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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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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당 ===== * '''문정공(文正公) [[최익현(고종, 군밤의 왕)|최익현]]''' * '''[[박은식]]'''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화서학원에서 공부할 때 '흥국부도'라는 이름의 [[제국주의]]에 심취하여 팽창주의자 모임 '자강사'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세미나를 열어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마씨잡변'이라는 책을 발표해 가타야마 센과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br]그 후 고시 준비에 매달리다 한양에서 우연히 만난 황현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황현처럼 산학이 나오면 눈앞이 깜깜해지는 타입이지만 이쪽은 그래도 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현 참의대부 제도의 폐단을 알고 독자 정당을 꾸리고자 고민하던 중 때마침 총리 출마를 결심한 최익현과 만나 실용적 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한 자유당을 차렸다. [br]이후 [[성균관]] 과정을 마치고 예조에 일하고 있다. 중동 석유 개발을 위해 오스만 제국과 접촉했을 때 실무진으로 나섰다. 오스만 대표로 나선 타우픽 파샤가 서로 안 것이 수십 년에 지나지 않은 조선을 믿을 수 없다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홧김에 고구려와 돌궐의 인연을 말하면서 차라리 청과 조선이 구주보다 오스만과의 인연이 깊다고 말하였다. 타우픽 파샤는 그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와 동행한 젊은 장교인 청년 튀르크당의 지도자 아흐메드 니야지 베이가 돌궐이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 캐물었다. [br]대전쟁이 끝난 이후 최익현 추모 분위기에 힘입어 총리대신에 당선되었다. * '''[[황현]]''' 원 역사에서 [[매천야록]]을 남긴 그 황현이다.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징집되어 경흥에서 상사로 복무를 하던 중 [[녹둔도]] 영유권 문제로 러시아 제국군과 갈등을 빚었다. 전역하고 나서 유학생 신분으로 영국으로 갔다. 이때 군대에서 독학한 영어 실력으로 스펜서에게 도전장을 내민 전우를 옆에서 도왔다. 이후 노사학원에서 학업을 마치고 청운의 품을 꿈고 상경했건만 고시 과목에 '''산학'''이 있고 본인은 '''수포자라서'''[* 그래도 산가지로 셈하기는 쉽다는 것을 봐서 방정식 등의 대수학 쪽은 괜찮은 듯한데, 기하학만 나오면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거듭 낙방 끝에 나라를 돕는 길이 벼슬 뿐이겠냐며 공부 때려치고 자유당 당직자가 되었다. 참고로 원 역사의 황현은 생원시 복시에서 장원 급제를 했다. [br]기자조선의 행적을 찾기 위해 민간의 기부를 받아 평양 유물 발굴에 나선다. 몇몇 유물이 나오긴 했으나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자동래가 전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 사실이 미칠 파급력을 우려해 침묵을 지켰다. * '''[[유길준]]''' 원 역사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집안이 반남 박문과 악연이 많아 개화당에 몸 담고 있기 무엇하여 자유당으로 넘어왔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예조판서에 임명됐다. * '''[[김홍집]]''' 관직 생활 초기에 김옥균, 어윤중, 김윤식과 더불어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귀남의 총애를 받게 된다. 서태후가 베이징의 러시아 정교회 성당으로 광서제를 데리고 피신하였을 때 김옥균과 함께 청나라에 파견되었는데, 김옥균이 월권으로 서태후의 조선파천을 주도하자 이해는 하면서도 계속 근심한다. 귀남과 이 일에 대해 논의하던 와중에 교린삼장의 뜻을 세울 것을 청하게 되었다. 최익현 내각에서 예조에 발탁되었으며 그중 외무를 맡고 있는 외무참판이다. 민태호 내각에서는 예조판서 자리에 오른다. [br]김옥균 내각에서 단행한 세대교체 겸 개각 때 판서직에서 물러나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하필 [[드레퓌스 사건]]과 얽히고 만다. 처음에는 성품대로 이치를 따져 설복시키려 했으나 반유대주의의 광풍에 전혀 효험이 없자 독이 올라[* 김옥균이 평소 자신의 고지식한 부분을 비웃던 것을 의식한 면도 있다.] '''"반유대주의는 카이저의 음모다! [[조지프 매카시|여기 독일 간첩단 300명의 명단이 있다!]]"'''는 오페르트 명의의 선동 논설을 발표해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잡는다. 이게 단순한 블러핑이면 모를까, 문제는 프랑스 육군이 내사를 해 본 결과, 드레퓌스를 누명 씌운 게 '''하필이면 정보부 방첩대 헝가리계 프랑스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는 점 때문에 프랑스 군부 입장에서 해당 블러핑이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실이 유출된다면 '간첩을 막아야 할 방첩대에까지 간첩이 있다면 프랑스 군부는 간첩 투성이다!'라는 주장이 통하게 된다.] 그 결과 드레퓌스가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명예를 회복했다. [br]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총리대신 추거에 나서 개화당 후보 어윤중을 꺾고 신임 총리대신이 됐다. * '''[[이용직]]''' 원 역사 대한제국 학부대신. 자유당 참의대부이다. 비록 당적은 다르지만 환등기와 섭영 등등의 기물에 밝은 사람이라 봉준이 공조판서로 발탁했다. * '''김희정(金羲正)''' 원 역사 구한말 제주 문인. 제주도의 참의대부이다. 작중에서는 최익현이 제주도로 유배를 간 일이 없었기에, 원 역사와 달리 출륙하기 전까지 최익현과 별 다른 인연이 없었다. * '''[[양기탁]]'''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국무령. 자유당에서 촉망받는 인재이다. 나가사키 아주대회 '어(御)' 문세(文勢) 부문 조선 국사(국가대표)로 참가하였는데 차가 고장나 아깝게 옥패를 놓쳤으나, 평양 대회에서는 사람과 차가 하나 되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 '''[[이승만]]''' 원 역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남의 아래에서 '이놈 저놈' 소리 듣기 싫다는 일념으로 죽어라 서책에 몰두하여 고시에 합격하고 [[학사장교]]로 임관했지만, 박복하게도 군복을 입자마자 [[을미정난]]으로 인해 조선군과 북양군이 충돌한 산해관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북경에 입성했다 그동안 [[장작림]]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싱겁고 부드러운 음식이 취향이고 입맛도 까다로워 다른 조선인들이 맛있게 먹는 [[작장면]]을 혹평했다. 이후 장작림과 펜팔로 지내며 장작림에게 조선 돌아가는 사정을 알려주는데, 자동차의 대중화 소식을 알리며 자신도 한 대 살까 고민하고 있다고 편지에 썼다.[* 원 역사에서 이승만은 운전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강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시속 140km로 과속을 하다가 경찰에게 걸려 추격전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 전역한 이후 해동일보에 입사하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만으로 떠난 이완용의 빈자리를 빠르게 대체하였다. 그리고 출세하기 어려워져 고민이 많은 젊은 식자들을 끌어들여 자유당 안에 교양사라는 단체를 차려 자신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꿈꾸는 이완용과 경쟁하고 있다. 이후 평산군 보궐추거에 출마해 30대 초반에 참의대부가 되었다.[* 이승만은 조선 평산도호부 출신이며, 현 행정구역으로는 봉천군이다.] 1차대전이 일어나자 최익현에 맞서 구주를 중재할 방도가 없으니 차라리 아주만이라도 화평 굳건히 지킴으로써 대전쟁이 구주대란으로 그치게 하자는 의견을 냈다. 귀남 옹 역시 원 역사의 이승만을 알기에 이완용을 견제할 방도로 어디 김구나 이승만이 살아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직접 만나진 않았다. 독자들은 이승만이 광복 당시 나이가 많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1875년생) 1895년에 성인인 걸 보고 정말 나이가 많기는 했다고 실감한 독자들이 많다.[* 1895년 당시에는 임시정부와 1공화국 당시의 주요 인물 상당수가 어린애거나 태어나지도 않았다.] 이승만이 이북 출신인 것도 평산군의 참의대부가 되니까 실감했다는 평도 있다. * '''[[이완용]]''' 원 역사 [[을사오적]]의 일원. 원 역사처럼 거창한 이상이나 도의를 추구하지 않는 철저한 보신주의자다.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로 너무나 악명이 자자해서 소학교도 못 마친 귀남도 그 대역죄인의 이름 석 자 똑똑히 알고 있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규장각 직각으로 일했다. 조선의 상황이 좋아지면서 딱히 나라 팔아먹을 행동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름 들었을 때 식겁했던 귀남이 뭐 하나 걸리기만 하면 바로 쳐내겠다고 잔뜩 경계했고 적어도 이완용 뜻대로 되지 못하게 한다. 김옥균의 부탁을 받고 만민공산당이 개최한 인터내셔널 대회에 방청객으로 참가해 분란의 씨앗을 뿌렸는데 큰 효과는 없었다. 이후 '이완용'이 '일본인'이 대거 참가한 '공산당 대회'에 참석한 것에 기겁한[* 귀남이 싫어하는 '''매국노의 대명사+일본+공산당''' 세 가지가 모두 엮였으니 기겁할 수밖에….] 귀남이 무슨 이유로 그런 곳에 참석했냐고 직접 추궁하자 곧바로 김옥균이 시킨 짓이라고 불어버렸다. 그 결과 옥균이 주도하는 개화당과 척을 지게 됐다.[* 전생에서 나라 팔아먹은 대역죄인이었던 완용에게 좋은 감정이 조금도 없는 귀남이 옥균에게 곧바로 이완용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정작 완용은 저나 저의 아버지가 대원군이나 상감에게 누를 끼친 적이 없으므로 옥균이 처음부터 자신을 [[토사구팽]]할 생각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자평하기를 복수심을 품지는 않았지만 출세욕은 여전하여 자유당의 줄을 잡아 출세할 생각으로 안인수를 꾀어 명문세족들의 부정부패를 해동일보를 통해 기사화했다. 이후로도 해동일보를 통해 개화당 하는 일에 종종 딴지를 거는 모양. 안동 김문이 출자한 조일동차회사가 대만에서 [[대만 원주민|원주민들]]을 속여서 그들의 땅을 빼앗고, 이를 원주민 대표인 와단 셰츠가 해동일보에 알리자 이완용은 이를 이용해서 김옥균을 공격하려 한 번 과감하게 모험을 해보려 한다. 이 때 김옥균과 개화당이 주장하는 '[[민족주의]]'에 대해 이완용은 [[제국주의|'결국은 힘없는 토인들을 겁박하여 저들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짓']]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현실의 이완용의 행적과 비교하면 대단한 아이러니. 하지만 모험엔 위험이 따르는 법인데 [[김귀남|그 이름 석 자 들으면 태산만큼 위험을 만들어내고도 남을 사람이 궐문 안에 계셨으니]] 이 때도 이완용 좋은 꼴 못 보게 딴지를 걸어버리며 일이 꼬여 조일동차회사와 대만 원주민들 사이를 중재하여 토지를 매매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때 같이 나온 표현이 '''[[매국노|팔지 못할 것을 팔게 하는 데]]는 그만한 인재가 없다.(…)''' 1906년, 간신히 일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와 해동일보에 일궈둔 터전을 뒤흔드는 이승만의 교양사에 대항하기 위해 저처럼 [[매국노|처세에 밝으면서도 현명한 이들]]을 모아 [[일진회]]를 차려 총리대신 추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독일의 의뢰를 받아 반식민주의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그 뜻은 좋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이완용이라 못 믿겠다는 귀남의 함정수사에 딱 걸려서 총리대신 추거를 포기하고 정말로 순수한 의미의 반식민주의 운동가가 됐다. * '''[[이근택]]''' 원 역사 [[을사오적]]의 일원. 생선 염장해 파는 일로 거부가 됐다. 이완용이 창설한 일진회에 가입했다. * '''[[송병준]]''' 원 역사 [[정미칠적]]의 일원. 무관으로 오래 봉직하여 별다른 공 없이 참장(소장)으로 전역했다. 군복 벗은 뒤 혹시 참의원에 자리 없는가 엿보다 이완용이 창설한 일진회에 가입했다. * '''[[박제순]]''' 원 역사 [[을사오적]]의 일원. 재주 부족하다는 평으로 인해 가문 안에서 겉도는 처지인데 이완용의 권유로 일진회에 가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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