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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군밤의 왕/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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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 * '''[[영러협상]]''' 국내정치적 이익이 필요했던 영국 자유당의 애스쿼스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일린(레닌)이 조선의 중개로 만나 협상을 추진하여 러시아는 만주 진출을 포기하고 영국은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허용하는 빅 딜을 성사시켰다. *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 즉위 ×''' 불가리아 공국의 독립이 늦어져 알렉산더르 대공 사후 불가리아와 오스만의 합의로 원 역사에서 [[불가리아 왕국]]의 초대 차르였던 페르디난트 1세 대신 다른 사람이 총독이 되었다. 대 불가리아를 꿈꾸며 호시탐탐 영토 확장의 야욕을 보였던 페르디난트가 즉위하지 않은 결과 불가리아와 다른 발칸 제국 사이의 관계가 원 역사보다 우호적이었다. * '''[[발칸 전쟁]] ×''' 발칸의 제국들이 오스만에게서 독립하고 나서 얼기설기 엮인 정부를 구성하던 중 서로에게 총구를 겨냥하거나 내부다툼을 벌일 새도 없이 대전쟁이 발발하면서 오스만의 침공을 받아 오히려 서로 힘을 합쳐 옛 종주국 오스만에게 대적해야 했다. 그리고 후술할 대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잘 막아내며 역공세도 가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며 국경을 지켜내기는 하였으나 [[케말 파샤]]의 활약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만약 정신 못 차리고 우리끼리 서로 싸우면 언제 다시 오스만의 식민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오스만에게 좋은 일 해줄 수는 없다며 자체적으로 발칸 지역 기구를 결성해 [[세계의 화약고]] 신세에서 벗어날 기미가 생겼다. * '''[[제1차 세계 대전|대전쟁]]''' 니콜라 테슬라의 자해공갈 쇼(?)로 흑수단으로 대표되는 세르비아의 과격파가 축출되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사과하면서 [[사라예보 사건]]과 오헝-세르비아 관계의 악화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엉뚱하게도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을 계기로 시작되어 1910년에서 1912년까지 진행됐다. 원 역사와 달리 조선의 숱한 개입으로 인해 보어전쟁, 미서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유럽 각국들이 스스로의 무기체계의 발달을 깨닫고 적응하며 교리를 수정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양측이 기관총 앞에 보병을 그대로 던져넣는 구시대적인 전술을 쓴 결과 불과 6개월만에 서부전선에서 무려 200만명 이상의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환산하면 하루에 1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셈이다. * '''[[동부전선]]''' 독일이 둘로 나뉜 러시아령 폴란드의 주둔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을 받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바르샤바를 포함한 러시아령 폴란드의 상당수를 접수했다. 키예프로 반강제로 옮겨진 니콜라이 2세가 페트로그라드 정부와 키예프 정부사이에서 중립(이라기 보다는 애매모호한 스탠스)을 지켰고 백군이나 적군이나 여러 문제 때문에 공세할 여력이 부족했기에 동원된 병력은 서부전선에 버금가지만 그에 비해 큰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쪽도 페트로그라드 정부와 폴란드 군단의 충돌로 수만 명이 죽었고, 서부전선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전투가 꾸준히 벌어져 수십만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 '''[[국경 전투]]'''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빨리 프랑스가 병력을 소집해 집중시킴으로써 독일의 방어선을 뚫고 알자스 로렌을 수복했다. 이에 프랑스는 여기에 라인란트까지 '수복'해 보불전쟁 리벤지를 하자는 희망회로를 굴린다. 그러나 몰트케 계획에 따라 독일이 마련한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이루어진 방어선에 가로막힌데다 참호선 돌파를 위한 집중포화와 임시편제를 꾸릴 야포와 신형화기 공급이 작전진행속도를 따라가지못해 프랑스는 결국 무려 70만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프랑스의 초기 공세에 주방어선의 상당부분을 포기하고 알자스 로렌까지 상실한 후 본토까진 내줄 수 없었던 독일과 겉보기에는 눈부셔 보이는 프랑스의 성과에 서둘러 공세를 벌인 영국도 역시 큰 피해를 입는다. 전선이 알자스-로렌 방면에서 그것도 프랑스의 선공으로 시작됐고, 대전쟁 발발로 지푸라기라도 부여잡는 입장으로 콩고에 SOS 친 벨기에에 수많은 콩고인 의용병들이 몰려들어 독일이 침공을 단념했기 때문에 [[벨기에 강간]]은 발생하지 않았다. *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헬골란트 만 해전]]''' 영국이 프랑스의 겉으로 보이는 선전에 놀라 대륙원정군을 파견할 때 전시내각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따로 수송함대를 떼어내기 보다는 함대가 함께 출항해 독일 제국 해군을 격멸하자는 의견을 냈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피셔 제독의 의견을 씹고 이를 관철시킨다. 마침내 헬골란트 만에서 미리 함대를 북해로 이동시켜 수적열위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어뢰 등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을[* 청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어뢰가 실전에 투입된 적이 없었다.] 받아들인 도박까지 한 독일해군과 엉성한 작전을 수적우위로 만회하려 하던 영국해군이 격돌하여 독일이 전략적 승리를 거두기는 하나, 독일도 [[대양함대]]가 중상을 입어 두번 다시 그 승리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영국도 주력함을 다수 잃어 조청일과 남미에 [[HMS 애진코트|팔려던 전함들]]을 양해 받고 땡겨써야 할 정도로 쌍방이 큰 피해를 입었고 이와 같은 대규모 해전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 '''루멜리아 전선''' 페트로그라드든 키예프든 카프카스 방면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오스만 제국이 루멜리아 전선에 힘을 집중해 루마니아,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로 이루어진 발칸 국가들의 '발칸 동맹'에 공세를 가해 신승을 거두었다. 발칸 국가들은 지들끼리 [[발칸 전쟁]]으로 치고받기도 전에 대전쟁이 터지며 옛 지배국인 오스만의 침공에 맞서야 하는 입장이 되어 원 역사보다 국가 간 감정이 덜해졌다. 전후엔 우리끼리 치고받다간 언제고 저 오스만에게 다시 먹힐지 모른다며 발칸 국가들이 뭉쳐 '발칸 지역 기구'가 결성된다. *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탈리아 전선]]''' 이쪽에서는 독일 편으로 참전한다. 로마 제국 시절의 일리리아 속주를 다시 획득하려 몬테네그로에 상륙을 감행하나 말아먹고, 프랑스가 주력을 독일 방면에 집중한 틈을 타 사보이를 수복하려 했지만 역시 말아먹어, 다른 국가들과 달리 일찍부터 답도 없이 대치 중인 상태에 접어든다.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사상자가 적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 '''[[리프 전쟁]]''' 프랑스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스페인이 모로코를 침공했지만 술탄과 손을 잡은 원 역사 리프 전쟁의 영웅 압드 엘 크림에게 격퇴당한다. * '''테살로니카 공세'''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테살로니카 방면 공세는 알자스-로렌 방어전의 전훈을 재빨리 흡수한 케말 파샤의 오스만군에게 막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꾸역꾸역 갈아넣어 승리하긴 했으나 손실이 너무 커 상처뿐인 승리로 끝난다. * '''알프스 전역''' 발칸 전선에서 발칸 연합군과 대치를 이어가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테살로니카 공세가 실패하여 여유가 생긴 틈을 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전선으로 파견된다.[* 초반에 전쟁의지를 잃어버린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억지력으로도 활용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거기에 동부전선에서 차출된 독일군을 더해 알프스 남북에서 동시에 공세를 취했지만 영국-프랑스 연합군도 방어전의 전훈을 얻었고 식민지에서 병력을 징병해와 동맹국군은 결국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 '''콩고 의용군''' 프랑스든 독일이든 [[프랑스 침공|자국을 통해 상대를 공략할 것]]임을 직감한 벨기에의 새 국왕 알베르 1세가 자국군의 열악한 사정을 알고 콩고에 병력자원을 요청하였는데 [[레오폴드 2세|선왕]]의 --본의 아닌-- 선의 덕분에 은혜를 갚겠다며 콩고에서 수많은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자원자라고는 해도 보급품에 병력수송에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어 실질적인 전력이라기보다 서류상 병력에 가깝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명목상 병력이 크게 불어난 덕분에 프랑스와 독일 양측이 벨기에 침공을 생각하지 않도록 억제기 역할은 해 주어 중립을 지킬 수 있었다. * '''[[갈리폴리 전투]]''' 개전 이후 꼬박 1년이 지나 어느 정도 위세를 회복한 로열 네이비가 오스만 육군이 발칸 반도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오스만이 과감하게 남은 여유 전력을 모두 갈리폴리에 투입하여 영국이 준비한 대규모 상륙부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 '''[[베르됭 전투]]''' 독일이 마타 하리를 버림패로 쓰면서 벌인 역정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어 프랑스의 메츠-베르됭 방면 일부 영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 '''[[니벨 공세]]''' 전쟁의 장기화와 창의단의 활동으로 전선의 사정을 알게 된 시민과 후방의 사정을 알게 된 병사들에게서 염전사상이 일어나자 프랑스가 준비한 공세. 하지만 공세의 입안자 니벨이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염전 분위기에 따른 정치적 압력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작전계획을 널리 알려 독일이 '힌덴부르크 계획'으로 감축한 병력을 요새화로 상쇄하는 등 대비를 하게 되어 공세는 1km당 4만명이라는 전사자를 남긴 채 실패했고, 이에 공세에 참가한 병력들을 중심으로 항명이 발생한다. * '''[[루덴도르프 공세]]''' 니벨 공세의 실패와 항명사태를 본 독일의 수뇌부가 원래 시행하려 했던 공세를 확대하여 추진한 공세. 하지만 수뇌부와 달리 병사들 사이에서는 원 역사와 달리 창의단의 도착에 의해 타 부대와 타 진영에서의 염전 분위기를 알고 있어 '힌덴부르크 계획'에 따른 병력감축을 전후복구의 준비로 해석하는 등 종전의 희망을 품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공세실패로 항명이 일어나자 희망은 확신이 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몇 차례의 의미 없는 공격 이후 독일군에서도 항명이 발생하였고, 원역사와 달리 창의단에 의해 전쟁에 회의를 품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를 선두로 다수의 초급장교들도 여기에 동조해 전 전선에 항명이 일어난다. * '''[[포템킨 반란]]''' 내전의 판세가 적군에게 기울어져 백군 수뇌부가 적군에 항복하자 흑해함대가 이에 반발하였으나 포템킨을 필두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흑해함대도 적군에 항복한다. * '''종전 협상''' 니벨 공세와 루덴도르프 공세를 계기로 동맹국과 협상국 양측에서 대규모 항명 사태가 발생하고 국내에서는 반전시위가 벌어져, 결국 양측 모두 전쟁 동력을 상실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키예프 정부의 항복으로 러시아 내전이 종식되면서 러시아가 다시 힘을 되찾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치머만 전보 사건이 없었기에 중립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은 미국이 금융을 바탕으로 유럽 국가들을 압박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모두가 반강제로 협상 테이블에 모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참전국들이 전쟁 원인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남탓을 해 협상이 지지부진했지만, 최익현의 설득을 듣고 빌헬름 2세가 왕관을 내려놓는 강수를 두며 대화의 물꼬를 텄고, 이 과정에서 이대로 유럽의 해가 끝나게 둘 수는 없다는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유럽연합|유럽이 단결해야 한다]]는 암묵의 합의가 이루어져 알자스-로렌 지역의 철강과 석탄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전후의 취약한 경제에 부담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축 합의 등 대타협이 이루어졌다. 전후엔 초기적인 [[유럽연합]]이 탄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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