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1919년]] ~ [[1923년]]: 창당 초기와 아돌프 히틀러의 가입 === 1919년 [[극우]] 인사인 [[안톤 드렉슬러]]의 주도 하에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eti, DAP)'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였다. 당시 [[독일 제국|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과 함께 동맹국 진영을 결성하고 협상국에 맞서다 패전한 나라였고, 협상국 측의 요구로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면서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 책임을 떠안게 된 상태였다. 또한 패전과 함께 [[빌헬름 2세]] 황제를 중심으로 한 [[독일 제국|제2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막 출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패전국으로서 경제와 사회 각계에서 혼란과 불안이 고조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안톤 드렉슬러]]가 [[바이마르 공화국]] 남부 [[바이에른]]주[* [[바이에른]]주는 당시 [[독일]] 남부의 중심 지역으로,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한 독일 통일 이후에도 독립적인 지역색이 워낙 강했던 탓에 재정과 치안 등 여러 행정 분야에서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다만 당시 [[독일]]에서 이러한 지역별 특색은 [[바이에른]]만 강한 것이 아니었으며, [[뷔르템베르크 왕국|뷔르템베르크]]주나 [[작센]]주 등도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뮌헨]]시에서 [[반유대주의]]·[[대독일주의]]를 표방하는 소수의 우익 인사들을 모아 창당을 선언한 것. 창당을 주도하고 초창기 당을 이끈 드렉슬러는 원래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던 사람이었으나, [[독일 조국당]](DVLP)[*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활동한 우익 정당. [[카프 폭동]]의 주동자였던 [[볼프강 카프]]가 창당한 정당이다.]에 가입해 당원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고 이 경력을 살려 [[고트프리트 페더]], 디트리히 에카르트 등 우익·극우 성향의 지인들과 함께 창당을 완료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말이 정당이지 실질적인 정치력은 하나도 없는, 그저 세상 돌아가는 꼴에 불만이 많은 중년 아저씨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출범 후 곧바로 이어진 사회 혼란상 속에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자 우후죽순 난립하기 시작한 수십 수백 개의 군소정당들 중 한 곳에 지나지 않았으며, 당원도 몇십 명에 그쳐 웬만한 군소정당들보다도 규모가 작았다. 창당은 했으나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자 이들은 불만을 아무 데나 표출하며 극단적이고 과격한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다른 여러 군소정당들이 주목을 받고자 벌이던 일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렇듯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듣보잡]] 정당으로 겉돌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나 싶었는데, 당에 뜻밖의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공화국 [[국가방위군]]의 카를 마이어 대위가 [[바이에른]]주에서 활동하는 여러 정당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허튼 짓 못하게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해 각 당에 병사들을 파견한 것. 그리고 이 [[독일 노동자당]]에 조사 및 감시역으로 파견된 병사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한편 이후 군에서 예편한 카를 마이어는 잠시동안은 독일 노동자당에 우호적이었지만, 곧 이들에 환멸을 느끼고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에 입당해 반나치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가 사실은 군에서 파견한 프락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공개해서, 히틀러 동조자들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 결국 독일 노동자당이 집권한 다음 프랑스로 망명을 했으나, 게슈타포에 붙잡혀 1945년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파견 임무를 하달받고 당에 잠입한 히틀러는 고만고만한 이들이 되도 않는 불만을 구시렁구시렁 털어놓는 걸 조사하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을 하고 있나" 싶어 열이 뻗쳤고, [[내가 직접 나서겠다|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연단에 올라 일장연설을 했다]]고 한다. 즉석 연설을 한 당일 히틀러의 눈에 비친 [[독일 노동자당]]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별 시덥잖은 놈들이 영양가 없는 소리로 웃기고들 있네"였던 모양. 그는 이날의 행적을 기록한 자신의 일기에 "당 기금이라는 것이 용돈 수준인 놈들이, 황송하게도 나를 받아주시겠단다."라고 쓰며 비웃었다.[* 히틀러는 세무서장으로 일했던 아버지의 유산과 연금을 물려받았기에 최소 [[중산층]] 수준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으며, 광고와 엽서에 쓸 그림을 그려 판매하면서 돈을 벌었기에 당시 은행원의 평균 월급보다 더 많은 수익을 얻기도 했다. 그런 성장 배경을 지닌 히틀러가 보기에 [[독일 노동자당]]의 기금 운용은 우습기 짝이 없었던 것.] 여하튼 이날 히틀러의 즉석 연설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의 발군[* 히틀러는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려 판매하면서 돈을 벌던 시절 노숙자들과 친해졌는데, 심심풀이로 그들 앞에서 연설하는 상황을 자주 연출해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었고, 당원들은 연설에 매료되어 히틀러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히틀러 역시 전망이 어두워지는 군생활[* 히틀러가 개인적으로 군복무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기보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바이마르 공화국]]에 군축 압력이 들어오며 많은 군인들이 반강제로 전역하던 당시 시대상 때문에 전망이 좋지 않았다. 군에 남은 이들도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병력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인사 적체에 시달렸다.]을 지속하는 것보다 당에서 연설하고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적성에 더 맞는다고 판단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원으로 정식 입당했다. 즉 '''당에 잠입해 조사와 감시를 하라고 보낸 놈이 덜컥 당원이 되어버렸다.''' 복무하던 군부대의 상관들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었겠지만 히틀러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정식으로 당원증을 교부받았다. 그의 당원 번호는 555번[* 555번째로 입당한 당원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사실 [[독일 노동자당]]이 미약하기 그지없는 당 규모를 뻥튀기해 당원 수가 많아보이게 하려고 당원 번호를 501번부터 시작하도록 해놓은 것이어서 55번째로 입당한 당원이다.]이었다.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히틀러는 자신을 어느새 추종하게 된 당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실상 당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게 된 셈. 창립자이자 초대 당수였던 [[안톤 드렉슬러]]는 당내 권력의 중심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강하게 반발하며 히틀러를 맹렬히 비난했으나, 히틀러에게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당한 뒤 1921년 당수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히틀러는 곧바로 그의 뒤를 이어 제2대 당수가 되었고, 드렉슬러는 실권 없는 당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지내다 1923년에 탈당했다.[* 다만 드렉슬러는 약 10년 뒤, [[나치 독일]] 체제가 수립되는 1933년에 복당했고 별다른 당직을 맡지 않은 채 살다 1942년에 사망했다.] 히틀러를 신임 당수로 추대한 뒤 당은 일사불란하게 그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로 재정립되었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 제국]]군으로 참전해 [[철십자 훈장]]을 받은 수훈자이자 유공자였고, 장교나 부사관이 아닌 병 출신이었기에 중산층과 서민층의 인기를 끌 만한 대중성과 소구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광적인 연설 능력[* 히틀러의 연설 기술은 대단한 수준으로 지금의 선전, 선동의 기본을 확립했다. 물론 이 시절에 이미 완성된 건 아니고 10여년 이상 선동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엄청난 연구와 경험을 통해 완성해낸 것이다. 그래도 상술된 대로 놀고 먹던 시절에도 연설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시작했던 상황이라 기본 능력은 있었다. 또한 발전한 것도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괴벨스 등의 지원이 있긴 했겠지만.]은 청중을 홀리기에 손색이 없었으며, 이는 혼란한 사회상 속에 불평불만이 누적되어가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흉흉한 분위기에 힘입어 일반 시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당수가 된 뒤 히틀러는 당명 '[[독일 노동자당]]'에 '민족(National-)'을 덧붙였고, 당시 우익 조직 [[돌격대(나치 독일)|돌격대]][* 창설 당시부터 나치의 산하 조직은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에서 활동하다 입당한 뒤 당직을 맡게 된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회주의(-sozialistische)'도 추가했다. 이에 따라 비로소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SDAP)'''이라는 당명이 탄생하였다. 또 단순한 녹색 동그라미에 당명 이니셜을 새겨넣은 로고를 '''[[하켄크로이츠]]''' 문양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대다수가 아는 '나치'당의 이미지는 사실상 이때 첫 발을 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히틀러가 당권을 막 잡은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들의 당세는 여전히 미약한 군소정당에 지나지 않았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