북한판 버전을 만들라고 지시하기도 했으며,[* 물론 겉보기만 똑같았지 차체는 흔들리고, 래커에 기포가 생기고, 내부는 더욱 처참한 데다가 몇 미터도 가지 못하는 한마디로 고철덩어리 수준이었으며, 북한 내에서는 '100미터 미인'으로 비유되었다. 그런데도 당 지도부의 의원들은 이 고철덩어리를 [[짬처리|한 대씩 의무적으로 가져야 했다.]]] 틈만 나면 차 안에 침대를 설치하거나 '절대로 소음이 없는 운행'을 하도록 요구해야 해서 김정률 등은 김일성의 차를 수리하기 위해 차를 부품별로 해체해 수리했다고 한다. 또 경비행기 수집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미녀들이 쌀 알갱이를 일일이 검사하고 기차 여승무원으로써 김일성에게 차와 음식을 접대하는 것도 김일성 시절부터 있던 일이며, 물론 김정률 등 김일성의 보좌관들도 독일제 냉장고와 일제 TV 등을 사들였다.[[https://007nis.tistory.com/15857781|#1]]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058635|#2]] [[https://imnews.imbc.com/news/2010/culture/article/2671439_30980.html|#3]] 다만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생활 폭로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보니 국내에서 김정률의 책의 인지도는 낮다. 심지어 김일성 [[장수연구소]]로 알려진 기초의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1998년에 탈북한 한의사 석영환(1964~)이 2004년에 출판한 책 '김일성 장수건강법'에 따르면 김일성이 쓰던 이불은 70만 마리의 [[참새]]의 턱 밑 잔털을 모아 만든 것이었으며,[* 다만 [[황장엽]]은 이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부인했다.] 침대에는 각 신체 부위가 닿는 곳마다 몸에 좋은 약재를 넣어 놓았고, 베개는 32가지 한약재가 들어간 '신선베개'를 사용한 데다가 딱딱한 시멘트 바닥을 밟고 다니면 뇌와 관절에 충격이 가해져 수명이 짧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반영해 별장의 바닥엔 반드시 푹신한 카펫을 깔았다고 한다. 그리고 석영환은 김일성이 17세~20대 초반의 어린 소녀들을 [[기쁨조]]로 부리며 기쁨조 두세명을 동행하며 자신을 즐겁게 하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도 한 번씩 웃을 때마다 뇌세포가 활성화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김일성 장수연구소'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김일성이 먹는 [[사과]]도 그냥 사과가 아닌, '''사과 뿌리 부근에 겨울에는 누런 강아지를, 봄에는 개구리를 묻어 양분으로 삼게 한 특별 사과였다고 한다.'''[[http://jinhae.kccf.or.kr/home/main/madang.php?mode=view&menuinfo_code=free&content_idx=78673|#]] 다만 아들인 김정일의 매우 사치스러운 식습관이 세부적인 부분까지 잘 알려진 것에 비해 김일성의 식습관은 알려진 부분이 많지 않다. 우선 김정일이 집권하던 시기는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대인 만큼 김일성이 생존하던 시절에 비해 매체가 더 발달하였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준 [[후지모토 겐지]]와 같이 이를 증언하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더 많다. 그래서 김일성보다 더 잘 알려진 것. 사실 김일성의 식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아니라 김정일의 식생활이 유난히 상세하게 알려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김일성의 경우 상술한 것처럼 진귀한 음식을 먹었다는 증언도 있는 데 반해 된장과 같이 [[콩]]으로 만든 음식, [[개고기]], [[고래고기]], [[평양냉면]], 삼삼탕[* 三蔘湯, 갈비탕&삼계탕에 전복, 산낙지, 수경삼 등을 넣고 끓인 요리.]을 자주 먹었다는 식의 증언도 있는 등 교차검증이 잘 안되는 편이다. 다만 적어도 육식 위주로 식사를 했다는 것과[* 실제로 [[1951년]]에 작성된 [[CIA]] 보고서 '김일성 배경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은 주로 육류를 선호하며 생선류와 채소는 거의 먹지 않았고, 닭고기와 함께 요리된 개고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매일 아침, 저녁마다 먹었을 정도였고, 와인을 선호했지만 음주량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http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889819|#]]] 확실히 김정일에 비해 소박한 입맛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한데, 성장 배경과 젊은 시절 행적을 보면 적어도 아들처럼 산해진미를 맛보면서 자랐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때문에 집권 이후, [[박정희]]처럼 [[농촌]]을 방문하면 [[농부]]들과 어울려 소박한 세참을 아무 거리낌없이 먹기도 하는 모습 등도 보였다. 사실 [[미식가]] 항목에 나와 있듯 특출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독재자, 기업가들은 아무리 사치를 부리더라도 식생활만큼은 소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김일성처럼 전통음식과 호화음식을 모두 즐긴 [[모부투 세세 세코]]가 특이 케이스일 정도. (김정일과 김정은은 어릴 때부터 지도자의 자식으로 살아온 2세대 독재자니 논외.) 또 김일성은 1982년 자신의 칠순 생일잔치를 위해 260병의 위스키 면세구입 신청서를 주스웨덴 북한 대사관을 통해 스웨덴 의전실에 제출했다가 '수량 과다'로 거절당하기도 했다.[[https://m.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6648&Newsnumb=2019046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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