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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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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 * '''[[공친왕|공충친왕 아이신기오로 이힌]]''' (=애신각라 혁흔) 원 역사에서 종친을 대표하여 이홍장 등과 함께 동치중흥을 이끈 [[함풍제]]의 이복동생. 국제 인식은 정확하나 실무능력이 떨어진다. 서구 열강에게 디저트로 전락한 청나라의 현실을 못 본 척 시간만 보내는 조정에 회의를 느끼던 중 새로운 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빠르게 문명국으로 발전하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아 [[문공(주)|문공]]이 되고자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서태후의 빠른 피신과 서구의 선진 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아서 진압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란이 성공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때 조선의 중재로 반란의 명목상 시발점이 된 마신이 암살 미수 사건의 책임을 이홍장과 이름이 비슷한 이홍조에게 떠넘겨 이홍조와 청류파를 반역죄로 숙청하고 정당한 명분으로 천조를 지키기 위한 거병이라며 명분을 만들어내 목숨을 건져 청의 발흥지라고 할 수 있는 동삼성, 즉 [[만주]]의 [[총독]]으로 임명된다. 사실상 만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이고 본인도 이를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청이 완전히 무너진다면 중원에서 쫓겨난 [[만주국|만주족의 나라]]가 필요할 때가 올테니 지금 만주에서 기반을 다지는 것도 썩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후 만주가 생각보다 빠르게 발전하여 때때로 대청의 부흥이니 뭐니 집어치우고 동삼성만 떼어 독립해 칸 노릇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현 황제이자 조카인 광서제가 친정과 신정을 선포하자 그가 청을 다시 세우는 걸 도와 청사에 남기를 원하고 있다. 동삼성으로 오게 되면서 정적 서태후와 거리두기를 한 덕분에 스트레스가 덜해서 원 역사보다 7년 더 오래 살았다. 역사처럼 충 시호를 받아 공친왕에서 공충친왕이 되었다. * '''[[순친왕]] 아이신기오로 자이펑''' (=애신각라 재풍) 순친왕 이후완의 5남. 광서제의 이복동생.[* 광서제보다 '''12살''' 어리다.] 원 역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아버지다. 공친왕이 병으로 쓰러지자 광서제가 드물게 목소리를 내어 차기 동삼성 총독으로 임명했다. 원 역사에선 의화단의 난에서 독일 외교관이 죽은 사건의 사과를 위해 독일에 갔었는데 여기서는 광서제가 서양과의 연줄을 만들어 놓기 위하여 조선의 세자, 일본의 황태자와 함께 빅토리아 여왕 장례식에 보내게 되었다. * '''[[https://ko.wikipedia.org/wiki/산치|숙친왕 아이신기오로 샨키]]''' (=애신각라 선기) 원 역사 이쾅 내각의 민정대신. 마지막 숙친왕. 동삼성은 용흥지지로서 결코 대청에 거스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여 자치권 확대를 바라는 만족 청년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저들 시조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먼터무]]가 실지로 조선 태조와 인연이 있다면서 조선에서 제작하는 활동섭영(영화) '조개홍업'에 등장하는 [[이지란]] 역으로 자기 장남을 캐스팅할 생각 없냐고 넌지시 물었다가 이번에 등장하면 [[병자호란|그 다음 만주 사람 나올 때]]도 나와야 한다고 말을 듣고 단념했다. * '''[[아이신기오로 푸이]]''' (=애신각라 부의) 원 역사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순친왕 자이펑의 첫째 아들. 원 역사와 달리 동삼성에서 나고 자라 [[만주어]]밖에 할 줄 모른다. * '''[[마신이]]''' 공친왕의 심복. 1866년에 흠차치리조선사무대신, 즉 주조선청국공사로 파견되었다. 누구 하나 내치지 않고 나아가는 귀남의 리더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홍장의 사주를 받은 장문상의 권총탄에 세 발을 맞았으나 장문상이 양식 권총에 익숙하지 않아 총알이 급소를 맞추진 못했던 점과, 원 역사와 달리 인천에 있는 양의들의 발 빠른 조치로 목숨을 건졌다. 다만 무릎에 한 발이 박혔던 탓에 무릎만은 완전히 치유하지 못해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후 공친왕을 따라 동삼성에 정착하여 사실상 재상 노릇을 했다. 후일 양의가 거의 죽다시피 한 마신이를 살려낸 이야기가 구전되며 칠공구규(七孔九竅)[* 두 눈, 두 콧구멍, 입, 두 귀의 칠공과 항문과 요도를 더한 구규를 의미한다.]에서 피를 토하던 것을 양약 한 첩으로 낫게 한 것으로 부풀려져 양의학도를 양성하는 베르뇌 학당(경일학당)은 조선으로 유학을 온 청나라 유생들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 '''장유재(張有財)''' [[장작림]]의 아버지. 정축년 북벌 때 영모개라는 도적의 산채가 있는 곳을 조선군에게 말해주었다가 해코지 당할 뻔했지만 때마침 조선군이 들이닥쳐 영모개의 무리를 토벌함에 따라 변을 피했다. *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Solomon_Oppert|구스타프 솔로몬 오페르트]]''' 에른스트 오페르트의 동생. 본래 전공은 인도학이었는데 저의 형 때문에 어쩌다 지천명도 넘긴 나이에 동아시아 불교학자가 되었다. 옥균의 의뢰를 받고 [[막고굴]] 발굴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발견한 대규모 [[불교]] 문화재를 당초 계약대로 조선에 넘기는 대신, 동삼성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신설된 봉천대학교의 석좌교수 자리를 얻어냈다.[* 위약금은 공친왕이 대신 납부했다.] 이후 유학 배운 조선의 서자들이 어설프게 알고 떠들다가 독실한 불교 신자인 만주 사람들과 주먹다짐까지 하는 일이 적잖이 발생하자 더 이상 싸움이 나지 않도록 [[티베트 불교]]의 교리와 역사를 정리해서 널리 퍼트렸다. * '''[[https://zh.wikipedia.org/wiki/廕昌|옌창]]''' (=음창) 원 역사 이쾅 내각의 육군대신. [[팔기제|정백기 만인]]으로 여기서는 주조선청국공사대리로 처음 등장. 귀국한 이후 자신의 뜻을 펼쳐 보고자 벼슬을 버리고 동삼성으로 내려와 이른바 '만주나(만주땅) 소조정'에 합류했다. 마신이가 천수를 다하고, 공친왕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자연스럽게 동삼성 내정을 손에 넣었다. 이후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 순친왕 자이펑을 끌어들여 몽골과의 연계를 통한 자치권 획득을 획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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