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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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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 [include(틀:한국의 정부수립 이전 정당)] 해방 후 한반도가 38선으로 갈리고 조선공산당 본국은 남한에 있었고, 북한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치되었다. [[조선공산당]]은 대중으로부터는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최대 정당이 되었고 노동운동으로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 두어 조직력이 독보적이었다. 조선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지금은 사회주의혁명의 단계가 아니며 부르주아와 손잡고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중앙이 공식 채택한 8월 테제는 무엇보다 사회주의 세력의 전통적 혁명론을 수정하여 평화혁명론, 곧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전략을 구체화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 세력의 일반적인 혁명노선은 무장봉기 노선이나 폭력혁명론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세력의 전략전술에서 평화혁명론의 가능성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부정되어 왔지만,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혁명이행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평화혁명론은 기존의 전통적인 무장봉기전략을 철회하고, 평화적인 방식의 국가건설 전망을 도출하는 근거가 되었다. >(중략) >평화혁명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선거주의 이행노선에 가까웠다. 실제로 사회주의 세력은 정부수립의 방식으로 선거를 고려하고 있었다. 곧 인공수립이나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의 마지막 절차도 총선거였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2005, p55~57 >사회주의혁명의 과업과 성질을 운운하는 것과 같은 극좌적 경향과 싸워야 한다. (중략) 우리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중요 과업(완전 독립과 토지 혁명)을 완전 해결은커녕 이제 시초의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후략)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8월 테제 그러나 이후 [[좌우합작운동]]에서 박헌영은 여운형과 입장차이를 보이면서 심하게 다투었다. 박헌영은 미국이 공산당 계열을 고립화시키려는 전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좌우합작을 반대했고 실제로 고립화 전략이 맞았다.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축소 내지 고립화되어야 함 >공산당은 1/16~2/16의 역할을 갖게 하거나 고립화 >---- >과도입법기구안[[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71704036&referrerCode=0&searchKeyword=%EA%B3%A0%EB%A6%BD%ED%99%94|#]] >좌우합작은 비록 공산당의 고립화 전략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이승만•김구로 대표되는 이른바 극우세력을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략) 중간파가 주도한 합작운동은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극좌극우를 대체하는 대안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주의 입장에서는 실현가능성이 낮았다. 무엇보다 좌우합작운동을 대리하고 있는 김규식•여운형의 힘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극우극좌세력에 지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중략)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사회주의세력이 배제된 중간파 집단의 대표성을 소련이 수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85~186 이전부터 여운형 등 좌익 고위 정치인은 수차례 [[방북]]하여 소련 인사와 김일성과 논의하였는데 소련은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좌익 통합을 원했다. 박헌영, 김일성, 소련이 같은 입장이었다. 김일성은 직접 좌익 정당 통합을 하라고 여운형을 설득했고 여운형은 본래 좌익 정당 통합에 반대했으나 김일성에게 설득당해 남로당을 만든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귀하와 박헌영, 백남운 및 기타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하에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 >김일성의 이 발언은 여운형의 아픈 곳을 건드렸습니다. 여운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며 한참 만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합당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로동당으로 합당할 것이다. 남조선으로 돌아가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완수해 낼 것이다. 나는 로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우리 당은 남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당이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나를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9월 총파업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한 결과를 보고 있다.” >---- >로마넨꼬가 스티코프에게 보낸 편지 중[[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fs&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fs_010r_0010_0050_0010&position=-1|#]] >김일성이 입법기관 참여에 대해 반대하자 여운형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여운형)는 "미국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 그들을 치는 화전양면 전술을 당의 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며 북로당이 반대하면 입법기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당신이 좌익들로 하여금 입법의원에 참가하지 않도록 충고한다면 나는 거기에 들어가지 않겠다. 서울로 돌아가서 남로당 창당을 위해 일하겠다. 만일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남로당을 창립할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의 당명 아래서 그것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근로인민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전당대회에서 당의 이름을 정하면 될 것이다." 이후 두 사람(여운형과 김일성)은 소련의 세계정책과 조선문제 해결과정에서의 역할 등에 논의했다. 두 사람은 "조선은 소련의 원조 하에서만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합의했다. >---- ><로마넨코의 보고서> (인용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197의 번역임.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fs&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fs_010r_0010_0050_0010&position=-1|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 >여운형: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넨꼬: 어떻게 해방이 안 됐습니까? >여운형: 해방이라고 되기는 했지만 미국인들로부터 다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넨꼬: 왜 그렇습니까? >여운형: 최근 남조선의 반동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fs&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fs_010r_0010_0050_0020&position=-1|로마넨코 소장과 여운형의 미소공위 재개문제 논의]] 김철수, 강진, 서중석, 이정윤, 김근, 문갑송 등 공산당 대회파는 남로당에 대항해 [[사회노동당]]을 만들였으며 여운형은 사회노동당에 이름은 올렸지만 박병엽 증언을 봐도, 스티코프 일기를 봐도 사회노동당과는 선을 그었음을 알 수 있다. 여운형은 사로당을 해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여운형이 김일성•김두봉에게 보낸 편지(1946.11.30) >---- >내가 11월 16일에 보내 편지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하는 그 보고사항의 연속입니다.(중략) 나는 좌익진영의 통일이 중요한 문제이며 당내 파쟁을 중지시킬 최선의 방법은 사회노동당을 해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의 지도분자인 몇몇 은퇴한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당으로 복귀할 것입니다. (중략) 강진과 백남운은 합동에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끝까지 싸울 테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15 여운형과 김일성의 의도와 달리 사로당 관계자들이 남로당과 갈등하자 김일성과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근로인민당]] 창당으로 대응하였다. 즉, 사로당의 공산당 대회파가 남로당과 계속 갈등하여 좌익 통합이 안 되니까 여운형을 중심으로 뭉치는 근로인민당을 만들어 좌익 통합을 하라고 김일성이 여운형을 설득한 것이다. >김일성은 백남운에게 사로당에서 탈당한 뒤 남로당으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재집결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이미 했었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백남운과 공산당 대회파 출신의 이영, 나아가 장건상같은 중도세력까지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로당 지도부는 여운형에게 사회노동당을 완전히 해체한 바탕 위에서 몽양이 나서서 보다 대중적인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북로당은 여운형에게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 가운데 종파분자들을 새 당의 중앙간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당 강령에 대해서는 이전의 인민당•신민당 강령의 수준이면 될 것 같다는 의견교환도 있었다. 북로당 지도부는 특히 몽양에게 사로당의 공식 해체과정을 밟는데 힘써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몽양도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약속을 하였다. >---- >여운형은 사로당 출신들 가운데 남로당에 입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2월 26일에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인민당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을 당에 끌어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북로당이 개입하게 됐던 것이다. >----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26~236 스티코프 일기나 박병엽 증언록을 보면 박헌영뿐 아니라 여운형의 의사결정에도 평양과의 의사교환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로인민당은 북로당이 개입해서 만든 정당이다. 하지만 당시 [[미군정]] 체제에서 공산당 활동이 용이할 수 없었고 남로당의 활동은 큰 제약을 받았다.[* [[대구 10.1 사건]] 참조] [[반공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정부 요직에 있는 상황에서 무자비한 색출이 진행되어 남로당에 호응했던 사람들 혹은 남로당에 몸을 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까지 학살당하거나[* [[여수·순천 10.19 사건]], [[제주 4.3 사건]], [[보도연맹 학살 사건]] 참조], [[월북]]하거나[* 이들은 북한에서 남로당파를 형성했다.] 지하로 숨어 버리면서 남로당은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때 사실상 공중분해되었으며 [[6.25 전쟁]]까지 거치게 되자 수십 년간 국시는 반공이 되었다. 북한은 앞서 중국과 소련 등지에서 활동했고 용공의 입장에 있었던 [[빨치산]] 부대들이 해방 후에 들어왔고 [[소련군정]]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북한도 공산당이 그렇듯이 무수히 많은 파벌이 있었지만 전술했듯이 김일성은 종파주의 숙청 명분을 내세워 김일성주의 아래 빨치산파[* 라고 쓰고 김일성파로 읽는]를 제외한 모든 파벌들을 숙청하여 사실상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해 김일성-김정일을 위시한 조선로동당 유일 체계를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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