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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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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사의 발단과 진행 == 그러다가 어느 날, [[강변칠우]][* 그들이 만난 정자의 이름을 무륜정(無倫亭)이라고 지었다. 서얼 출신이라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7명의 서자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허홍인, 박치의, 이경준, 김경손이 이룬 모임. 심우영은 허균의 처외삼촌이며, 1617년 기준격의 상소에 의하면 허균이 공주 목사일 때 심우영과 이재영과 매우 친한 관계였다고 하며, 심우영과 서양갑은 허균이 "친히 기른 자들"이었다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912024_006|#]] ]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이 [[문경새재|조령]]에서 은 상인을 죽이고 은 6,700냥을 약탈한 형사 사건이 일어난다. 1608년,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김경손은 서얼 허통의 연명 상소를 올린 적이 있으나, 이가 거절된 이후부터 그들이 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냉소로 바뀌어갔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해졌다. 그들은 점차 과격해져서 도적질 따위를 일삼았는데 은 약탈 사건도 도적질의 일환이다. 그 무렵 대북파는 왕위 계승권 분쟁으로 장차 위협이 될 수 있는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대북의 영수인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 등은 이 사건을 위조하여 그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대북파는 박응서로부터 허위 자백을 하도록 설득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응서는 박치의, 심우영 등과 역모를 모의했으며, 은 약탈은 같이 역모를 일으킬 무신들과의 교류에 필요했기 때문에 저질렀다는 것이다. 은 등을 뇌물로 주어 정협을 훈련대장에 앉히고 역모에 성공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한 뒤 소성대비([[인목왕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옥사가 시작되었다. 봉산옥사에 이어 광해군이 [[친국]]한다. 그러나 서양갑이 맨 처음 역모를 모의했던 이는 소성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라고 증언했다. 단 이것 역시 박응서의 자백처럼 거짓으로 보인다. 서양갑은 본디 박응서의 말에 완강히 부인했지만 어머니와 형이 고문 끝에 죽고 난 뒤 이 증언하기 전 날 "내가 나라를 뒤흔들어 어머니와 형의 원수를 갚으리라"라는 말을 했다는 점에서 보면 어머니와 형의 죽음에 분노하여 일 한번 제대로 키워 원한을 갚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정협 또한 역모에 고명대신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증언으로 사건을 키웠다. 그렇게 고명대신들이 끌려오게 되었는데, 대신 중 한 명인 박동량은 김제남과 인목왕후가 [[의인왕후]]의 무덤에서 저주를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대해서 사관은 인목왕후측 인물들이 의인왕후의 능에 저주를 한 것은 거짓이지만 선조가 병에 걸리자 그 이유가 공빈 때문이라는 무당의 망언을 듣고 "[[인목왕후]]측 인물들 즉, 영창대군의 노비들이 [[공빈 김씨]]([[광해군]]의 친모)의 무덤에서 저주 행위를 시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임해군의 방해로 공빈의 무덤에 저주 행위를 시도한 것이 미수에 그쳤다"라고 기록했다. [[광해군일기]]를 [[서인]] 일파에서 서술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인목왕후측 인물들이 공빈 김씨의 무덤에서 저주행위를 시도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애초에 [[인목왕후]]의 왕비 시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정국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최소한의 처신도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친정아버지 [[김제남]] 역시 정치적 능력도 좋지 않으면서 대놓고 부정축재를 하며 [[광해군]]을 자극했기에, 인목왕후의 저주 건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의인왕후]]는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무척 아끼고 세자가 되는 데에도 적극 지지했으며, 광해군 역시 얼굴도 모르는 친어머니 [[공빈 김씨]] 대신에 [[적모]]인 의인왕후를 무척이나 따르며 친모처럼 모셨다. 그런 의인왕후로도 모자라 친모 공빈 김씨까지 저주한 사실이 맞는지는 둘째치더라도, 그러한 정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제남]]과 인목왕후 부녀는 광해군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된 셈이며, 저주를 하려던 게 정말 사실이라면 김제남 일가는 죽어마땅한 죄를 지은 것이 맞다. 다만 사관의 평에 의하면 "미련하게 미혹된 노비들에 의해 꾀해진 지극히 사소한 일이며 궁가의 노복들이 서로 투기하고 미워한 나머지 나온 이런 말들은 대개 의거할 가치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옥사가 처음 일어났을 때 척리(戚里)의 집에서 많이들 빗대어 말한 것을 박동량이 마침내 헛소문을 가지고 부연해 말한 것이며 인목왕후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며[* 무당의 망언에 휘둘린 멍청한 노비들이 윗전의 허락도 받지않고 개인적으로 벌인 만행에 불과하며 심지어 저 영창대군의 노비들이 저주를 행했다는 증언도 신빙성 없는 헛소문인데 이를 박동량이 혼자 살아남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는 바람에 옥사로까지 발전되었다는 의미다.] 실드쳐 주기는 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0505016_015|실록 참조]][* 참고로 조선시대의 사관은 특별히 개인적인 호불호나 정치성향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평가하며 예외가 있는 경우도 간접적으로나마 그렇게한다. 인목왕후는 그런점에서 이례적으로 실드나 다름없는 평가가 있는 것.][* 인목왕후가 지능과 인성 자체가 결함되어있는 인물은 아닌 점, 그리고 그에 반비례하여 눈치가 매우 떨어지며 감정적이고 충동적인걸 생각하면 사관을 비롯한 당대 궁궐 안팎의 구성원들도 인목왕후의 별난 성격적 특징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 폐모에 반대를 하는 인물들이 많았고, 유폐 이후에는 궁인들과 박승종 등이 지키고 감싸주는 기록들이 있는 것을 보아 인목왕후는 눈치가 없는 것만 제외하면 오히려 인격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짜로 저주를 할정도로 인격적 문제가 있으면 폐모론도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을 것이고, 객관적인 평가와 기록을 해야하는 사관들이 굳이 옹호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을 거미다.] 그렇게 김제남과 그의 세 아들이 사사되면서, 인목왕후의 친정인 [[연안 김씨]] 가문은 거의 멸문되다시피 한다. [[영창대군]] 또한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1년 만인 [[1614년]] 유배지에서 의문사한다. 그리고 [[남인]] 혹은 [[서인]]이었던 [[신흠]], [[서성]], 한준겸,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허욱]], 한응인, 심희수 등도 몰락하여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영의정과 좌의정도 대북세력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육조판서 또한 대북세력에 완전히 넘어갔다. 이이첨이 예조판서 자리를 차지했다. 다만 우의정이 서인 무당파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고 1615년을 기점으로 우의정 또한 다시 대북세력에 넘어간다. 다만 이 당시까지의 영의정은 대북에서는 어느 정도 온건파였던 기자헌이지만, 폐모론 이후로는 영의정 또한 대북에서 강경파인 정인홍이 차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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