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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군밤의 왕/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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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 * '''[[파리 코뮌]]''' '''비공식''' 주코뮌 조선공사 [[최익현(고종, 군밤의 왕)|최익현]], [[앙리 뒤낭]]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원 역사대로 무너지기는 했지만 뒤낭과 최익현이 [[야로스와프 돔브로프스키]]를 설득해 코뮌이 붙잡은 포로들과 코뮌 구성원 중 돔브로프스키 휘하 일부 인원을 데리고 빠져나오면서 코뮌 내 강경파의 포로 학살도 정부군의 초강경진압 이른바 피의 일주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파리에 갇힌 민간인들을 위해 조선 정부에서는 파리의 빈집들을 잠시 임대해 그곳으로 대피하게 했다. 그 민간인 중에는 코뮌 구성원도 섞여있었지만 조선 측에서는 눈감아줬다. 프랑스 정부군은 [[포로는 필요 없다]]를 외치려 했지만 두 사람이 코뮌 구성원들을 데려오며 '''인질들까지 무사히 구출해온''' 탓에 이미 인질들을 무사히 풀어주면 인도주의적으로 대해주겠다며 외교적으로 약속한 것 때문에 무차별 처형으로 외교 망신을 일으키는 대신 이들을 조선으로 정치적 [[망명]]을 보내는 식으로 해결한다. 이들 코뮌 주류파는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선에 '작은 파리'라는 거주구역을 만들었고 급격히 개화중인 조선에 서구 문화와 서구식 체계를 도입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코뮌 난민의 좌장 격이었던 샤를 벨레가 자서전에 쓸 이야기 한 줄이나 만들어 볼까 해서 나간 참의대부 추거에서 조선인들의 경로사상에 힘 입어(…) 참의대부까지 그대로 당선된 것은 덤. 아울러 프랑스에서는 극동의 준문명국과 거의 평등한 조약을 맺었을 뿐 아니라 다수의 행정관까지 제공한[* 코뮌 출신 회계사들이 호조 관원들에게 서양식 회계를 알려줬고 벨레가 참의대부에 당선된 소식은 프랑스 본토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다고.] 자신들이야말로 문명개화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마구 선전해대는 중. 물론 어쩌다 제공했는지는 조선이나 프랑스나 둘 다 제껴두고 쉬쉬하고 있다. * '''[[튈르리 궁]]의 보존''' 원 역사에서 일어났던 파리 코뮌 강경파의 자살행위와 다름없는 요인 살해(대표적으로 파리의 대주교인 조르주 다르부아)와 문화재 반달 행위는 작중에서는 최익현의 노력으로 코뮌군 사령관 돔브로프스키가 조기에 항복함으로써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원 역사에선 코뮌 측의 방화로 불탄 튈르리 궁이 무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작중에서는 튈르리 궁은 그대로 대통령궁으로 사용된다. * '''1889년 만국박람회''' 조선이 조선 국명으로 처음 참가한 1889년 만국박람회도 역사와 비슷하게 개최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100주년을 기념하는 만국박람회라 서구 왕정국가들은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민간의 참여만 있었지만 전 왕조를 뒤엎고 현재 체제가 된 조선과 청은 떳떳하게 참가하였다. 원 역사의 이 박람회에서 프랑스는 세네갈의 현지인을 데려다가 토굴을 짓고 민속적인 모습을 전시했는데 여기서는 식민지의 문명화라는 명분이 널리 퍼진 상태라 현지인을 프랑스인처럼 꾸미고 다른 나라들도 그 유행을 따르는데 치중하였다. * '''유라시아 동맹''' 원 역사의 러불동맹에서 조선과 추가로 동맹을 맺는다. 30만 지부상소로 극동의 강국으로 거듭난 조선의 군사력이 밝혀진 뒤에는 허풍 좀 더해 '유라시아 동맹' 이라고도 불린다. * '''[[사디 카르노]] 암살 ×''' 대반체제세력 대책이 이들을 양지로 끌어내어 내분을 일으켜 공중분해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원 역사에서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사디 카르노가 작중에서는 정상적으로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 '''[[드레퓌스 사건]]'''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처벌받자 오페르트 집안 사돈댁인 드레퓌스 가문[* 원 역사에서와 같이 작중에서도 사돈관계가 되었는데 드레퓌스 대위와는 성만 같고 혈연 관계는 없는 랍비 명문가이다. 그런데 조선에선 이게 와전되어서 오페르트의 집안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집안과 사돈을 맺은 것처럼 알려져서 오지랖 넓은 조선인들이 볼 때마다 제 일처럼 걱정하다 못해 오페르트가 30년 동안 그렇게 바라던 사직이 이루어졌다.]의 지원 요청을 받은 오페르트와 조선 측이 여론전에 가담한다.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있던 김홍집은 여론전에서 밀리자 '''[[매카시즘|드레퓌스 사건은 독일 간첩들의 조작으로 일어난 일이며, 삼백 명의 간첩단 명부를 확보했으나 신변의 위협으로 밝힐 수 없다]]'''는 당당한 선동과 날조를 날려 응수한다. 프랑스를 뒤흔든 이 선동은 군부에서 내부조사를 하며 방첩대(…)에서 진범이 잡히게 되고,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여론전과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수사에 힘입어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무죄로 석방되어 그를 비난하고 비웃던 언론들의 찬사를 받으며 복귀했으나, 안타깝게도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언론의 외면 아래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로 좌천되었다. * '''[[시온주의]]''' 드레퓌스 대위가 석방된 후 오페르트가 [[테오도르 헤르츨]]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오스만 정부의 고질적인 부채를 유대인이 대신 갚아주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술탄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눌러앉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던졌는데, 이를 들은 헤르츨은 역으로 "[[루이지애나 구입|루이지애나]]도, [[알래스카 조약|알래스카]]도 사고 팔 수 있는데, 가나안 땅이라고 안 되리란 법 없다"며 돈을 모아 팔레스타인 땅을 매입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수석 랍비의 지지를 받아 '''유대 복지재단'''을 설립한다. 그리고 오페르트와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유대인의 사정이 전해지자 귀남이 궁방전의 일부를 빌려주면서, 동유럽 유대인들이 조선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조선에 [[키부츠]]가 '''[[농협]]'''이라는 이름으로 퍼진다. * '''[[엘랑 비탈]]''' 을미년 만주출병에서 조선군의 동원체계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전쟁성 장관 오귀스트 메르시에가 전쟁대학 교관 [[페르디낭 포슈]]를 통해 신속한 동원령으로 소집한 대규모 병력을 집단으로 운용해, 신속한 공세로 적의 전쟁수행 의지 자체를 공격하는 군사교리를 창안하였다. 원 역사의 엘랑 비탈은 적극적인 공세를 중시하는 교리인지라 이름은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원 역사에서는 왕성한 공격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면, 본작의 엘랑 비탈은 보다 체계적이고 빠른 동원체계를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엘랑 비탈은 [[앙리 베르그송]]이 만들어낸 용어를 인용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살아 숨쉬는 프랑스 국민의 전의로써 적을 굴복시킨다'는 의미로 메르시에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참고로 프랑스군 일부 장성들은 정작 조선군이 쏠쏠하게 써먹은 [[철조망]]이나 [[기관총]]은 하찮은 것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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