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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군밤의 왕/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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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제국 → 소련(소비에트 자유국 연방) === * '''조러수호조약''' 공식적으로 확정된 바 없던 조·러 간의 국경을 확실히 하고, 두 나라 백성의 교역을 자유롭게 한다는 명분 하에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내륙을 통한 교역을 허용하고 조·러 백성들이 양국 접경지대에서 통상, 이동, 거주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다. 협상을 주도한 무라비요프 백작은 조러수호조약을 앞세워 함경도 일대를 차근차근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조선 농민들의 개척 러시 때문에 오히려 연해주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br]이에 황급히 귀화하고 3년간 정주하지 않으면 종자와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포고했지만, 그랬더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그럼 일만 하다가 겨울에 돌아가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농기구 장사를 하기 딱 좋다고 조선인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내에 거주지를 갖지 않으면 고용할 수 없게도 해 봤지만 지방 행정이 어설프다 못해 중세적인 구석까지 남아있는 러시아의 지방관들에게 어지간한 평민들도 여차하면 관청에 소장을 쓸 줄은 알 정도로 관을 대하는 데 익숙한 조선인들은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그나마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해서 행정 및 치안을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고 웬만하면 러시아 관청에게 협조하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입장에선 감지덕지할 수준. [br]심지어 연해주 개척 소식을 듣고 새로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들도 태반이며 조선과의 교역에만 관심을 가졌다. 결국 원하던 조항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다며 영국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녹둔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을 정도로 김칫국을 마시던 러시아에서 조약을 체결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재개정을 간청했다. 물론 조선의 반응은 "응 싫어." * '''[[러시아-튀르크 전쟁#s-13|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 반침략 연대의 활약으로 발칸의 국가들이 캐나다 수준의 자치권을 획득하면서 양국이 충돌을 피했고 그 결과 [[산 스테파노 조약]] 체결과 [[베를린 회의]]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러시아가 최소한의 피해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3제 동맹]]이 파탄나지 않았고 [[알렉산드르 2세]]의 자유주의 정권이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데즈레일리 내각과의 물밑협상으로 극동에 대한 이권을 인정받은 러시아가 이때다 싶어 조선에 조러수호조약 개정을 비롯해 이런저런 황당한 요구를 내놓았다. 그런데 반침략 연대의 활약과 더불어 더비 백작의 폭로로 국내 여론이 들끓어 데즈레일리 내각의 입장이 난처해졌고 러시아 극동 관계자들 입장에서도 이러다가 조선인의 두만강 월경이 금지되면 그 날로 블라디보스토크 문 닫을 판국이라 북해도 공화국 투자를 알선해서 손해 보는 바를 벌충해주겠다는 귀남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시아개발은행이 원 역사보다 거의 100년 앞서서 등판하게 됐다. *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원 역사보다 5년 늦은 1886년에 발생했다. 그리고 차르 암살을 주도한 단체 '인민의 의지' 구성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으나, 일부가 체포되지 않고 조선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의 '''선의빔'''을 얻어맞고 붕괴해버렸다. 일단 조선까지는 왔는데 기대했던 러시아 인민의 대각성은 일어나지 않고, 조선의 비밀경찰이 방문해 '당신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공식 문의서를 보내오자 각 파벌들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답변하겠다고 내분을 일으켜 결국 며칠이나 논쟁한 끝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각각의 파벌마다 답변을 따로따로 제출하고 자괴. 그리고 이는 러시아를 거쳐 각 유럽 열강들에게까지 전달되어 대반체제세력 대책이 이들을 양지로 끌어내어 내분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0여년간 무수한 혁명세력이 자괴'''당'''한 모양이다.[* 여기에 조선이 다이토 제도 건으로 아나키스트들에게 다이토 제도의 실험적 운영을 맡기면서 유럽 아나키즘 세력이 약화된 결과 덕분에 원 역사에서 아나키스트에게 암살당한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와 이탈리아 왕 [[움베르토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가 목숨을 건졌다.] * '''연해주 젬스트보(지방의회) 설치''' 더 이상 연해주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일부 과격파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연해주를 방문한 황태자 니콜라이 2세에게 블라디보스토크의 진실을 고발했는데, 정작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이 '[[차르|노국 나랏님]]의 자비에 기대어만 있던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귀남 즉위 이래 수십년간 조선에서 익숙한 대로 적극적으로 나랏일에 협조하겠다고 격쟁을 일으켰다. 러시아 지방관들은 연해주의 경제권을 쥔 조선인들이 이제는 정치에까지 손을 뻗으려 한다고 기함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이 알던 반정부 시위들의 돌을 던지거나 불을 지르는 과격한 폭력시위가 아니라 꿇어 엎드려 황제에게 애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당혹해 하면서도 성격대로 우유부단하게 굴다가 우호적으로 대하라고 대충 인정하고 넘어갔다. * '''유라시아 동맹''' 원 역사의 러불동맹에서 조선과 추가로 동맹을 맺는다. *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갈등'''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1차 대회가 당국의 정책 변화로 탄압을 피해 [[벨라루스]]의 [[민스크]]에서 조촐하게 열렸던 원 역사와 달리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국의 감시 하에 당당하게 개최됐다. 그런데 율리 마르토프가 진정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시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농민들까지 모두 포용하여야 하고 교회의 개혁적 요소들과도 임시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는 레닌의 주장에 반발하여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대립이 더 빨리 그리고 원 역사와 완전히 상이한 이유로 발생했다.[* 원 역사에서는 마르토프가 "여러 계층의 인물들이 참여하는 대중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하다. 원 역사에서 레닌의 볼셰비키가 전위 정당론을 설파한 이유는 그나마 제국의회 출마 및 당선은 가능했던 독일과 달리 러시아에는 정치적 자유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피의 일요일 이후 두마 선거를 제한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레닌은 볼셰비키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마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고, 이들은 두마에서 당시 러시아 민중과 볼셰비키의 스피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즉 레닌에게 마르토프는 당시 러시아의 정세에 대한 이해도 없이 독일 사민당의 전례만 답습하자고 주장하던 교조주의자(그의 표현에 따르면 경제주의자)였던 것. 원 역사의 독일보다도 더 진전된 본 세계관의 러시아라면 레닌과 마르토프의 포지션이 바뀌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셈이며, 작가의 높은 이해도를 반증한다.] * '''《불씨(Iskra)》창간''' 원 역사보다 2년 빠른 189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창간됐다. 조선 만민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창간호에서 러시아의 개혁과 발전은 '마르크스-전 노선'에 의해 담보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다. 엄연히 정부의 허락을 받고 양지에서 공식적으로 찍어내고 있으며, 코바(스탈린)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무단으로 조지아어로 번역해서 잔뜩 배포했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붉은 일요일 사건]]''' 스톨리핀과 일린 두 사람의 힘으로 곡물의 생산량이 다섯 곱절이나 늘었음에도 변함이 없는 팍팍한 삶에 의문을 품은 도시 노동자들이 [[오흐라나]] 추산 7만, [[볼셰비키]] 추산 30만명이나 자발적으로 거리에 쏟아져 나와 누군가는 헌법을 외치고, 누군가는 의회를 외치고, 어느 얼간이는 '''"신께서 보우하시는 차르 폐하 아래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만들어 퍼뜨렸다.[* 이건 무슨 병맛이냐 싶지만, [[소련]] 건국 이전까지 '소비에트'의 원 뜻은 '평의회'였다. 따라서 본작의 해당 발언은 군주 아래 모든 권력을 의회가 행사한다는 평범한 입헌군주국 의원내각제 발언이다.] 이에 [[니콜라이 2세]]가 소싯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서 시위대에 대치하던 군인들에게 '''사격금지 명령'''과 더불어 시위대가 요구한 헌법 제정과 의회 설치를 수용함에 따라 시위대가 만족해 민중이 해산하며 시위가 평화롭게 끝났다. 차르도, 사회민주노동당도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시위였지만, 참가자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나와 '''붉은 일요일'''이라는 명칭이 된 모양. * '''[[두마]] 개설 & 입헌당 창당''' 원 역사에서는 흉흉한 민심에 니콜라이 2세가 떠밀려서 두마가 설립되지만 여기서는 붉은 일요일 사건의 여론과 자애로운 러시아의 아버지 차르로서 두마 설립을 허가했다.[*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의회에 자기 세력을 심어서 재미를 보는 걸 그와 교류하던 니콜라이도 알고 있었고, 영국과의 협상에서 협상카드로 쓰기 위해서기도 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이 일정한 세를 얻었고 니콜라이 2세를 미사여구로 구워삶은 핀란드도 자치의회 설립이 허가되었다. 하지만 폴란드 쪽은 아직 허가되지 못한 모양. 또한 [[세르게이 비테]]가 두마에서 일린과 스톨리핀의 사민노동당에 대항하기 위해 입헌당을 창당했다. * '''[[적백내전]]''' 두마 설치 후 사민노동당의 일린(레닌), 스톨리핀의 개혁에 위기감을 느낀 오흐라나, 군부 보수파,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세르게이 대공 등의 보수파 귀족들이 1910년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납치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적백 양군이 대치하게 되나 차르의 중재로 무력충돌은 피한 후 백군은 차르 일가를 데리고 키예프로 가 키예프 정부 성립을 선포한다.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기에 독일의 키예프 정부 지지 선언을 시작으로 마침내 [[제1차 세계 대전|대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격렬한 참호전에 시달리며 수십만단위로 인력이 갈려나가는 프랑스나 독일과는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부는 개혁이 실시되지 않은 지역에서의 격렬한 반발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와 같이 평화적으로 충돌을 해결할 수 있는데 뭐하러 병력을 동원해서 피를 내며 치고받냐는 일부 온건파 볼셰비키 때문에, 키예프 정부는 역시 평화적 해결을 원하는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의사로 인해 병력동원이 어려워져 내전은 적백이 단순하게 대치 중인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 '''[[소련]] 성립''' 적백내전 도중 일린의 주도로 [[두마]]가 [[소비에트]]로 바뀌었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독립을 꿈꾸는 세력들에게 소비에트 설치 및 연방 가입을 조건으로 독립을 허가한다. 이에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에 본거지를 둔 백군은 내부에서부터의 붕괴를 우려해 차르의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함에 따라 적군이 승리하여 소련이 건국된다. 공식국호는 '''소비에트 자유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вободных Государств / Soyuz Sovetskikh Svobodnykh Gosudarstv)'''. 수도는 모스크바이다. 국호는 이래도 그 중심이 되는 국가는 여전히 '''러시아 제국'''이며 러시아 황가는 입헌군주로서 소련의 지도자로 위치한다.[* 즉, 위에 어느 무지렁이가 외친 '''"신께서 보우하시는 차르 폐하 아래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가 실현됐다.] 핀란드와 발트 3국은 소련의 구성국으로 남지 않고 정말로 독립해서 강역은 [[주권국가연맹]] 정도이다. 굳이 옛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놔두고 모스크바로 천도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본작 2013년 폴란드가 소련과 별개의 국가로 나오기 때문에 폴란드도 여차저차 독립하기는 한 모양이다.[* 다만 폴란드는 언제 독립했는지에 대한 서술이 없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나마 [[카틴 학살]]과 같은 사고는 없었던 모양.] 이후 소련은 로마노프 가문이 입헌황가로 남으며 [[대숙청]]도, [[우크라이나 대기근]]도, [[독소전쟁]]도, [[냉전]]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도, 그리고 [[소련 붕괴]]까지 거치지 않고 무난하게 안정된 상황에서 경제 성장을 거듭하며 많은 나라들과 함께 발전했으며 동유럽부터 중앙아시아까지 이어지는 독자적인 소련 경제 블록을 구축하는데 성공,[* EU 경제 블록에 관심이 있었지만 러시아를 경계한 EU가 "너네는 유럽이 아니라 유라시아"라고 관세 협상에서 쫓겨나서 양쪽 경제 블록이 따로 놀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 다극 체제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잡으며 2013년 기준 국가 총 GDP 세계 3위를 달성할 만큼 잘나가고 있다. 온건파 공산주의인 마르크스-전 노선이 공고해진 덕분에 민족 문제도 덜한 모양이니 본작에서 가장 수혜를 많이 받은 국가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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