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서버 점검 공지
|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내명부 ===== * '''효유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 [[효명세자]]의 정비. 철종이 승하하기 전 흥선군에게 명복의 즉위를 승인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원 역사의 조 대비는 대원군과 손잡고 철종 사후 자신의 남편인 익종의 사후 양자로 고종을 입적시켜 고종의 양모가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수렴청정을 하거나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고종이 의도적으로 조 대비를 극진히 모셨지만[*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때문에 불효하다는 이미지가 생기자 대리 효도 대상이 필요해서 법적인 어머니인 조 대비를 밀어준 것이다.] 본작에서는 철종이 죽기 몇 달 전 고종이 철종의 양자가 되면서 법적으로 큰어머니가 되었다.[* 철종은 전대인 헌종의 7촌 당숙이라 헌종의 조부이자 조 대비의 시아버지인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조 대비의 남편 익종(효장세자)과 철종이 법적으로 형제가 되었다.] [br]원 역사와 달리 본작에서는 명순대비가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효유대왕대비의 신세가 애매해졌다.[* [[선조(조선)|선조]] 때 수렴청정 한 게 법적 큰어머니([[인종(조선)|인종]]비)인 [[인성왕후]]가 아니라 법적 어머니([[명종(조선)|명종]]비)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전례를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인종과 명종은 이복형제고 선조는 명종의 양자다)] 작중 정황을 보면 본래 흥선군은 원 역사처럼 효유대왕대비와 담합했지만, 귀남의 군밤 장사로 인한 나비효과 때문에 귀남이 철종의 양자가 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고 이 때문에 효유대왕대비와 풍양 조씨와의 사이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br]고종의 간택 때 조 대비와 풍양 조씨가 진지하게 간택에 참가했지만 귀남의 수수께끼로 인해 민자영이 왕비가 되면서 애매한 처지가 이어진다. 귀남의 군밤 장사 수수께끼를 보고 당황하는 장면이 소소한 개그. 이런저런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귀남의 성격이 워낙 좋은지라 조 대비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빠질 이유가 없어 귀남과의 사이는 꽤 원만한 것으로 보인다. [br]이후 끈질긴 설득에도 귀남이 도무지 [[후궁]]을 들일 생각을 하지 않자 단념하고 관례를 마친 세자의 국혼을 추진하였는데 "장차 축첩을 금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겁하여 평생 사내를 알지 못하는 [[궁녀]]들 이야기를 꺼내며 부디 재고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귀남은 "그럼 궁녀들의 결혼을 허하겠다"며 축첩 금지를 그대로 추진했다. * '''명순대비 [[철인왕후|철인왕후 김씨]]''' [[철종(조선)|철종]]의 정비. 장동 김씨로 김병학&김병국 형제와 사촌지간이다. 김병학&김병국 형제의 말에 따르면 철인왕후는 순조비 순원왕후와 달리 원리원칙적인 면이 강해 같은 문중이라고 편들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본작의 고종(귀남)은 철종 생전에 철종의 양자가 되어 효유대왕대비가 아니라 철인왕후가 고종의 양모가 되었다. 철종 생전에는 귀남과의 사이가 묘사되지 않지만 귀남이 철종과 사이가 좋았고 귀남과 철인왕후 모두 성격이 무난한 편이라 둘의 사이가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br]철종이 승하한 후 임금의 양모로서 약 1년 동안 [[수렴청정]]하였으며, 고종이 세는나이로 열다섯 살이 되자 관례에 따라 철렴(撤簾)하고 고종의 친정으로 전환되었다. 명순대비의 수렴청정은 선조 때의 전례를 따라간 것으로 보이며, 장동 김씨가 철종 생전 한 번 기세가 꺾인 데다 명순대비가 문중에게 중립적인 성격이라 대원군도 명순대비의 수렴청정에 태클을 건 적이 없다. 명순대비 섭정 당시 묘사를 보면 명순대비는 수렴하긴 해도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대원군과 개화파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고 서원의 숫자를 늘리는 대신 면세 혜택을 없애는 귀남의 계책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br]본작 고종의 간택에 장동 김씨가 의욕적이었던 반면, 명순대비는 고종의 간택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없다. 효유대왕대비도 애매해진 처지 때문에 고종의 간택에 관심을 보였음을 고려하면 명순대비는 중립을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 '''대비 [[민자영]]''' 조선의 왕비로 원 역사의 [[명성황후]]. 철종 시절 귀남이 한양 도성에서 군밤 장수로 이름을 날리던 당시 남장한 채 찾아가 군밤 도령이 고종임을 모르고 고종에 대해 아는 거 말해 보라고 했다가 군밤 도령이 고종임을 알자 당황해서 도망쳤다. 이후 철종의 양자가 되어 도성에 가던 도중 한양의 서민들이 몰려나와 환호하자 무리 속에 남장한 채 끼어서 구경했으며, 이후에도 틈틈히 남장하고 몰래 빠져나가 고종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어서 양오빠에게 혼나기도 했다. 여흥 민씨라는 이름 높은 세족 출신이지만 본인의 직계는 선대부터 영락한 상태라 집안 사람들이 여기에 민감하며, 당대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시사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별나다는 평을 들었다. [br]간만에 굉장히 열띤 간택이 되었는데,[* 장동 김씨는 본작의 고종이 명순대비의 양자인 덕분에 위세가 남아있었고, 풍양 조씨도 원 역사와 달리 처지가 애매해지면서 진지하게 간택을 노리고 있었으며, 여흥 민씨야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권력자로 떠오르던 박규수의 친정인 반남 박씨를 비롯한 여러 가문도 특정 가문 편중이 줄어들어 진지하게 노릴 기회가 생겼다.] 본래 대원군은 원 역사에서 그랬듯이 명문가 출신이며 수대에 걸쳐 인척관계이자, 동시에 직계가 영락해 다루기 쉽다 생각한 명성황후를 왕비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귀남에 의해 상황이 원 역사와 달라져 이번에는 귀남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고, 귀남은 '민비가 나쁜 여자'라는 소문을 전생에 많이 듣고 살았던지라 소문의 악녀와 결혼하는 게 걱정되어 형인 이재면과 상담하다 특이한 수수께끼를 내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한 여자를 간택한다는 발상을 내놓아 여러 가문들이 노심초사했다. [br]재간택에서 다섯 명이 뽑히자 재간택 때 귀남이 내린 "낙향한 뒤 이듬해 가친의 뜻에 따라 시집을 갔는데, 지아비는 할 줄 아는 것이 오직 군밤 굽는 것이 전부요, 일자무식에 다른 이렇다 할 재주도 없다. 이때 아녀자된 도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듣고, 다른 후보들은 경전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했지만 민자영만은 귀남의 본뜻을 간파하고 "둘이서 파는 게 벌이가 더 좋을 테니 저는 옆에서 고구마라도 구워서 팔겠습니다."라고 대답하여 고종에게 간택되었다.[* 삼간택은 형식적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재간택에서 뽑힌 거나 다름없었다. 어찌 보면 간택의 원래 의미에 가장 충실한 에피소드였다.] [br]평소 성격대로라면 "도움 안 되는 남편은 집 안에서 글이나 읽게 시키고 자신이 밖에 나가서 돈 벌어오겠다"고 대답했겠지만 몇 년간 지켜본 귀남의 성격대로라면 자신의 행동을 조용히 지지해줄 것 같은 사람이라 생각해서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군고구마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제법 뛰어난 발상력이었다.[* 이 시절 고구마는 남부 지방에서만 났으며, 남부 지방에서도 말려서 빻거나 전분을 해서 요리에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귀남은 대답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산신령이 민비 성격을 AS한 건가 싶어 그냥저냥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여흥 민씨는 다른 세도가들에게 어그로를 제대로 끌어 한동안 세도가들에게 얻어터졌고,[* 수수께끼에 특이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과분한 영예를 얻었다는 평을 들었다.] 대원군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결과라 좋아했다.[* 원래 여흥 민씨를 하고 싶었는데 상술한 이미지대로라면 여흥 민씨가 외척이 되었다고 바로 나대기는 힘들고, 여흥 민씨가 어그로를 끈 틈에 대원군과 개화파가 세력을 확장시켜 개혁을 이어가는데 용이했기 때문. 이 때문에 원 역사와 달리 여흥 민씨 세도가 일어나지 않았다.] [br]원 역사의 명성황후처럼 권력욕이 무척 강하다. 본인 曰 "한 번 있는 젊음을 불태워 닿는 데까지 달려나가고 싶다." 하지만 본작에서는 귀남의 변함없는 애정(첩 없음) 및 적당한 수준에서 권력욕을 발휘할 길을 터준 덕분에 성질이 많이 가라앉았으며, 친정 식구들, 특히 [[민승호]]와 사이가 갈라진 탓에 결과적으로 원 역사와 달리 [[여흥 민씨]]를 끌어들여 패악질을 저지르지도 않게 됐다. 시아버지와의 사이도 양호해서 흥선대원군이 자신이 죽은 뒤 종실을 뒤에서 받칠 후계자로 생각할 정도. 물론 만만치 않은 권력욕의 화신인 흥선군인데다 중전도 아직 젊은 만큼 권력을 간단하게 내주고 있지는 않으나 천천히 흥선군에게서 정보자산 등을 물려받고 있는 중이다. "(자청한) 일의 산에 파묻혀 있을 것"이라고 [[류큐]]로 유람간 대원군이 평했을 정도. 물론 조선국 국제 제정에서도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데 반대하면서 [[운현궁]]에 연락하는 등 원 역사처럼 [[러시아]]와 같은 제정국가를 원하고 있지만 귀남이 강경하고 대원군도 간신이 나와 종실을 흔드는 것을 방지하는데 동의하면서 실패하기도 하는 등 권력욕은 여전한 것 같다. [br]엘리노어 마르크스 사건으로 여권 신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자 '감고당 문문(門文)씨'라는 필명으로 몰래 한 신보에 선비들의 고루한 여성관을 규탄하는 논설을 투고하였는데, 귀남에게 딱 걸렸다. 귀남에게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이 글을 자신이 썼다는 것을 모를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글쎄? 문문은 자영의 성씨 민(閔)을 파자한 것이고 '감고당'은 '''자영의 생가'''다. [br]운현궁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일이 넘어오고 타국의 공사 부인들을 통한 소식을 정리하는 등 많은 격무에 시달린다. 이러다보니 부쩍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기도 하고 나이도 40살이나 먹었는데 그냥 만족하고 물러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1898년 시점에서는 나이 들어 눈도 침침하니 공안서 일에서는 손을 떼고 궁내부 일만 맡아 보고 있다. 1901년 기준으로 대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명실상부 왕실의 큰 어른이 되었다. 한때 집안이 어려워 고생한 적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 둘째 며느리인 조별단과 사이가 좋다. [br]본작에서는 대한제국으로 전환되지 않고 끝까지 조선 왕국 체제가 이어지기 때문에 본작의 시호는 '명성왕후(明成王后)'일 가능성이 높다.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와는 한자가 다르며, 현종비 명성왕후는 [[여흥 민씨]]인 민자영과 달리 [[청풍 김씨]]다. [br]대원군 못지 않게 원 역사와 모든 대체역사물을 통틀어서도 가장 행복하게 살다 간 인물로 볼 수 있다. 일단 민자영이 고종과 결혼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몇몇 대체역사물과 달리 귀남(고종)과 결혼하여 국모가 되었다. 세자를 포함한, 원 역사보다 더 많은 수의 자녀들도 건강하게 장성하였다. 세자가 병약하지 않아 굿으로 재정을 소모하지 않았으며, 여흥 민씨의 전횡 또한 벌어지지 않아 후대에 비판받을 실책도 사라졌다. 또한 귀남과 해외 순방으로 귀남 결혼 전이나 원 역사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해외여행을 가는 호사도 누렸으며, [[을미사변]]이나 다른 사건으로 불미스럽게 사망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고 갔다. 한 가정의 부인이자 어머니로서도, 조선의 국모로서도 행복하게 살다 갔다. * '''왕비 김명숙(金明淑)''' 조선의 세자빈. [[광산 김씨]] 가문의 방계 집안의 영애이다. 원 역사에서는 여흥 민문의 민태호의 [[순명효황후|여식]]이 세자빈이 되었지만 여기서는 외척의 자리가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아는 민태호의 은근한 반대로 다른 사람이 세자빈의 자리에 올랐다. 세자와 금슬이 좋은지, 결혼한 지 5년 만에 원손과 군주를 낳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동시에 냉정한 성격으로 자육원에서 배운 지식으로 자식들을 직접 가르치는 손아랫동서 별단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어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다. 과거 자영이 세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세손에게 "언제고 왕이 될 몸이니 열심히 학문을 닦으라"고 강조한다. [br]광산 김씨 출신인 것으로 보아 모티브는 [[정화당 김씨]]로 추정된다. 정화당 김씨는 1871년생으로 추정되고 순종은 1874년생으로 3살 연하이기 때문에 정화당 김씨 본인이 맞는지는 불명이나, 의외로 조선 시대 왕세자빈이 연상녀였던 사례가 연하녀였던 사례보다 더 많고[* 정종(1357년생)-[[정안왕후]](1355년생), 태종(1367년생)-[[원경왕후]](1365년생), 세종(1397년생)-[[소헌왕후]](1395년생), [[의경세자]](1438년생)-[[소혜왕후]](1437년생), 예종(1450년생)-[[장순왕후]]&[[안순왕후]](1445년생), 인종(1515년생)-[[인성왕후]](1514년생), [[소현세자]](1612년생)-[[민회빈 강씨]](1611년생), 효종(1619년 7월 3일생)-[[인선왕후]](1619년 1월 30일생), 경종(1688년생)-[[단의왕후]](1686년생), 영조(1694년생)-[[정성왕후]](1693년생), [[효장세자]](1719년생)-[[효순왕후]](1715년생), [[효명세자]](1809년 9월 18일생)-[[신정왕후 조씨]](1809년 1월 9일생), 순종(1874년생)-[[순명효황후]](1872년생)] 민자영도 고종보다 1살 연상(1851년생)인 데다 원 역사의 순명효황후도 순종보다 2살 연상(1872년생)이라 정말로 정화당 김씨 본인일 수도 있다. 원 역사에서 고종의 7남 이은(순헌황귀비 엄씨 아들)이 본작에서는 이척과 김명숙의 아들로 나오는 등 원 역사를 따라가는 모습도 많기 때문에 가능성이 적지 않다. [br]원 역사 순종의 정후 순명효황후가 순열비(純烈妃)였다 순명비(純明妃)로 시호가 바뀐 걸 고려하면 시호는 순열왕후(純烈王后) 또는 순명왕후(純明王后)일 가능성이 높다. * '''선경공주(璿慶公主) 이연(李姸)''' 이척과 명숙의 장녀. 이은의 누나이다. 모계로 내려오는 공부 머리가 한데 모였는지 총명하여 세손에 버금가는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 '''[[여흥부대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 고종의 친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본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반면 흥선대원군은 불교 신자다. 흥선대원군은 서로의 신앙에 충실하자며 존중해준다고.] 대원군과 함께 국비로 류큐 관광을 가는 등 행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김옥균 내각에서 교첩제를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자 정식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 '''창녕부부인(昌寧府夫人) 조별단''' 원 역사 [[이화학당]]의 2호 입학생. 마포 사는 변변치 못한 집안의 여식이다. 딱 부러진 성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자육원에서 일하면서 때때로 수업을 듣고 있다. 말하자면 자육원의 근로장학생이다. 1889년에 자육원 옆에 위치한 다방 겸 빵집 유월당에서 안양대군과 만났다. 안양대군을 그저 반가의 자제로만 알고 때때로 만나면서 서로 좋은 감정을 키웠다. 서로 알고 지낸 지 1년이 지났을 때 안양대군으로부터 왕족이라는 고백을 들었다. 일부 종친들이 별단의 신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귀남과 총리가 된 김옥균의 도움으로 안양대군 이규와 무사히 결혼했다. 결혼한 이후 1남 1녀를 낳았다. 시어머니인 자영 역시 가세가 기울어 고생한 기억이 있기에 별단에게 잘해주어 고부관계는 좋은 편이지만 손윗동서이자 세자빈 명숙과는 세자빈의 냉정한 성격 탓에 영 껄끄러운 관계이다. * '''섬라국부인(暹羅國夫人) [[https://en.wikipedia.org/wiki/Valaya_Alongkorn|발라야 알롱꼰]]''' (=섬라국부인 [[짜끄리 왕조|차씨]]) [[짜끄리 왕조]]의 옹주. 라마 5세와 후궁 [[https://en.wikipedia.org/wiki/Savang_Vadhana|사왕 아타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입장에선 [[근친혼]]인데 사왕 아타나는 라마 5세의 부왕인 라마 4세의 후궁의 자식으로 27번째 딸이었다. 즉 라마 5세와는 이복 남매 관계. 다행히 조선에선 해외와 교류를 하면서 외국 왕실들, 특히 [[유럽]] 왕실들의 복잡한 혼맥 관계들을 이미 알고 있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학구열이 강하고 검소하며 서구 문물과 여권 신장운동에 관심이 많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경양대군이 일부러 라마 5세가 싫어할 만한 군민공치를 주변에 강조하고 다녔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다며''' 1904년에 평양에서 열리는 아주대회에 시암 선수단을 이끌고 나타나 오붓한 시간을 보냈고 기어코 1905년 가을 결혼에 골인했다. 어엿한 왕족이라서 대군의 처인데 부부인이 아니라 국부인을 봉호로 받았다. 경양대군과 함께 그나마 시암과 기후가 비슷한 [[제주도]]에 별장 자리를 찾고 있다.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