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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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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 == 17세기의 영국에서는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던 시민 계급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시민 계급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던 국왕과 고위 귀족들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였고, 결국 이러한 충돌의 결과로 [[명예혁명|명예혁명(1688)]]이 발생하여 의회 민주주의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크를 비롯한 시민 계급의 지식인들은 고귀한 혈통이 주는 권위를 부정하고 누구나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덕성을 갖춘 지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지성인들이 참여하는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정책이 결정되는 국가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사회적‧사상적 변화는 프랑스와 북아메리카의 시민 계급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 [[미국 독립 전쟁|미국 독립 혁명(1775~1783)]]과 [[프랑스 혁명|프랑스 혁명(1789~1799)]]을 거치면서, 특권을 가진 왕과 귀족이 군림하던 정치 제도가 폐지되고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직접적 기원을 18세기 후반 급진적 정치개혁을 주장한 영국의 [[급진파(영국)|급진파]]라고 서술되어 있기도 했지만, 이것은 역사적 [[수정주의]]로써 가치가 있을지는 몰라도, 일반적으로는 유일한 정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다. 일단 고전적 자유주의가 17~19세기의 사상인데 그 근원을 '''18세기 후반'''에야 등장한 사상으로 잡는 것 자체가 선후 관계가 맞지 않는 [[무리수]]이다.[* 사실 급진주의의 본격적 시작은 19세기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오직 [[사회자유주의]]만을 자유주의의 정통으로 보며, 사회자유주의와 맞지 않는 사건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편협함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전 문서에서 근거로 들었던 [[신라대학교]]의 김명환이 2010년에 쓴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1458658|논문]]도 그런 예이다. 이 논문의 저자는 영국의 자유주의 전통이 17세기 중반 [[잉글랜드 내전|영국 내전]] 시기의 [[포퓰리즘]] 운동인 [[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D%8F%89%ED%8C%8C|수평파(Levellers)]]에서 시작되었다가 19세기 중반의 [[차티스트 운동]]과 1900년을 전후로 한 [[자유당(영국)|자유당]][* 특히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글래드스턴]] 시절의 자유당]으로 건너 뛰었다고 보는데, 이는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거의 전부를 넘겨버리는 발상이다. 명예혁명의 정치적 배경으로 [[가톨릭]] 색채를 띈 [[제임스 2세]]에 대한 [[개신교]] 상류층의 반발이 주목되곤 하지만, 종교적 충돌과 상류층간의 이전투구가 명예혁명의 전부는 아니었다.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제임스 2세가 각종 칙령을 마음대로 남발하는 통에 [[젠트리]], 상인, 사업가들이 재산 피해를 보자 이들 중산층[* 근대 시대의 역사를 설명할 때 나오는 중산층은 현대 경제를 설명할 때 나오는 중산층과는 의미가 다르다. 현대의 중산층은 소득 중위권을 말하지만, 이 시절의 중산층은 왕족, 귀족, 고위 사제가 형성하는 상류층의 바로 아래에 있는 계급을 말하는 것으로, 소득 중위권보다는 상당히 부자였다.] 사이에서 왕의 인기가 급락했고, 결국 왕을 몰아내기 위해 중산층이 귀족들과 연합했던 사실에 있다. 당연하겠지만 명예혁명의 가장 큰 의의는 개신교 세력의 승리나 [[휘그당]]의 집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 직후에''' 중산층의 요구에 따라 [[권리장전]]이 통과되고 이를 통해 의회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치주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 데에 있다. 명예혁명 이후의 자유주의는 계속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 법치주의, 표현의 자유, 즉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본 요소들이 확립되지 않았다면 이런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명예혁명이 성공한 뒤에 정권을 잡은 휘그당의 거물들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려 했을 때 이것을 저지한 세력도 명예혁명에 동조했던 중산층들이었다.[* 출처: [[대런 애스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2012.] 물론 명예혁명을 통해 확보된 [[참정권]]은 오직 중산층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자유주의가 [[보통선거]]와 동일한 것은 아니며, 명예혁명은 유럽에서 [[절대왕정]]이 확립되던 시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서 [[갑툭튀]]한 사건이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한술 밥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며,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서유럽의 자유주의가 처음에는 중산층 남성에서 시작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다른 계층으로 확대되었으니, 주류 의견에서 명예혁명을 고전적 자유주의의 정치적 '''시작점'''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명예 혁명 이후 [[윌리엄 3세]]가 가톨릭교도의 참정권을 제한하면서 종교적 자유가 침해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16세기 [[메리 1세]] 시절부터 가톨릭이 집권할 때마다 영국이 피바다가 된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은 데다가,[* 출처: 사이먼 샤마(Simon Schama),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1583905|<<사이먼 샤마의 영국사(A History of Britain )>>]], 2000~2002.] 당시에 영국이 가톨릭 국가들과 전쟁 중이었다는 현실적 한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명예혁명은 혁명을 통해 중산층이 주장한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가 성립되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세세한 사안 하나하나가 모두 현대적 자유주의와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고전]]은 현대인의 관점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고작 10%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찾았다고 해서 나머지 90%까지 버린다면, [[장자크 루소|루소]]나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의 저작들도 현대 사회에서는 [[불쏘시개]] 이상의 가치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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