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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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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 [[1932년]]: [[대공황]]의 혼란을 틈타 === ||<tablealign=center><width=700><tablebgcolor=#ffffff><tablebordercolor=#000><nopad> [[파일:나치당 당원.jpg|width=100%]] || ||<bgcolor=#000000><color=#fff> ''1930년 [[아돌프 히틀러|{{{#fff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 당원들'' || >'''Arbeit, Freiheit und Brot[br]노동, 자유[* 개인 단위의 자유가 아닌 (1차대전 승전국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빵''' 나치당 초기의 [[http://www.bc.edu/bc_org/avp/cas/his/CoreArt/prop/ns_farmer.html|선거 포스터에 써있던]] 표어이며 당시의 궁핍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배후중상설]]까지 믿고 있던 대다수 독일 민중들을 꾀는 데 이보다 가장 적합한 선거구호는 없었다. 출소 이후 [[아돌프 히틀러]]는 몇 달 간 시골로 돌아가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 대선에서 그를 지지하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대선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뒤 정계로 돌아왔다. [[돌격대]]의 폭력 시위와 정치 투쟁이 계속되고, 아돌프 히틀러는 국민들의 좌절감과 갈 곳 없는 분노에 방향을 제시했다. 집권 전이나 후에나 나치당의 일관적인 정책은 인종정책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독일 국민들이 [[반유대주의]] 자체에는 공감하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정당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나치당의 지지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나치당은 지지율은 미약했지만 도시 지역에서는 돌격대의 숫자와 조직이 늘어났고 농촌의 농민단체와 군에는 나치 과격분자들이 잠입하여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1928년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자 이러한 조직력은 사회 불만과 합쳐졌고, 독일 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녔던 우파 정당의 지지층도 같이 흡수하면서 세를 급속히 확장한다. 한편 겉보기에 이념상 나치당의 반대편에 섰지만 바이마르 체제의 붕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독일 공산당]] 또한 대대적인 약진을 시작했다. [[1929년]] [[월가]]의 주가 폭락 이후 세계경제가 [[대공황]]으로 파탄이 나면서 [[1928년]] 12석였던 나치가 [[1930년]] 선거에서는 104석(제2당)이 되었고, 공산당도 81석으로 역시 부상했다. 온건 좌파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 지지자들은 폭력혁명과 바이마르 체제 절멸을 부르짖는 공산당에 부정적이었고 독일 내 자유주의 성향 지지자나 독일 내 80%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을 선택하느니 나치당을 선택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1932년 선거에서 공산당은 89석을 차지하지만 나치는 그때 196석 즉, 제1당이 되었다. 극단적인 경제, 사회적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결국 [[정치극단주의]]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고 온건 및 중도적인 사상보다는 좌우로의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10여년처럼 [[자유주의]] 우파 정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좌우 [[대연정]]을 꾸민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서로 체제 절멸과 체제 전복 드립이나 치는 나치당과 공산당 의석 수를 합치면 과반이라 기존 정당 사이에선 연립정부가 들어설 수 없게 되었다. 나치당은 자기네들 위주로 정권 잡기 위해, 공산당은 나름대로 정치 불안이 장기화 되면 체제 전복이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 성립하는 내각마다 불신임안을 냈다. 독일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이 제시한 '상호 불가침' 원칙을 맹렬하게 거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적 파시즘이다'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독일 사민당을 공격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근본적으로 공화국을 부르주아 체제의 산물로 혁명 대상이라고 보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키려는 건 사민당과 [[독일 중앙당]] 등 중도적 정당이나 몇 안 되는 자유주의 정당들 정도.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비례대표제]]로 인해 군소 정당이 난립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나치당은 국회 내에서 37%를 차지하였을 뿐이지만 압도적인 원내 1당이며 또 다른 공화국 체제의 반대자 공산당을 합치면 과반수였고 이들은 모든 정부를 불신임할 작정이었다.[* 브뤼닝 내각에서는 공산당의 발의한 불신임안을 나치가 찬성했다가 사민당의 거부로 부결되었고 파펜 내각에서는 모든 정파가 협조해서 압도적인 차이로 불신임안이 채택된다.] 거기다 히틀러는 정권을 넘기지 않으면 40만의 돌격대가 봉기할 것이라고 하였다. [[극우]]를 비롯한 우익 계열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회의적이었고 연합국의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이름의 '강요'로 이뤄진 체제로 인식했다. [[극좌]] 공산당은 나치가 부상하자 혁명론과 반자본주의 성향이 자기들과 비슷하다고 판단했고, 또한 나치는 [[융커]] 보수주의 우파들의 하수인이므로 큰 위협이 아니라 판단했다. 우파 입장에서도 전통적인 독일 우파인 종교계, 토지 귀족, 군대는 민중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신흥 부르주아 계층는 강력한 우파 정당을 원했으므로 아돌프 히틀러의 합법적 정권 추구 선언 이후에는 나치당을 이용하는게 안전해졌다고 판단했다. 히틀러의 집권은 바이마르 체제의 모순, 경제난, 히틀러 본인의 정치력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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