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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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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사 이전의 정치 상황 ==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했다. 그리고 그의 지지 세력이었던 대북의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이 실세로 떠오른다. 그들이 집권하자 대북은 소북의 영수이자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류영경]]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유영경까지는 어쩔 수 없던게 워낙 대놓고 광해군의 계승을 방해하려 한지라 같은 소북들조차 줄을 바꿔달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북은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을 비롯한 소북에게 완전히 우위를 주지 못했고, 정권의 주도권을 제대로 잡지 못해 [[삼정승]]은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심희수를 비롯한 [[서인]]과 [[남인]]계 대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611년에 [[성균관]]이 [[김굉필]], [[정여창(1450)|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비롯한 [[사림파|사림]] 출신인 5명의 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오현종사). 그러자 이언적과 이황이 [[명종(조선)|명종]] 시절 때 소윤에게 협력하면서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를 비루하게 본 [[정인홍]]이 회퇴변척소로 이언적과 이황에게 성균관이 제사를 지내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회퇴변척소를 기점으로 조정에서 여론을 모이기 시작하더니 1612년에 [[봉산옥사]]가 터지면서 대북은 정권의 우위를 서게 되었다. 그래도 광해군은 서인과 남인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 위성, 익사, 정운, 형난공신을 서인, 남인, 소북, 대북에게 골고루 나눠주면서, 서인과 남인의 불안감을 해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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