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공산주의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현실 공산주의에서의 재산 ==== 현실 사회주의, 예컨대 1단계 공산주의(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의 단계인 소련 체제는 개인에게 재산 소유와 양도, 상속을 실질적으로 보장한 체제였으며, 심지어는 부동산의 획득, 거래, 양도도 사실상 허용하였다.[* 다만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는 개인의 토지 영구 소유를 허용하는 경우보다는, 토지를 국가나 그에 준하는 조직의 영구 소유로 정의하되, 길게는 수십 년 단위의 지상권이나 거주권의 유통을 인정하는 것이 흔하다. 경제 면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많이 받아들인 지금의 중국, 베트남이 그런데, 거래할 때 '임대' 말고도 '매매'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대한민국이나 미국의 토지 매매에 수반하는 권리 이전과는 다른, 제한적인 권리가 이전된다. 토지는 대표적인 생산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생산 수단(Die Produktionsmittel)은 대체로 공공의 소유물로 전환되었다. 생산 수단은 좁은 의미로는 노동력을 투여해서 인간이 원하는 노동 생산품으로 전환되는 재료들인 노동 대상(Die Arbeitsgegenstände)과 도구나 기계 등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가 사용하여 노동 대상을 노동 생산물로 전환하게 하는 노동 수단(Die Arbeitsmittel)을 가리킨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생산 행위를 가능케 하는 모든 물적 기반을 가리키기에, 자본금과 그 자본에 얽매인 작업 공간, 원자재, 작업 수단, 운송 수단 일체를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물론 소련 성립 이후 [[암시장]]의 존재는 단 한 번도 제거되지 않았기에 소규모로 이뤄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거래(특히 농산물 분야)는 줄곧 기능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와 실제로 노동을 담당하는 자를 분리시킨 채, 오로지 이윤 증산만을 목표로 무정부적인 경쟁을 가동시키는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을 폐지하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농민들이 소유한 토지 역시 생산 수단의 하나로 상정되면서 강압적인 집산화 정책이 추진되고 말았다.[* '혁명'을 농민은 소작농에서 자기 경작지를 가진 자작농으로의 진화로 받아들였지만, 당시의 공산주의 혁명은 농민을 노동자로 승격시키고 생산 수단인 토지와 생산물을 공유하며,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중앙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자는 취지로 농업에 접근했기 때문에 지주에게서 박탈한 토지 소유권은 국가에 귀속되었지 농민에게 증서로서 분배되지 않았다(이것은 훗날의 북한도 같다). 농민 입장에서는 지주가 중앙 정부로 치환된 것처럼 여겨서, 구소련 초기에는 집단화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투기를 가능케 하는 일체의 거래 행위, 즉 주식, 투기를 목적으로 하는 부동산 점유, 고리대금업, 광고 등의 행위들도 비슷한 논리로 억압되었다. 정리를 하면, 소련은 개인 재산(личная собственность, personal property)은 보장했지만, 자본의 재생산과 부가적 가치 창출을 위한 일련의 개인적인 자본 활동을 가능케 하는 사유 재산(частная собственность, private property)은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현실 사회주의의 대중은 개인 재산을 획득하지 못함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내가 돈을 벌었는데 마땅히 쓸 데가 없다"'''는 성토를 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를테면 소련, 동독 등은 중공업 위주의 경제 정책을 발판으로 자금줄을 불린 뒤에 이를 주거, 의료, 식료품 등을 보장하는 정책에 투자했다. 또한 NEP 시기의 소련과 스탈린 정권은 스포츠 리그와 대중 체육 분야에 투자하고 국민들의 체육 활동을 장려했다. 그리고 스탈린 정권은 노동자들의 심기 관리를 위해 샴페인, 보드카, 와인 같은 주류와 캐비어, 초콜릿 같은 기호품 등을 공급하고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별도로 향수와 화장품 등을 공급했다. 심지어는 5개년 계획으로 온 나라가 바쁘고 외국에서 생산재와 각종 기계 설비를 수입하는 상황에서도 화장품과 향수 생산용 에탄올을 대량으로 수입했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는 이전보다 소비재의 생산과 공급, 품질에 더욱 신경을 썼으며, 리베르만-코시긴 개혁 시기에는 소비재와 소련 인민들이 늘 부족하다 생각했던 축산품의 공급을 위해 미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서방 국가의 대기업들과 접촉해서 소비재 생산 기술과 축산업 기술을 확보했으며 심지어는 서방에서 유행하는 패션의 종류, 최신 패션의 동향을 살피고 서방 패션업계와 접촉해 정보를 교환했다. 또한 브레즈네프 정권은 막대한 오일 머니를 이용해 각종 사치품과 기호품 등을 수입해 인민들에게 공급했다. 하지만 좀 더 다원적이고 고급스런 소비를 원하는 대중의 욕구는 커져만 가는데, 현실 사회주의 경제가 내놓은 생산품들은 양과 질에서 이런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대표인 소련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육성하고 각종 연구 기관과 학술 단체, 자문 위원회를 구축했으며 고스트 같은 생산 기준까지 만들었지만, 인민들의 욕구와 수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게다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같은 대도시들은 연방 정부가 신경을 썼기 때문에 재화 공급이 잘 이뤄진 편이었지만, 지방 도시와 농촌 지역은 공급 순위에서 밀려 재화의 수량과 다양성이 부족했다. 실제로 [[소련]], [[동독]] 등의 대중은 당 관료가 많이 벌고 재산을 불려서 부패한 놈들이라고 분노하기보다는, 당 관료들이 고급 상품이나 해외 수입품들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에 더 분노했다.[* Stephan Merl, Staat und Konsum in der Zentralverwaltungswirtschaft, in: Hannes Siegrist, 외(편), Europäische Konsumgeschichte, Frankfurt, 1997, 205~241쪽.] 소련에서 최대 빈부 격차는 1:6 정도였으며 위험성이 높은 일을 하고 성과가 좋다면 광부가 당 간부보다 더 많은 임금을 수령하기도 했다. 위 문단에서 언급하는 사치품과 기호품 등도 당 간부, 관료들이 우선권을 갖고 있거나 해당 재화를 취급하는 상점이 제한적이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문화생활을 하려고 해도 죄다 제국주의 문화라며 검열, 규제하는 통에 인민들이 즐길 거리라곤 재미없는 선전 선동 예술 작품들뿐이었다고 평가하는 잘못된 비난을 퍼붓는 경우도 있다. 이는 북한을 공산 국가의 전형으로 생각한 것 때문에 빚어진 오류다. 예를 들어 소련의 초기 TV 방송은 재미없는 선전·선동 예술 작품이 아니라 제대로 된 클래식 음악 방송, 다큐멘터리, 교육 프로그램, 과학 및 인문학 프로그램, 뉴스, 소련 정부 관련 프로그램, 아동용 방송, 스포츠 경기와 퀴즈 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재미없는 방송들로 도배해서 퀴즈 쇼가 소련 최대의 예능 프로그램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방송들이 선전·선동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방송을 편성한 것은 TV를 선전용으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크렘린의 보수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적으로 오테펠(해빙)이 이뤄져 즈다노프주의가 사장되고 스탈린이 격하되었음에도 사고가 경직되어 있던 소련 수뇌부들은 소련 인민들이 서방의 천박한 자본주의자들과 달리 음악과 고차원적인 학문, 예술 등을 즐기는 고풍스런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거나, 또는 이미 그러한 교양인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TV 쇼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저급 서커스로 생각해 이러한 방송을 일부러 배제해 버렸다. 그러나 초기에만 이런 식이었지 60~70년대가 되면 다양한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TV 쇼, 코미디 프로그램 등을 방영했다. 소련의 TV 방송에서 문제가 된 것은 성적 묘사를 금기시하거나 체제 비판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등 검열을 심하게 한 것이었다. 특히나 여기에는 방송 부문을 통제하던 라핀이 악영향을 미쳤는데, 소련의 유명 가수가 마이크를 입에 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라핀이 여자가 마이크를 입에 대고 노래 부르는 것이 구강성교를 연상시킨다고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부르라고 지시해서, 다음 음악 방송부터 갑자기 여자 가수들이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라핀과 소련 수뇌부의 보수주의, 검열은 심한 편이었다. 문학과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부문에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요해 많은 예술가들이 소련을 탈출하거나 체제 선전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했지만, 소련 시기의 문학과 음악은 선전·선동용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예술성이 높았다. 록 음악과 재즈 음악도 허용되어서 음악 페스티벌도 열렸으며 공장마다 밴드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마추어 밴드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소련의 영화 산업은 세계적인 수준이었으며 저렴한 티켓값 덕분에 소련인들에게 영화 관람은 일상이었다. 농촌도 집단 농장을 단위로 소규모 도서관과 영화관 등의 문화·여가 시설이 운영되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문화에 제기할 문제점은 강한 검열이었다. 해빙기 이후에도 소련 정부는 검열을 강하게 유지해 체제 비판적인 작품은 검열해 버렸고 예술가들의 활동도 제한해 공식적인 단체에 등록하지 않은 예술가들은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활동을 철저히 통제했다. 소련에서 탄압받았다는 가수와 록 밴드들도 이런 '미등록 음악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문화·여가 시설은 주택이나 필수적인 인프라 시설에 비해 건설 중요도 순위가 낮았기 때문에 신청한 아파트가 지어졌단 소식에 이사했지만, 문화·여가 시설은 건설되지 않아서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인민들이 원하는 카페, 식당, 바, 클럽, 펍 등은 수요에 비해 부족했고 유흥업은 음성화되었다. 따라서 소련을 기준으로 할 때에 사회주의 예술과 문화를 선전·선동용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고 부적절한 비난이며 강력한 통제와 검열, 수뇌부의 보수성을 비판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