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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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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사 이후 관련자 처벌과 사후 신원 및 복권 == 아울러 이 시기를 이후로 광해군의 완전한 흑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폐모론 때의 일을 생각해보면 흑화도 제대로 흑화가 되어버렸다.] 한편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이끌었던 소북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죽음 및 서인과 남인들의 정계 축출마저 방관하며, 광해군과 대북의 옥사와 그에 대한 처리와 정책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로 인해 서인과 남인은 완전히 대북과 소북에게 실망해버렸다. 결국 서인과 남인은 광해군, 대북, 소북을 몰아내기 위해 [[인조반정]]의 기반을 마련하고야 말았다. 한편 인조반정이 성공한 직후에 서인과 남인은 광해군 시기의 과거 청산을 위해 북인 처벌 문제를 논의했다. 광해군 시기에 광해군의 정책에 반대하여 유배를 간 북인은 살렸지만, 북인 정권 시절, 실력자였거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세력들은 죄가 크게 여겼기 때문에 단호하게 처벌했다. 한편 광해군과 북인 정권 시절에 옥사로 유배를 가며 목숨을 잃은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대군|능창군]]은 죄가 벗겨지고 신원이 되면서 명예를 회복했다.~~임해군은 왜...~~ 이 무렵, 이이첨, 유몽인, 정인홍, 기자헌, 류희분을 비롯한 북인 실력자들이 처형되었고, [* 다만 [[기자헌]]과 [[유몽인]]은 온건파라 그런지 반정 당시에는 살았지만 유몽인은 유응형이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모함을 해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 당했고 기자헌 역시 이괄의 난이 터지자 사사당했다.] 박승종은 처벌을 당하기 전에 자결했다. 이러한 엄격한 북인 처벌에 반발한 박홍구, 유효립, 임취정 등은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거사를 세웠지만, 이내에 발각이 되어서 처형되었다. 이후에도 북인들은 1629년에 후금과 내통해 반역을 꾀했다가 들통 난 양경홍의 역모사건과 1631년에 발각된 정한추대사건[* 이 역모에 정인홍의 조카들도 참여하였다.]등을 꾸몄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렇게 해서 북인 정권 시절, 옥사와 관련이 깊었던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임취정을 비롯한 북인 영수들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처벌되었는 바람에 북인은 영향력이 많이 약해지고 완전히 사멸당하고 말았다. 이후에 살아남은 [[남이공]]과 [[김신국]]을 중심으로 북인을 이끌다가 남인에게 흡수되었다.[* 그나마 이들에 의해서 한동안 유지될 수 있던건 김류 때문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인조시절 초기는 공신들 중 가장 거두가 이귀와 김류였다. 그런데 왕의 총애는 김류가 더 많이 받았지만 정작 집권당이라 할 수 있는 서인 내에서는 김류가 더 약해서 부족한 세력을 보충하기 위해 북인, 남인과 연대한 것이 아닌가 말하기도 한다.][* 반대로 [[정창연]]의 가문처럼 서인으로 전향하여 오히려 중추가 된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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