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비교)

r11 vs r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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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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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고인)]
3
[include(틀:섭종)]
1
[[분류:소련]][[분류:1922년 설립]][[분류:1991년 멸망]][[분류:과거의 공산주의 국가]][[분류:과거의 핵무기 보유국]][[분류:인터넷 밈/러시아]][[분류:러시아의 역사]][[분류:리투아니아의 역사]][[분류:라트비아의 역사]][[분류:몰도바의 역사]][[분류:벨라루스의 역사]][[분류:아르메니아의 역사]][[분류:아제르바이잔의 역사]][[분류:에스토니아의 역사]][[분류:과거의 연맹체 및 연방국가]][[분류:우즈베키스탄의 역사]][[분류:우크라이나의 역사]][[분류:조지아의 역사]][[분류:카자흐스탄의 역사]][[분류:키르기스스탄의 역사]][[분류:타지키스탄의 역사]][[분류: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분류: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분류:무신론]][[분류:여러 대륙에 걸쳤던 국가]][[분류:여러 민족 중심의 다민족국가]][[분류:과거의 북아시아 국가]][[분류:과거의 동유럽 국가]][[분류:과거의 북유럽 국가]][[분류:과거의 서아시아 국가]][[분류:과거의 중앙아시아 국가]][[분류:과거 미국의 경제제재 대상 국가]][[분류:과거의 여행금지 지역]]
2
##@[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JoblessLavishBillowyExistence, 합의사항1=국가명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을 각주 처리하기, 토론주소2=CurvedTenderBroadCopy, 합의사항2=표제어를 소련으로 하기, 토론주소3=FoamyWoebegoneNonchalantHot, 합의사항3=하단 참조)]
3
##@||<bgcolor=#2e8b57><tablewidth=100%><tablebordercolor=#2e8b57> {{{#ffffff '''토론 합의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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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ffffff,#1c1d1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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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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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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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bgcolor=#ffffff,#1c1d1f>{{{#000000,#eaea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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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의사항3
9
##@ * [[소련/경제/역사]]에서, 소련 및 소련 경제의 몰락에 대해, 단순히 저유가만이 아닌 그 원인 자체에 대해 [[MPOV]]를 적용한다. 각 관점의 서술은 별도의 문단·소문단에 작성한다.
10
##@ * [[https://namu.wiki/thread/JoblessLavishBillowyExistence#158|이전 합의안]]을 유지한다.
11
##@ * 전항의 연장선에서, 해당 합의안은 국가 틀을 제외한 나머지 문단하[* 개요 문단을 포함한다.]의 소련의 국명 서술 형태에 제한을 받지 아니하고 서술하도록 허용하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의 국호 또한 소련 및 소련의 종속 문서에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12
##@ * 소련 및 [[소련/경제]] 문서에서 '''소련·소련 경제의 몰락의 원인'''에 대해 1 ~ 2문단 가량의 문단으로 간략하게 [[NPOV]]로 서술하며, 그 논조는 '''소련 및 소련 경제의 붕괴 원인에 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로 한다.
13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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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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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소련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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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bgcolor=#ffffff,#1c1d1f><bgcolor=#cd0000,#cd0000><color=#ffd700,#ffd700> {{{+1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직역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사실 더 정확하다. 'Сою́з'라는 단어는 '연맹, 연합, 조합, 결사'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 가능하며 [[삼제동맹]], [[유럽연합]]도 'Сою́з'로 번역된다. 영문 국명에서도 '연방'의 의미에 더 가까운 'Federation'보다 '연맹'의 의미에 가까운 'Union'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1991년 주한소련대사관에서도 쓰인 표현이며, 북한에서는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이 공식 호칭이다.[br]굳이 [[대한민국 표준어]]에서만 '연방'으로 번역한 이유로는 두 가지 정도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소련이 사실상 이름만 '연맹체'이지 거의 '연방'급으로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 [[대한민국]]과 적대적 관계였던 소련의 국명을 번역함에 있어, 굳이 적성국의 표기를 곧이곧대로 따를 필요가 없었으리라는 점이다. 즉 두 가지 이유를 종합해 보면, 대한민국으로서는 "소련이 무슨 사회주의의 뜻을 갖고 자유 의지로 공화국들이 결성한 '연맹체'냐, 사실상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가 중앙 집권적으로 통치 중인 '연방체'지."라고 여겨 국명을 독단적으로 '연방'으로 번역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br]{{{-1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br]{{{-1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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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gcolor=#f0f0f0,#1f2023><height=150> [[소련/국기|[[파일:소련 국기.svg|width=75%]]]] ||<width=50%><bgcolor=#f0f0f0,#1f2023> [[소련/국장|[[파일:소련 국장.svg|width=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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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rowbgcolor=#cd0000,#cd0000><rowcolor=#ffd700,#ffd700> '''국기''' || '''국장''' ||
19
||<-3>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cd0000,#cd0000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br]{{{#F8C300,#F8C300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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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gcolor=#cd0000,#cd0000><color=#ffd700,#ffd700> '''상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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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gcolor=#cd0000,#cd0000><color=#ffd700,#ffd700><width=25%> '''국가''' ||<-2>'''{{{-1 [[인터내셔널가/러시아어|{{{#cd0000,#cd0000 Интернационал}}}[br]{{{#F8C300,#F8C300 인터내셔널가}}}]]}}} ^^([[1922년]] ~ [[19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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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소련 국가|{{{#cd0000,#cd0000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гимн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br]{{{#F8C300,#F8C300 소비에트 연방 국가}}}]]}}} ^^([[1944년]] ~ [[1991년]])^^''' ||
23
||<bgcolor=#cd0000,#cd0000><color=#ffd700,#ffd700> '''국화''' ||<-2>'''[[해바라기|{{{#F8C300,#F8C300 해바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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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gcolor=#cd0000,#cd0000><color=#ffd700,#ffd700> '''위치''' ||
25
||<-3> [[파일:소련 위치.svg|width=200%]] ||
26
||<-3><bgcolor=#ffd700,#ffd700><color=#cd0000,#cd0000> '''1922년 12월 30일 ~ 1991년 12월 26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 대통령이 25일에 하야하였고, 26일에 연방이 붕괴되었다.][br]'''(68년 11개월 26일)''' ||
27
||<-2><rowbgcolor=#cd0000,#cd0000><width=50%><rowcolor=#ffd700,#ffd700> ''' [[러시아 혁명|{{{#ffd700,#ffd700 성립}}}]] 이전''' ||<width=50%> '''[[소련 붕괴|{{{#ffd700,#ffd700 해체}}}]]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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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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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text-align: left"
30
\ [include(틀:깃발, 문서=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명=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 출력=러시아 SFSR)][br][include(틀:깃발, 문서=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명=우크라이나 SSR 국기 (1919-1929), 확장자=png, 출력=우크라이나 SSR)][br][include(틀:깃발, 문서=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명=벨로루시 SSR 국기 (1919-1927), 확장자=png, 출력=벨로루시 SSR)][br][include(틀:깃발, 문서=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파일명=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국기(1925-1936), 출력=자캅카스 SFSR)][br] [include(틀:국기, 국명=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출력=부하라 PSR)][br][include(틀:국기, 국명=호라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출력=호라즘 SSR)]}}}}}}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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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text-align: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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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clude(틀:깃발, 문서=러시아, 파일명=러시아 국기(1991-1993))][br][include(틀:깃발, 문서=우크라이나, 파일명=우크라이나 국기(1991-1992))][br][[파일:벨라루스 국기(1918, 1991–1995).svg|width=27]] [[벨라루스]][br][include(틀:깃발, 문서=리투아니아, 파일명=리투아니아 국기(1988-2004))][br][include(틀:국기, 국명=라트비아)][br][include(틀:국기, 국명=에스토니아)][br][include(틀:깃발, 문서=조지아, 파일명=조지아 국기(1990-2004))][br][include(틀:국기, 국명=아르메니아)][br][include(틀:국기, 국명=아제르바이잔)][br][include(틀:국기, 국명=몰도바)][br][include(틀:깃발, 문서=카자흐스탄, 파일명=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br][include(틀:국기, 국명=우즈베키스탄)][br][include(틀:깃발, 문서=투르크메니스탄, 파일명=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73-1991))][br][include(틀:깃발, 문서=키르기스스탄, 파일명=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br][include(틀:깃발, 문서=타지키스탄, 파일명=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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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gcolor=#cd0000,#cd0000><color=#ffd700,#ffd700>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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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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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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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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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c1d1f> [[1922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자캅카스]]·[[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호라즘]]·[[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부하라]]의 통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연방 성립]]''' [br] [[1928년]] 제1차 [[5개년 계획#s-2]] 수립 [br] [[1935년]] [[대숙청]] (~[[1938년]]) [br] [[1936년]] 스탈린 헌법 제정 [br]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1945년]])[* [[폴란드 침공]]부터.] [br]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생애#s-2.2.2|스탈린의 격하]] [br]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br]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 [br] [[1977년]] 브레즈네프 헌법 제정 [br]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89년]]) [br] [[1985년]]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br]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br] [[1991년]] [[8월 쿠데타]] | '''[[소련 붕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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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gcolor=#cd0000,#cd0000><color=#ffd700,#ffd700> '''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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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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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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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c1d1f><colbgcolor=#cd0000,#cd0000><colcolor=#ffd700,#ffd700><width=25%> '''영역''' ||<-2>[[동유럽]], [[북유럽]], [[중앙아시아]], [[북아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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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 ||<-2>[[모스크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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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적''' ||<-2>22,402,200km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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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경국'''[*A 붕괴 직전.] ||<-2>~~[include(틀:국기, 국명=리투아니아)]~~[br]~~[include(틀:국기, 국명=라트비아)]~~[br]~~[include(틀:국기, 국명=에스토니아)]~~[br][include(틀:국기, 국명=핀란드)][br][include(틀:국기, 국명=폴란드)] [br][include(틀:깃발, 문서=체코슬로바키아, 파일명=체코 국기)][br][include(틀:국기, 국명=헝가리)][br][include(틀:국기, 국명=루마니아)][br][include(틀:국기, 국명=튀르키예)][br][include(틀:국기, 국명=노르웨이)][br][include(틀:국기, 국명=이란)][br][include(틀:깃발, 문서=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파일명=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국기(1987–1992))][br][include(틀:국기, 국명=중국)][br][include(틀:국기, 국명=몽골 인민공화국)][br][include(틀:국기, 국명=북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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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인문 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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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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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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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c1d1f><width=25%><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인구'''}}} ||<-2>293,047,571명^^(1991년)^^ | 세계 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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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민족'''}}} ||<-2>{{{-1 [[러시아인]] 51%, 우크라이나인 15%, 우즈베크인 6%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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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언어'''}}} ||<-2>{{{-1 [[러시아어]][* [[블라디미르 레닌]]은 국가 주도의 [[공용어]]라는 개념을 반대했고 [[러시아어]]는 각 민족 간의 소통을 위한 언어였을 뿐이다. 정작 러시아에서도 1990년에서야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 | [[라트비아어]] | [[루마니아어]] | [[리투아니아어]] | [[벨라루스어]] | [[아르메니아어]] | [[아제르바이잔어]] | [[에스토니아어]] | [[우즈베크어]] | [[우크라이나어]] | [[조지아어]] | [[카자흐어]] | [[키르기스어]] | [[타지크어]] | [[투르크멘어]] | 각 지역별 언어[* 구성 공화국별로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등 구성 공화국 고유 언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었고 구성 공화국 내 자치구역에서도 별개 공용어 지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러시아어]]가 공용어로서 실질적으로 기능했기 때문에 이 언어들은 제2국어, 제3국어 역할에 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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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cd0000,#cd0000> [[언어별 명칭|{{{#ffd700,#ffd700 '''언어별 명칭'''}}}]] ||<-2>{{{-1 [[영어]][* Soviet Union], [[중국어]][* 苏联], [[러시아어]][*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54
||<bgcolor=#cd0000,#cd0000> [[국교|{{{#ffd700,#ffd700 '''국교'''}}}]] ||<-2>{{{-1 없음([[국가 무신론]])}}} ||
55
||<bgcolor=#cd0000,#cd0000> [[소련/종교|{{{#ffd700,#ffd700 '''종교 분포'''}}}]] ||<-2>{{{-1 [[무종교]] 60%[* 다만 명목상의 수치일 뿐 실제로는 정교회를 믿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다.], [[기독교]]([[정교회]]) 20%, [[이슬람]] 10% 등}}} ||
56
||<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군대'''}}} ||<-2>[[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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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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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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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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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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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c1d1f><width=25%><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정치 체제'''}}} ||<-2>[[공화제]], [[민주집중제]], [[연방제]], [[일당제]] → [[대통령중심제]], [[다당제]][* 소련 말기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다당제]]가 승인되었다.], [[양원제]][* 인민대표회의가 최고 소비에트를 선출하면서 형식상의 양원제가 아닌 실제 양원제로 운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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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국가원수'''}}} ||<-2>상무회 주석(서기장)[* 소련은 15개 국가가 뭉친 연합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SFSR]]을 제외한 14개 공화국별로 서기장이 있었다. 러시아 SFSR만은 소련 공산당의 직할이었다가 [[1990년]] [[6월 19일]]에야 당중앙과 별도의 [[https://en.wikipedia.org/wiki/Communist_Party_of_the_Russian_Soviet_Federative_Socialist_Republic|공화국 당]]과 서기장직이 생겼다. 여담으로 구소련권 국가 지도자들 중 각 공화국의 서기장을 지낸 인물들이 꽤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카자흐 SSR 공산당 1서기장 출신이었던 카자흐스탄 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있다.] → 대통령 ||
63
||<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정부수반'''}}} ||<-2>인민위원장 → 장관회의 주석 → 총리[* 인민대표회의에서 인준되지 않은 단순 임명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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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역대[br]최고지도자'''}}} ||<-2>[[블라디미르 레닌]][br][[이오시프 스탈린]][br][[게오르기 말렌코프]][br][[니키타 흐루쇼프]][br][[레오니트 브레즈네프]][br][[유리 안드로포프]][br][[콘스탄틴 체르넨코]][br][[미하일 고르바초프]] ||
65
||<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여당'''}}} ||<-2>[include(틀:소련 공산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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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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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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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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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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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c1d1f><width=25%><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경제 체제'''}}} ||<-2>집산주의 및 국유재산제 → 부분적 [[자본주의]] 및 사유재산제[*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페레스트로이카]] 도입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 집권 초기에도 [[NEP#s-2|신경제정책(NEP)]]라는 이름으로 시장경제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
71
||<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GDP[br](명목)'''}}} ||<-2>$ 2조 2000억^^(1985년, 추정치)^^ | 세계 2위 ||
72
||<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1인당 GDP'''}}} ||<-2>$ 6,871^^(1990년)[* 원래는 소련답게 빠르게 올랐으나 공산주의의 한계 때문에 침체되어 6,871달러가 됐다.]^^ $ 9,200^^(GNP)^^ ||
73
||<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통화'''}}} ||<-2>[[소련 루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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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외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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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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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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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78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c1d1f><width=25%><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대한수교현황'''}}} ||<-2>[[대한민국]]: 1990년 9월 30일 수교[br][[북한]]: 1948년 10월 12일 수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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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UN 가입'''}}} ||<-2>1945년 ||}}}}}}}}} ||
80
||<-3><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ffd700,#ffd700 '''ccTLD'''}}}]]'''}}} ||
81
||<-3> '''.su'''[*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사용 중이다.] ||
82
||<-3><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국가코드'''}}} ||
83
||<-3> '''SU'''[* Soviet Union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러시아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IATA]] 코드가 그것이다. [[소련 붕괴]] 직후의 러시아 연방도 이 코드를 잠시 사용한 적이 있다.], '''SUN, 810''' ||
84
||<-3><bgcolor=#cd0000,#cd0000> {{{#ffd700,#ffd700 '''국제 전화 코드'''}}} ||
85
||<-3> '''+7'''[* 이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이 이 국제 전화 코드를 사용하게 된다.] ||
86
4 87
[목차]
5 88
[clearfix]
6
7 90
== 개요 ==
8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한국 정부에서 칭했던 명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이었으나, 실제 원어 명칭과 괴리가 있는 번역이다.]은 1922년부터 1991년까지 존속하였던 국가 연합이었으며 냉전 시절 세계에서 미국과 함께 유이한 초강대국이었다. 낭만이 넘치던 20세기의 주인공 중 하나를 담당하였으나 1986년 체르노빌 사고,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경제난에 시달리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동년도 12월에 해체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91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이라고도 불린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1990년 한소수교 이전부터 일본을 거쳐 들어온 번역으로 1990년 한소수교 이래 소련이 이 국명의 사용을 인정하면서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표기다.][* [[대한민국 표준어]]로는 소련도 연방, 러시아도 연방이라고 번역한다. 다만 소련과 러시아의 국명 차이는 다음과 같은데, 소련은 실제로 연맹 단위(우크라니아, 벨라루스 등의 '공화국(Республика)'이 연합하여 결성함.)였지만 러시아는 단일 국가라는 점이다. 즉 소련은 여러 국가가 모인 연합 국가였던 데에 반해, 러시아는 완전한 단일 국가다. 소련은 (형식적이었으나마) [[국가 연합]]의 형태를 띠는 국가였으며, 이러한 점 때문에 일부 매체나 1991년 주한소련대사관에서는 자국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국호로 표기한 적이 있었고, 북한에서는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이 공식 국명이다. 물론 중앙 집권적 성향이 강했던 소련은 실제로 국가 연합이나 연맹보다는 연방 체제에 가깝게 통치되었다. 한편 '소련'의 러시아어 표현에 들어가는 'Сою́з'라는 말은 '연맹, 연합, 조합, 결사'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중의적 표현이다.]([[소비에트]][[社]][[會]][[主]][[義]][[共]][[和]][[國]][[聯]][[邦]],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통칭 '''소련'''([[蘇]][[聯]], Советский Союз){{{-2 [*기타 СССР, USSR]}}}은 [[20세기]]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러시아 내전]]을 거치며 건국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국가의 소멸'''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이론상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기도 하지만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가 맞는가"라는 질문도 학자들 사이에서도 시각이 전부 다르고 논쟁을 부르는 주제이다. 소련은 과거부터 엘리트층과 대중을 가리지 않고 통상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라고 널리 불리고 있으므로 소련이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라는 것이 아주 왜곡된 정의는 아니다. 참고로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는 [[프랑스]]의 [[파리 코뮌]]인데,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고 기존 정부를 대체한 것도 아니지만 이는 소련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로, [[냉전]] 시절 [[제2세계]]의 종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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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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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첫 사회주의 국가로, 러시아 제국 붕괴 이후 적백내전을 거친 뒤 블라디미르 레닌의 손에 의해 건국되었다. 사회주의의 아버지인 마르크스마저도 학문상으로만 주장했던, 진짜 '사회주의' 국가를 실현시켜 버렸기 때문에 당시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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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되어 건국 69주년이 되기 나흘 전인 [[1991년]] [[12월 26일]]에 [[소련 붕괴|붕괴되었고]] 붕괴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22,402,200km²)[* 이는 세계사에서도 손꼽히는데 [[대영제국]],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이어 역사상 네 번째로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가 소련이다.]와 세 번째로 많은 [[인구]](1989년 기준 286,730,819명)[* 당시 1위와 2위는 당연히 [[중국]]과 [[인도]]로, 각각 1,134,414,723명과 852,012,673명의 인구를 가졌다.]를 가진 국가였다. 현대 [[러시아|러시아 연방]]이 과거 소속되어 있었던 상위 국가였으며[* 소속 당시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또는 RSFSR)이라는 국명으로 존재하였다.] [[냉전]] 시기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강대한 [[국력]]을 지녔던 국가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러시아 연방]]도 [[강대국]]이긴 하지만 소련 시절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상당히 쇠퇴하였다. 현재 러시아의 강대국 지위는 소련 시절 국력과 지위를 바탕으로 유지하는 것이고, 소련의 전신인 [[러시아 제국]]도 소련만큼의 위상과 국력은 지니지 못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세계 오대양 육대주, 모든 문명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타국들의 국력과 군사력을 크게 압도하여 막강한 정치외교력을 발휘했으며, 세계인들의 세계관을 장악한 진정한 [[초강대국]]의 정의에 부합하는 국가'''는 아직까지도 미국, 소련, 대영제국까지 셋 뿐이다. 당장 초강대국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윌리엄 폭스(William T. R. Fox)도 본인의 저서 <The Super-Powers: [[미국|The United States]], [[대영제국|Britain]], and '''the Soviet Union''' - Their Responsibility for Peace> (초강대국 : 미국, 영국, 소련 - 평화에 대한 그들의 책임)에서 초강대국은 저 셋이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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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레닌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나름 민주주의를 하려는 시늉을 하였지만, 스탈린이 집권하고 트로츠키가 축출되고 레닌이 뒷방 늙은이로 밀려나자, 본격적으로 권위주의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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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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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tablebgcolor=#fff,#1c1d1f><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align=center>[youtube(dk_jCX4avYQ, start=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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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cd0000,#cd0000> '''{{{#F8C300,#F8C300 소련의 국가 -}}} [[소련 국가|{{{#F8C300,#F8C300 소비에트 연방 국가}}}]]'''[br]{{{-1 {{{#F8C300,#F8C300 (1980년대 소련 중앙텔레비전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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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3월 혁명과 10월 혁명이라는 2개의 과정을 거쳤다. 3월 혁명은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고, 이어진 10월 혁명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러시아 공화국을 전복하여 마르크스주의 국가를 세우자 이에 대한 전국적인 반발로 [[러시아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 도중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일가들은 [[로마노프 왕가의 몰살|볼셰비키에게 몰살당하는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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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 끝나가기 시작할 부터 냉전의 주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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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에서 결국 볼셰비키 이끄는 적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이들에게 대항하던 백군 및 반군 잔당들이 모조리 소탕되며 1922년, [[러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공화국|우크라이나 SSR]],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의 공화국|벨로루시 SSR]],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자캅카스 SFSR]]를 중심으로 소련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이들은 [[소련 공산당]]의 일당 체제를 중심으로 계획경제, 생산 수단의 국유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원칙을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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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경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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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기술 면에선 미국을 압도한 적이 존재했고, 자존심 구긴 미국이 맞받아치며 경쟁구도를 형성했다. 이러한 일련의 기술경쟁을 우주경쟁(Space Race)이라고 하는데, 이 당시 기술의 발전 속도는 지금봐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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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오시프 스탈린]] 시기는 소련 체제가 공고화됨과 동시에 극단적인 독재와 [[대숙청]]으로 대표되는 공포 정치로 기억된다. 스탈린은 농업 집단화와 산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며 제 성장을 이끌어 냈지만, 수백만 명이 희생으로 흐른 피가 대가로 따랐다. 동시에 [[대숙청]], [[굴라크]], 언론 통제 등은 소련을 폭압적인 체제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은 [[나치 독일]]에 맞선 [[독소전]]에서 큰 희생을 치룬 뒤 극적으로 승리했고 이후 [[초강대국]]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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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체를 우주 공간에 보내고, 거기서 인공체를 분리시켜 궤도에 올리기 위해서고출력 기술과 탄도분리시키는 기술이 동시필요했기에 둘을 한꺼번이용하는 ICBM 기술필수적이었다. 알래스카 덕에 소련 본토에 대한 타격이 폭격기나 중거리 미사일로도 가능했던 미국에 비해, 미국 본토까지 반격의 여지 없이 한방에 두드려야 했던 소련은 비대칭 전력 확보를 위해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ICBM 개발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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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세계는 [[미국]]의 [[제1세계]]와 소련의 [[제2세계]]라 이념적 진영으나뉘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표방한 미국맞서, 소련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세계확산시키려 했다. 초강대국의 갈등은 [[냉전]] 체제를 형성하며 [[베를린 장벽]], [[6.25 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 수많은 세계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소련은 동유럽성국들을 통동구권을 형성했고, 군사동맹체인 [[바르샤바 조약 기구]]로 서방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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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소련 발사체 기술이 적으로 미국에 많이 앞서는 편이었고, 결국 '''1957년''' 세 최초인공위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렸다. 미국인들은 자머리 위로 하루에도 번씩 소련의 인공위성날아간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충격시작에 불과했다. 탄력을 받은 소련은 소유즈 로켓에 강아지이카를 실어보내 최초우주에 생명체보내더니, 기어이 유리 가가린태운 채 날려보최초로 사람을 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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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70년대 이후 소련 경제는 점차 되기 시작했다.획경제경직, 관료주의의 비효율, 낙후, 국민의 불만 증가 누적되었고, 군비 경쟁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1985년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를 타개하고자 [[글스노스트 & 페레스트이카|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추진했으나, 오히려 체제의 모순드러 민족주의와 분리의를 자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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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을 느낀 미국이었지만 어쩔 도리었다. 미국의 ICBM 젝트아틀라스는 실패만 반복하고 있었때문. 스푸트니크에 대항하겠다며 뱅가드라는 위성을 쏘아봤지만 대진입도 하고 폭발해버렸다. 이때 소련이 미국'''조문'''을 보내 전격 티배깅을사실은세계적으로 두고두고 거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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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91년, [[보리스 옐친]] 등 주도한 [[러시아]]의 독립 선언과 함께 소련은 해체되고, 15개의 공화국이 독립 국 분리되었다. 냉전은 종식되었으며, 세계는 미국 중심단극 체제 재편되었다. 소련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실험이자 20세 지정학적 중심이었다. 뛰어난 과학, 우주개발 긍정적인 유산도 있었지만,규모 탄압과 인침해, 비효율적인 경제 체제, 과도한 군비경쟁 역시 오늘날 세계깊은 그림자를 남겼다. [[대한민국]] 남북분단과 6.25 쟁이라는 소련의 지금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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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결국 미국은 소련의 우주 쇼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길고 긴 치욕의 시간을 거치던 미국은 도저히 못 참겠다며 양 팔을 걷어붙이고 케네디 행정부 시절부터 돈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미국이 우주에 대해 얼마나 이를 갈고 있었는지는 케네디의 연설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110
== 상징 ==
111
=== [[/국호|국호]] ===
112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국호)]
27 113
28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29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30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114
=== [[/국기|국기]] ===
115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국기)]
31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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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를 부득부득 갈던 미이 사람을 수없이 갈아넣어 아폴로 계획을 통해 닐 암스트롱을 달에다 갖다놓는 걸로 승기를 잡았다. 소련은 후반부로 갈수록 나라 전체적으로 힘이 빠졌지만 우주기술 만큼은 내어주지 않겠다는 각오로 온 력을 쥐어짰고, 기어이 세계 최초의 우주정거"미르"를 궤도에 올려놓고야 말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여기저기 국력을 써버린 소련은 결국 해체되었고, 최종 승자는 미국이었다.
117
=== [[/장|국장]] ===
118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국장)]
33 119
34
현재 미국과 러시아는 사이좋게 국제 우주정거장을 만드는 등 협력하고[*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있다.
120
=== [[소련 국가|국가]] ===
121
[include(틀:관련 문서, 문서명1=인터내셔널가, 문서명2=소련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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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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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때 냉전의 일익을 담당하던 초강대국이었지만 현재는 과거의 이야기로 레드팀 수장자리를 중국이 대체해버렸다. 서로를 '가짜 사회주의'라고 매도하던 두 나라 중 원조 나라는 사라지고 중국만 남은 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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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국가는 총 2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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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M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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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일하게 다이를 깼던 국가인데다 이미 멸망해버린 나라라는 점에서 역덕들의 충동을 자극하는지라, 나이 어린 역덕, 밀덕들은 소련빠가 많다. 스탈린이 망쳐버린 체제 아래에서 고통받던 인민들로 하여금 힘든 현실을 잊게 하기 위해 만들었던 포스터나 각종 복식체계 등에서 간지가 철철 흐르기 때문.
125
* '''[[인터내셔널가]] (1922 ~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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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학부 수준에서 자세히 파기 시작하면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레닌주의 노선에서 벗어나 스탈린이 만든 요상한 독재주의로 흘러가면서부터 나라가 아주 시궁창으로 떨어졌기 때문. 결국 알면 알수록 실망스러운 소련 실체 때문에 이들은 열렬한 소련까로 진화한다.
43
== 여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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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국가가 굉장히 간지나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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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국가]] (1944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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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어랑 어를 바꾸는 소련 유머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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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국가인 '''인터내셔널가'''는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사용했지만 세계 공산의자를 위한 노래이므로, [[민족주의]] 색채가 전혀 없다. 이[[스탈린주의]]에 위배되므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기를 확고히 한 1943년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서기장]]의 지시에 따라서 국가를 변경하게 되었다. 공모 끝에 2번째 국가인 '''소련 '''가 [[1944년]]에 채택되었으며 [[1956년]]부터 가사 사용이 중단되었다가 [[1977년]]에 개정된 가사를 사용다.[* 가사에서 [[스탈린]] 찬양 가사가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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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역사|역사]] ==
132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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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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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의 [[러시아]]와 가장 큰 [[내륙국]]인 [[카자흐스탄]]을 포함해 총 15개국이 합쳐진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했다. [[호주]]의 2.9배, [[브라질]]의 2.6배 더 넓은 나라였으며, [[캐나다]]+[[미국]]+[[아르헨티나]]와 비슷한 면적이었다. 현재의 [[러시아 연방]]도 당시 소련 면적의 76%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상 네 번째로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였으며 역사상 소련보다 더 넓은 나라로는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이 있었다.[* 소련은 20세기 초엽 혁명 직전의 [[러시아 제국]]보다도 작았다. 제정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 핀란드와 폴란드 동부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 기존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폴란드]]와 [[핀란드]]가 뚝 떨어져 나갔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서쪽 지역도 폴란드로 넘어가 버렸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하면서 영토의 상당수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제2세계|영향권]]까지 고려한다면, [[몽골 제국]]이 보유한 영토와 맞먹을 정도의 광대한 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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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여 [[남아메리카]]보다 컸으며 [[북아메리카]] 크기에 버금갈 정도였다. 다만 거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쪽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매우 적었으며 [[모스크바]]를 비롯한 [[우랄 산맥]]의 서쪽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랄 산맥 동쪽에도 경제가 발달하거나 공업지대의 도시([[이르쿠츠크]], [[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도 있었으나 경작지는 11%에 불과했으며[* 그 11%밖에 안 된다는 경작지 넓이도 환산해 보면 [[콩고민주공화국]]과 [[알제리]] 넓이에 필적한다.] 41%는 [[타이가]] 지대였고 16%는 목장 등, 나머지는 [[툰드라]]와 동토, 산악 지대도 있었고 건조한 지역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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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접경국도 많았는데 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정확하게는 오늘날 [[슬로바키아]] 쪽이 소련과 접한다.], [[헝가리]]까지 6개국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튀르키예]], [[이란]], [[아프가니스탄]], [[몽골]], [[중국]], [[북한]]까지 6개국과 국경을 접했다.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과도 접경국이었다.[*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이 [[사할린 섬]]의 [[일본령 가라후토|남부]], 소련이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괴뢰국인 [[만주국]]이 사실상 일본 제국의 영토에 가까웠음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길게 접하고 있던 셈이다. 실제로 만주국 국경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의 충돌이 자주 있었으며, 그 충돌이 크게 번진 것이 [[할힌골 전투]]이다.] [[파키스탄]]과도 [[와칸 회랑]]을 두고 15km 정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었으며 일본과도 쿠릴 열도 방면에서 매우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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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영토 덕분에 자원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준에 속했다. [[시베리아]] 지역은 비록 춥고 척박해서 개발이 안 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대신, [[석유]], [[철(원소)|철]], [[망가니즈|망간]], [[천연가스]], [[금]], [[아연]], [[니켈]] 등 다양한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소련의 경제 역시 현재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자원에 상당히 의존한 편이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석유 덕을 엄청나게 많이 본 편이었지만[* 소련의 원유 생산량은 1974년 [[미국]]을 추월하고 세계 1위가 되었다.], 1986년 이후 저유가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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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최고봉은 현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에 위치한 [[공산주의 봉]]으로, 높이는 무려 7,495m인데 세계 50위를 자랑한다. 참고로 50위라고 크게 안 높아 보인다면 매우 큰 오산이다. 7,495m라는 높이는 세계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높이이며, 50위까지 밀린 건 단지 [[히말라야]]와 [[카라코람 산맥|카라코람]]에 밀집된 고봉들이 상위권을 싹쓸이해갔기 때문. 이 산은 소련 내외의 훌륭한 산악인에게 수여되는 [[눈표범 상]]의 수상 조건 중 하나이기도 했으며, 소련 해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이스모일 소모니 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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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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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인|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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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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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의 소련 인구는 293,047,571명으로, 당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의 인구가 폭풍성장하여 300,000,000명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현재는 옛 소련 구성국들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미국에 밀리는 4위권이다. 후술할 저출산, 이민으로 인한 유출, 전쟁으로 인한 사망 등으로 인해 인구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으며, 오히려 현재 인구가 280,000,000명인 '''[[인도네시아]]'''에게 추월당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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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수백여 개에 달했었다.[* 오늘날 러시아만 해도 새로 이민 온 인구를 제외하고도 180 ~ 200여 가지 민족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45,160,000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0,000명), [[우즈베크인]](16,700,000명), [[벨라루스인]](10,040,000명), [[카자흐인]](8,140,000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과 [[유대인]][* [[독일인]]들은 소련 초기에 볼가강 유역에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나 스탈린 시기에 인구의 대다수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되면서 사라졌고, 유대인들은 명목상의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기는 했지만 땅이 척박하고 추워서 정작 유대인들은 얼마 살지 않았다. 그래도 [[유대인 자치주]]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도 각각 2,040,000명, 1,380,000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0,0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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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소련 전체 출산율은 산업화 이전에는 5명대를 넘겼지만, 도시화에 따라 조금씩 하락추세를 이어갔고, 독소전쟁 시기에 2명대 초반으로 격감하였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2명대 후반 ~ 3명대 초반 내외를 기록하여 3.7명대까지 올라갔던 미국에게 다소 뒤쳐졌던 편으로 동시대의 프랑스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었으며,[* 다만 인구증가율 자체는 큰 차이는 없었다. 경제대공황기와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소련의 출산율이 4~5명대 내외였던데 반해, 미국의 출산율이 2명대 초반을 기록해서 가임기 여성 비율은 소련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흐루쵸스 말기와 브레즈네프 초기 시기에는 출산율이 2명대 초반 내외로 인구 대체선을 약간 웃도는 수준으로 하락하였지만, 1965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베이비붐이 끝나고, 1971년을 기점으로 소련의 출산율이 미국을 앞섰으며 이는 1991년까지 지속되어 1990년 기준으로 2.26명 정도로 2.08명을 기록한 미국보다 높았던 편이다. 그러나 각 지역별로 출산율 차이가 심하게 났다. 중앙아시아는 대부분 출산율이 4명대를 초과하였고, 캅카스 3국과 몰도바는 2명대 중반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슬라브권과 발트 3국은 출산율이 2명대 초반 정도에 머물렀었고,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슬라브인과 발트민족의 비중이 줄고, 튀르크계 민족과 캅카스계 민족, 타지크인, 몰도바인들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였다. 또한 슬라브와 발트 3국내에서도 농어촌 지역은 출산율이 2명대 중반에서 3명대 내외로 크게 높았지만 도시지역은 출산율이 1명대 중후반 내외를 기록하는데 그쳐, 상대적으로 낮았던 편이었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위기를 겪으며 국외이민이 증가하거나 [[출산율]]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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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기준으로 구 소련권의 인구를 모두 합치면 296,715,759명으로 소폭 증가했는데 이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인구 증가로 인한것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와 90년대 경제위기로 동슬라브인의 실제 인구는 훨씬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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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언어|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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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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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종교|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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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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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교통|교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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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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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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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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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align=center><tablewidth=80%><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bgcolor=#ffffff,#1c1d1f><nopad> [[파일:attachment/소련/soviet_union_admin_1989.jpg|width=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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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붕괴]]로부터 2년 전인 [[1989년]] 당시 행정구역일람.'''[* 굵은 선 안쪽이 소련 시절의 영역이며 분홍색 지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로, 나머지 지역은 현재 독립한 국가들로 귀속되었다. 다만 저 지도에서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동부 일대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명목상으로 합병된 상태고 조지아 영토 내부에 위치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도 사실상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친러]] 성향의 [[미승인국가]]이기 때문에 모든 영토가 저대로 귀속됐다고 볼 순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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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국명으로나 헌법상으로나, 형식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국가 연합]] 체제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 국명을 직역해보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소련이라는 국가연합에 15개의 '''국가'''들이 가맹해 있는 체제였다.[* 이와 비슷하게 [[동유럽]] 국가들 중 최상위 행정구역을 '공화국'으로 지칭한 나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와 [[슬로바키아]] 간의 연합.],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의 연합.]가 있었다. 사실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모두 지역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지역들이 연합하여 성립된 국가였다. 특히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들은 원주민들 쫓아낸 빈 땅에 대충 줄 그어놓은 [[미국]]과는 달리 이전부터 그 나름의 체제와 정부,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던 것을 연방이라는 형태로 묶어서 더 큰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부터 그냥 갈라서면 남남인 상황이었다. 소련도 해체 뒤에 각 국가들이 남남이 되었는데, 하필 [[민족주의]]의 대두 때문에 소련 시절에는 문제가 없던 공화국 별 민족 문제가 심각하게 커져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문제가 번지게 되었다.] 각 공화국들은 별도의 헌법, 의결기구, 그리고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있었으며, 이들의 의원들이 상위 기구인 [[소련 최고회의]] 혹은 [[소련 공산당]]에 진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조지아]] 출신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 출생 자체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쿠르스크에서 했지만, 주요 정치경력을 우크라이나 공산당에서 시작하였다. 쿠르스크 주는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과 바로 붙어 있어 우크라이나와 가까웠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이지 [[우크라이나]] 출신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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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해체되면서 각 공화국 영역은 독립국의 국경이 되었으나 이것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원래 러시아 주민들이 살던 곳을 행정 문제 등으로 인하여 다른 공화국의 영토로 만들거나(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 각 공화국의 경계 설정에 대해 민족적 구분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인구에 맞추어서 설정하거나, 스탈린 시절에는 여러 민족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등[* [[고려인]]의 경우가 대표적이고, 이외에도 체첸인이나 크림 타타르, 불가 독일인, 칼미크인들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당했다.] 문제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계속 러시아 주민들을 지역개발 등의 이유로 타 공화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도 추진했다.[* 물론 이것도 인구가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에 러시아 [[출산율]]이 1.9-2.0명 대 수준으로 떨어져서(물론 소련 전체의 출산율은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일대 공화국의 출산율이 높은 덕택에 2명대 중반정도의 수준을 유지했다.) 시베리아 개발도 하기 힘든 수준이 되자 이주를 권유하는 정책을 중단했다. 그렇지만 타 공화국으로 이주한 이들이 곧바로 러시아로 돌아온 건 아니라서 여전히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카자흐스탄,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러시아인]] 비율은 상당한 편이고, 소련 붕괴 이후에 상당수 러시아계 주민들이 러시아로 복귀했음에도 여전히 남은 러시아인들이 많은 편이다.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도 민족 갈등의 요소가 되고 있다.] 물론 소련은 "'''설마 우리가 망하겠어?'''"라는 생각이었고, 대외적 관측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결국 그 설마가 [[소련 붕괴|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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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소련 당시의 행정구역 변경과 민족 이주의 영향으로 인해 소속되었던 공화국들 간 민족 갈등, 영토 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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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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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소련 구성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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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bgcolor=#ffffff,#1c1d1f><tablealign=center><rowbgcolor=#cd0000,#cd0000><rowcolor=#ffd700,#ffd700> '''#''' || '''국명''' || '''수도''' || '''인구 (1989)''' || '''면적 (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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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4-1991).svg|height=15|width=28]]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 → [[모스크바]][* 1918년 이전, 소련 정부와 수도 공유] || 147,386,000|| 17,075,400||
181
|| 2 ||[[파일: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SSR]] || [[하리코프]]→[[키이우|키예프]][* 1934년 이전] || 51,706,746|| 603,700||
182
|| 3 ||[[파일: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 SSR]][* 소련이 존재했던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벨라루스'가 아니라 '백러시아'로 불렀다. 소련 붕괴 이후 '벨로루시'를 거쳐 벨라루스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하지만 백러시아라는 표현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벨라루스를 [[러시아어]]로 표기하면 Белоруссия인데 앞에 붙는 Бело는 Белая에서 따온 것으로 '하얀', 즉 '백'의 뜻이다. 뒤에 붙는 руссия는 Россия에서 따온 것으로 러시아를 뜻한다. 즉 이 두 단어를 합쳐 벨라루스(키릴자로는 벨라루씨야)라 하는데 뜻이 서술되었듯 백러시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말에 있어서는 오히려 백러시아가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독일어]]와 [[중국어]]로는 여전히 'Weißrussland', '白俄罗斯' 즉 '백러시아'라고 쓴다.] || [[스몰렌스크]][* 1919년 건립 직후 닷새동안 스몰렌스크에 수도를 두었으나 이후 수도를 민스크로 이전했다.]→[[민스크]] || 10,151,806|| 207,600||
183
|| 4 ||[[파일: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2-1991).svg|height=15|width=28]]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즈베크 SSR]][*참고1 중앙아시아 5국에는 공화국 이름에 '~스탄'을 붙이지 않고 '민족명 + 공화국'으로 불렀다.] || [[사마르칸트]]→[[타슈켄트]][* 1930년 이전] || 19,906,000|| 447,400||
184
|| 5 ||[[파일: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자흐 SSR]][*참고1 중앙아시아 5국에는 공화국 이름에 '~스탄'을 붙이지 않고 '민족명 + 공화국'으로 불렀다.] || [[알마티|알마아타]] || 16,711,900|| 2,717,300||
185
|| 6 ||[[파일: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1-1990).svg|height=15|width=28]]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그루지야 SSR]] || [[트빌리시]] || 5,400,841|| 69,700||
186
|| 7 ||[[파일: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2-1991).svg|height=15|width=28]]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제르바이잔 SSR]] || [[바쿠]] || 7,037,900|| 86,600||
187
|| 8 ||[[파일: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3-1988).svg|height=15|width=28]]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리투아니아 SSR]][*참고2 [[미국]] 등 몇몇 유럽 국가는 해당 국가를 불법 점령 중인 영토로 간주, 소련의 적법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발트 3국 점령]] 참조.] || [[빌뉴스]] || 3,689,779|| 65,200||
188
|| 9 ||[[파일: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2-1990).svg|height=15|width=28]]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몰도바 SSR]] || [[키시너우|키시뇨프]] || 4,337,600|| 33,843||
189
|| 10 ||[[파일: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3-1990).svg|height=15|width=28]]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라트비아 SSR]][*참고2 [[미국]] 등 몇몇 유럽 국가는 해당 국가를 불법 점령 중인 영토로 간주, 소련의 적법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발트 3국 점령]] 참조.] || [[리가]] || 2,666,567|| 64,589||
190
|| 11 ||[[파일: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키르기스 SSR]][*참고1 중앙아시아 5국에는 공화국 이름에 '~스탄'을 붙이지 않고 '민족명 + 공화국'으로 불렀다.] || [[비슈케크|프룬제]] || 4,257,800|| 198,500||
191
|| 12 ||[[파일: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타지크 SSR]][*참고1 중앙아시아 5국에는 공화국 이름에 '~스탄'을 붙이지 않고 '민족명 + 공화국'으로 불렀다.] || [[두샨베]][* 1929년부터 1961년까지는 스탈리나바드로 불렸다.] || 5,112,000|| 143,100||
192
|| 13 ||[[파일: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2-1990).svg|height=15|width=28]]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르메니아 SSR]] || [[예레반]] || 3,287,700|| 29,800||
193
|| 14 ||[[파일: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73-1991).svg|height=15|width=28]]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투르크멘 SSR]][*참고1 중앙아시아 5국에는 공화국 이름에 '~스탄'을 붙이지 않고 '민족명 + 공화국'으로 불렀다.] || [[아슈하바트]][* 1919년부터 1927년까지 폴토라츠크라는 명칭으로 불렀다가 후에 변경되었다.] || 3,522,700|| 488,100||
194
|| 15 ||[[파일: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3-1990).svg|height=15|width=28]]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스토니아 SSR]][*참고2 [[미국]] 등 몇몇 서방 국가는 해당 국가를 불법 점령 중인 영토로 간주, 소련의 적법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발트 3국 점령]] 참조.] || [[탈린]] || 1,565,662|| 45,226||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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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행정구역은 크게 3단계로 나뉘어 있었으며[* 공화국^^(SFSR/SSR)^^, 자치공화국^^(ASSR)^^, 자치주^^(AO)^^], 최고 행정구역인 공화국은 소련 정부의 명으로 직접 지정되었으며, 자치공화국과 자치주는 헌법에 따라 공화국으로부터 명목상 자치 권한을 부여받았다, 다만 모든 공화국들이 자치구역을 둔것은 아니고, [[러시아 SFSR|러시아]]나 [[캅카스]] 지역 같이 주로 민족구역이 복잡한 공화국들이 자치구역을 두고 있었다.[* 1991년 소련 해체 당시 기준 자치구역을 지닌 공화국은 소련 내에서 단 5개국 뿐이었다.^^([[러시아 SFSR|러시아]], [[우즈베크 SSR|우즈베크]], [[타지크 SSR|타지크]], [[그루지야 SSR|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SSR|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SSR|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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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이전에는 [[자캅카스 SFSR]]도 존재했지만, 1936년에 [[그루지야 SSR]], [[아르메니아 SSR]], [[아제르바이잔 SSR]]의 세 개의 SSR로 분리되었다. 1936 재정된 소련 헌법(일명 스탈린 헌법)에 따라 소련 붕괴 전까지는 러시아가 소련의 유일한 SFSR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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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련의 국명을 직역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으로 번역할 수도 있으며, 아예 산하 공화국들에 '''외교부'''가 따로 있었다. 즉 일반적인 연방제 국가가 아니라 [[유럽연합]]과 같은 국가간 연합 체제의 성격이 있었으므로, 산하에 연방 국가가 가입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즉 사실상 국가연합 체제인 소련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으로 해석한다면 연방 국가안에 또 연방 국가가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져 버린 것.[* 레닌의 주장으로 소련 구성국에는 연방을 탈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지만 스탈린 시절 탈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고르바초프]] 시절에도 소련 중앙정부가 허용하지 않으면 구성국의 독립이 불가능해서 발트 3국의 독립 요구를 [[고르바초프]]는 불법이라며 거부했지만 고르바초프가 8월 쿠데타로 실권을 상실한 후 승인되었다.] 공화국들의 숫자를 연대별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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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bgcolor=#ffffff,#1c1d1f><tablealign=center><rowbgcolor=#cd0000,#cd0000><rowcolor=#ffd700,#ffd700> '''연도''' || '''역사''' ||
203
|| 1922년 12월 || '''소련 건국'''[br]'''([[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자캅카스]] 가입)''' ||
204
|| 1924년 12월 ||'''(신설)'''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즈베크]] ||
205
|| 1925년 05월 ||'''(신설)'''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투르크멘]] ||
206
|| 1929년 12월 ||'''(신설)'''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타지크]] ||
207
|| 1936년 12월 ||'''(해체)''' 자캅카스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조지아]],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br]'''(승격)'''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자흐]],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키르기스]] ||
208
|| 1940년 03월 ||'''(신설)'''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렐리야-핀란드]] ||
209
|| 1940년 08월 ||'''(합병)'''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몰도바]], [[발트 3국 점령|''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참고 [[미국]] 등 몇몇 서방 국가는 해당 국가를 불법 점령 중인 영토로 간주, 소련의 적법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발트 3국 점령]] 참조.] ||
210
|| 1954년 03월 ||'''(변경)''' [[크림 반도|크림 주]] (우크라이나로 편입) ||
211
|| 1956년 07월 ||'''(해체)''' 카렐리야-핀란드 [[카렐리야 공화국|(러시아로 편입)]] ||
212
|| 1991년 09월 ||'''(탈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
213
|| 1991년 12월 || '''[[소련 붕괴]]''' ||
214
215
그 밖에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공화국들은 다음과 같다.
216
||<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bgcolor=#ffffff,#1c1d1f><tablealign=center><rowbgcolor=#cd0000,#cd0000><rowcolor=#ffd700,#ffd700> '''#''' || '''국명''' || '''수도''' || '''존속 기간''' || '''멸망 후''' ||
217
|| · ||[[파일:적기.svg|height=17|width=28]] [[https://en.m.wikipedia.org/wiki/Amur_Socialist_Soviet_Republic|아무르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블라고베셴스크]] ||1918.4~1918.10 || 아무르 [[카자크]][br][[러시아국]] ||
218
|| · ||[[파일:극동 공화국 국기.svg|height=17|width=27]] [[극동 공화국]] ||[[울란우데|베르호네우딘스크]][br]→ [[치타(러시아)#s-1]][* 1920년 이전]|| 1920 ~ 1922 || [[러시아 SFSR]] ||
219
|| · ||[[파일:호라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호라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호라즘 SSR]]''' ||[[히바]]|| 1920 ~ 1924 || [[우즈베크 SSR]][br][[투르크멘 SSR]][br][[카라칼파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라칼팍 ASSR]] ||
220
|| · ||[[파일: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부하라 PSR]]''' ||[[부하라]]|| 1920 ~ 1924 || [[우즈베크 SSR]][br][[투르크멘 SSR]][br][[타지크 SSR]] ||
221
|| · ||[[파일: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투르키스탄 ASSR]] ||[[타슈켄트]]|| 1918 ~ 1922 || [[투르크멘 SSR]][br][[우즈베크 SSR]][br]카라키르기즈 AO[br]카라칼팍 AO ||
222
|| · ||[[파일: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크림 ASSR]] ||[[심페로폴]]|| 1921 ~ 1992 || [[크림 공화국]] ||
223
|| · ||[[파일: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국기(1925-1936).svg|height=15|width=28]] '''[[자캅카스 SFSR]]''' ||[[트빌리시]]|| 1922 ~ 1936 || [[그루지야 SSR]][br][[아르메니아 SSR]][br][[아제르바이잔 SSR]] ||
224
|| · ||[[파일: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height=15|width=28]]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렐리야-핀란드 SSR]]''' ||[[페트로자보츠크]]|| 1940 ~ 1956 || [[레닌그라드주]]^^(일부편입)^^[br][[무르만스크|무르만스크주]]^^(일부편입)^^[br][[카렐리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렐리야 ASSR]] ||
225
|| · ||[[파일:적기.svg|height=17|width=28]] [[베사라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베사라비아 SSR]] ||[[오데사]]^^(명목)^^[br][[키시너우]]^^(실질)^^|| 1919 ~ 1920 ||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몰도바 ASSR]] ||
226
|| · ||[[파일:적기.svg|height=17|width=28]]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 ||[[빌뉴스]] / [[민스크]]|| 1919 ~ 1920 ||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br][[벨로루시 SSR]] ||
227
|| · ||[[파일:적기.svg|height=17|width=28]]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SR]] ||[[하르키우]][br]→ [[루한스크]]|| 1918 ~ 1918[* 2월 12일 ~ 3월 20일] || [[우크라이나 SS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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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트란스니스트리아 국기.svg|height=15|width=28]] 트란스니스트리아 SSR ||[[티라스폴]]|| 1990 ~ 1991 || [[트란스니스트리아]]^^(미승인국)^^ ||
229
|| · ||[[파일:적기.svg|height=17|width=28]] 타타르스탄 SSR ||[[카잔]]|| 1990 ~ 1991 || [[타타르스탄 공화국]] ||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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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구역 ===
232
[include(틀:소련의 자치공화국)]
233
||<-3><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bgcolor=#ffffff,#1c1d1f><tablealign=center><rowbgcolor=#cd0000,#cd0000><rowcolor=#ffd700,#ffd700> '''소련의 자치구역 (자치공화국(A.S.S.R) / 자치주(A.O)'''[* 소련 해체 당시(1991년) 기준이다.] ||
234
||<width=15%> '''소속''' ||<width=15%> '''구역 형태''' ||<width=60%> '''지역명''' ||
235
||<|2>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 자치공화국 || 고르노-알타이[* 1990년 10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 [[다게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다게스탄]], [[마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마리]], [[모르도비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모르도비야]], [[바시키르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바시키르]], [[부랴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부랴트]], [[북오세티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북오세티야]], 아디게야[* 1991년 7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 [[야쿠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야쿠트]], [[우드무르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드무르트]],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체첸-인구시]], [[추바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추바시]], 카라차이-체르케스[* 1990년 11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 [[카렐리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렐리야]][* 1956년 7월 성립. 상술한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렐로 SSR]]이 러시아 SFSR로 병합되며 탄생.], [[카바르디노-발카리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바르디노-발카리야]], [[코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코미]], [[타타르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타타르]], [[투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투바]], 하카스[* 1991년 7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투르키스탄]]--[* 1924년 소련령 중앙아시아 구역개편으로 인해 해체], --[[키르기즈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키르기즈]]--[* 1925년 소련령 중앙아시아 개편으로 인해 국명을 카자흐 ASSR로 변경, 후에 1936년 공화국으로 승격되며 해체.], ~~[[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볼가-독일인]]~~[*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할 때즈음 스탈린의 명으로 사라토프 주와 스탈린그라드 주로 분리되며 해체.],--([[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크림]])--[* [[러시아 SFSR]]에서는 [[1945년]] [[6월 30일]] 해체. 이후 [[1954년]]에 크림주가 [[우크라이나 SSR]]로 이양되었고 우크라이나 SSR에서 소련 해체 몇달전인 [[1991년]] [[6월 19일]] 부활. 다만 다른 구성국으로 넘어간 후 부활한 것이기에 괄호 후 취소선 처리했다.] ||
236
|| 자치주 || 유대인 자치주 ||
237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 자치공화국 ||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몰도바]]--[*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의 합병으로 해체.],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크림]] ||
238
||<|2>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그루지야]] || 자치공화국 || [[아자리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자리야]], [[압하스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압하스]] ||
239
|| 자치주 || [[남오세티야]] ||
240
||<|2>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제르바이잔]] || 자치공화국 || [[나히체반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나히체반]][* 나히체반 주민들은 본국인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주민들과 동족인데도 자치공화국이 된 점에서 특이한 사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어서인 듯. 정작 이민족인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는 한 등급 낮은 자치주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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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주 || [[나고르노카라바흐]] ||
242
||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즈베크]] || 자치공화국 || [[카라칼파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카라칼파크]] ||
243
||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타지크]] || 자치주 || 고르노-바다흐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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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헌법|헌법]]에 따라 구성국(SFSR/SSR)으로부터 (명목상의) 자치 권한을 부여받은 공화국들로, [[러시아 SFSR|러시아]]나 [[캅카스]] 지역처럼 민족 구성이 복잡한 공화국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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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국과 자치구역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연방 구성국은 독자적인 공용어나 헌법,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자치구역은 소속국이나 소속지역의 행정을 따르면서 일정 수준 재량권을 가진 지방에 가까웠다. 이렇게 이론 상으로는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연방을 구성하는 구성국(SFSR, SSR 등)과 구성국 정부로부터 통치를 받는 주(Oblast, Krai 등)의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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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소련 건국 초창기, 소련은 당시 비러시아계 민족에게 영토별로 민족국가(Nation)을 부여하려 했다. 따라서 소련 각지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하면서, 당시 민족별 거주지를 행정구역 경계를 설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민족이 같이 거주하는 영토(대표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당시 행정당국의 편의대로 설정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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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이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면서, [[볼가 독일인]]들처럼 [[나치 독일|잠재적 적국]]과 연관되어 있거나 [[체첸인]]같이 당국에 반항적인 성향의 소수민족을 고의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이주시켜 당국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탄압했다. 이 때 고려인 강제 이주도 이러한 맥락으로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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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무너진 후에도 대다수 자치구역은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물론 공산당 1당 독재 시절에 여러 가지 이유로 경계선을 민족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행정편의상 이유로 경계를 결정했고, 민족 분포를 고려했다고 해도 스탈린 시절의 강제 이주로 민족 분포가 뒤바뀐 사례도 있기 때문에[* 물론 스탈린 시절에 강제이주 당한 소수민족 가운데 상당수는 스탈린이 격하되고 나서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기는 했다만 전부 되돌아온 것이 아닌데다가, 되돌아온다 해도 타 민족(주로 [[러시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체첸]]이나 [[남오세티야]], [[아르차흐 공화국|나고르노-카라바흐]], [[트란스니스트리아]], [[크림반도]]의 경우처럼 결국 [[전쟁]] 등의 유혈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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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도시 ===
256
||<tablebordercolor=#cd0000,#cd0000><tablebgcolor=#ffffff,#1c1d1f><rowbgcolor=#cd0000,#cd0000><rowcolor=#ffd700,#ffd700> '''순위''' || '''공화국''' || '''도시''' || '''인구 (1989년)''' ||
257
|| 1 ||<|2>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4-1991).svg|width=28]] [[러시아 SFSR]] || '''[[모스크바]]''' || 8,769,117명 ||
258
|| 2 ||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 || 5,023,506명 ||
259
|| 3 || [[파일: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width=28]] [[우크라이나 SSR]] || [[키이우|키예프]] || 2,600,000명 ||
260
|| 4 || [[파일: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2-1991).svg|width=28]] [[우즈베크 SSR]] || [[타슈켄트]] || 2,136,600명 ||
261
|| 5 || [[파일: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2-1991).svg|width=28]] [[아제르바이잔 SSR]] || [[바쿠]] || 1,794,874명 ||
262
|| 6 || [[파일: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width=28]] [[벨로루시 SSR]] || [[민스크]] || 1,607,000명 ||
263
|| 7 || [[파일: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width=28]] [[우크라이나 SSR]] || [[하르키우|하리코프]] || 1,593,970명 ||
264
|| 8 ||<|3>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54-1991).svg|width=28]] [[러시아 SFSR]] || [[니즈니 노브고로드|고리키]] || 1,438,133명 ||
265
|| 9 || [[노보시비르스크]] || 1,436,516명 ||
266
|| 10 || [[예카테린부르크|스베르들롭스크]] || 1,364,621명 ||
267
이외 소련의 다른 도시들을 보려면 [[도시/목록]] 문서의 구소련 구성국 하위 문서 또는 문단들을 참고.
268
269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소련, version=2983, uuid=a63e601a-4539-46de-a8fe-afea8d651522, paragraph=5.1.1)]
270
271
== [[소련/정치|정치]] ==
272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정치)]
273
274
소련은 [[헌법]] 상 연방제 국가를 지향했지만 실제로는 '''[[일당제]] [[중앙집권제|중앙집권국가]]'''에 가까웠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을 거치면서 매우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띠게 되었고, 이러한 통치시스템은 [[마르크스-레닌주의]](실상은 [[스탈린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전후 [[북한]] ([[김일성]])이나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알바니아]] ([[엔베르 호자]]),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루마니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같은 공산권 1인독재국가를 형성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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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는 '''[[니키타 흐루쇼프/생애#s-2.2.2|탈스탈린화]]'''를 내세우면서 소련 사회의 전체주의적인 요소와 1인숭배를 제거하고자 했다.[* 다만 소련의 [[국부]]인 [[블라디미르 레닌]]에 대한 우상화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소련 사회는 스탈린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근본적으로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독재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는 1980년대 중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후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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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기 소련의 정치체제는 [[제2세계|공산 진영]]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중국]]과 [[북한]], [[쿠바]], [[베트남]], [[라오스]]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일당제]] 정치체계의 기반을 확립했다.
279
280
=== [[소련 장관회의|행정부]] ===
281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 최고지도자)]
282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 장관회의)]
283
284
=== [[소련 공산당|정당]] ===
285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 공산당)]
286
287
=== [[소련/외교|외교]] ===
288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외교)]
289
290
== [[소련/경제|경제]] ==
291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경제)]
292
293
== [[소련/과학기술|과학기술]] ==
294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과학기술)]
295
296
== 사회 ==
297
=== 복지 ===
298
복지제도는 공산국가라는 특성답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탁아소]]는 전국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임산부]]에 대한 배려도 매우 잘 되어 있었고[* 임산부-어린이 전용좌석이 형식적이었지만 '''법적으로''' 효력을 가졌던 국가였다.], 아이를 기르는데에도 보조금을 충분히 지급해주어 적어도 아이를 기르는데 부담이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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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노동자"의 나라답게 노동자들의 복지가 굉장히 잘 되어 있었다. 휴가도 충분히 보장되었다. 소련은 세계 최초로 유급휴가 보장을 법에 명시한 나라였다. 이 당시에 연차일이 12일로 그리 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에는 연차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그 정도만 해도 그 시기 정말 획기적이었다. 이후 연차일은 1967년부터 연장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24일의 유급휴일이 보장되었다. 이 때부터 보통 휴가철인 7월과 8월에 걸쳐 연차를 써 약 1달 정도 휴가를 보내는 편이었다. 단순히 휴가를 보장하는 수준을 넘어 휴가 비용까지 국가에서 보조해주었고, 필요하다면 [[별장]](다챠)도 공짜로 지급되었다. 이러한 여유로운 휴가제도 덕택에 여름 내내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휴식을 취하는 [[별장]](다챠)문화가 활성화되었다.
301
302
게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출범한 [[사회주의]] 국가여서 명목상으로는 부의 분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에, [[의식주]]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생활, 여가 생활[* 장기 근로자의 경우에는 여름 별장도 주어졌다.]과 같이 인간적인 삶을 위한 기본적인 복지가 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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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국가 차원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요양원도 곳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위 말하는 ‘물 좋고 공기 좋은 산속’에서 쉬라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 [[https://youtu.be/Nu1_iYbe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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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은 남자는 만 60세 여자는 만 55세부터 받을 수 있었다. 연금액수는 임금의 절반 정도 받는 식이었고, 그렇게 많이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서방 국가들보다 훨씬 일찍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 남성 평균수명이 60대 중후반 정도였기에 긴 연금 수급 기간은 여성에게나 해당되고, 남성 평균 수급기간은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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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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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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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주거 문화는 아파트가 주류였다. 시골과 소도시의 경우에는 단독 주택에서 거주하는 경우도 꽤 있었지만, 대도시의 경우에는 아파트가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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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나라를 천명한 소련은 건국 초기부터 주거 문제를 겪었다. 내전으로 인해 주거지와 인프라가 파괴되고 무수히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정 시절부터 러시아의 주거 환경은 심각하게 좋지 못했다. 제정 시절의 러시아 노동자들은 합숙소, 공장 기숙사, 아르텔[*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방 한 칸을 빌려 생활하는 구조], 아파트에서 거주했는데, 그 주거 환경은 대단히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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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합숙소는 세기 전환기 기준으로 합숙소 이용객 1인당 평균 사용 가능 면적의 너비가 35.5cm, 공역은 4.9㎥(3 제곱미터) 미만으로 겨우 차렷 자세로 서 있을 수 있는 정도의 공간만 허용될 정도로 인구 밀도가 과밀했다. 건물 내부의 위생은 심각하고 공기는 항상 탁했으며 땀 냄새와 담배 연기가 방을 가득 매워 호흡도 힘들었다. 합숙소 거주자의 증언에 따르면, 10 ~ 15분만 내부에 있어도 현기증을 느낄 수 있으며 합숙소에서 숙면을 취하면 질식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 깊게 잠들면 안 된다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합숙소의 투숙객들은 밤마다 최소 3번 이상 복도나 건물 바깥으로 나가서 신체에 산소를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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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공장 기숙사의 경우에는 브라노벨, 코노발로프, 모로조프 재벌처럼 인간적이고 동정심이 넘치는 경영주가 운영하는 기업에서는 아예 제대로 된 노동자 주택 단지와 각종 시설들을 건설하고 다양한 복지를 제공했으며, 일부 인간적인 자본가들도 그럭저럭 괜찮은 기숙사를 제공하거나 기숙사를 지어주지 않는 대신에 주택 수당을 지급했다. 질적 수준이 나빴던 기숙사들도 점차 개선이 이뤄져서 모스크바의 대기업인 프로호로프 재벌처럼 나무 판자 침대를 매트리스가 있는 철제 침대로 교체하고 각종 가구도 비치했으며 노동자 가정은 가족 기숙사에 수용하는 기업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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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당수의 공장 기숙사들은 그 질적 수준이 심각할 정도로 나빴다. 군대 내무반처럼 나무 침상을 깔고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일렬로 누워 자게 한다거나, 중앙 산업 지구[*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중부 지역]에서는 벌레가 들끓고 빛도 제대로 안 드는 방에 1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집어 넣고 침구도 없이 2층짜리 평상에 누워 자게 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돈바스의 탄광이나 철도 건설 현장의 '땅굴 막사'는 창문도 없고 라스푸티차와 우기가 되면 바닥이 물로 가득 차는 10평짜리 방에 60명씩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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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이룬 노동자들은 '운이 좋다면' 1실 2가구로 방을 배정받을 수도 있었지만, 운이 좋지 못하면 나치가 운영한 수용소처럼 부부가 다른 건물에 수용되었다. 운이 좋아서 가족용 기숙사를 배정받아도 다른 가족과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가족 간의 성생활까지도 공개되었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노동자 가정에서는 침대를 커튼으로 가렸지만, 여유가 없다면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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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일부 여유 있는 노동자들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방 한 칸이나 아파트 한 채에 공동 주거를 하던 아르텔의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아파트도 사정은 좋지 못했다. 화장실의 오물이 복도 천장과 벽면을 타고 복도 바닥에 스며든다거나, 아파트 바깥의 공용 화장실과 내부 공용 화장실의 악취가 융합되어 새로운 악취가 만들어질 정도로 위생이 나빴다. 휴식을 취하고 싶어도 아파트를 작업장으로 쓰는 이들이 있어 제대로 방음이 안 되는 벽면을 타고 기계음과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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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호실마다 환경이 제각각이어서 같은 건물 안에서도 추위와 더위, 습도가 제각각이었고 그 중에서도 지하 층은 환기가 불가능하고 극도로 어둡고 더러웠다. 심지어 비나 눈이 오고 라스푸티차가 터지면 거리의 오물과 빗물, 눈 녹은 물들이 섞여서 밀려 들어왔다. 그래서 지하 층은 마치 이집트의 나일 강처럼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수준이었고 1년 전에 고인 물이 그 다음해에 그대로 고여 있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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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과밀도 심각했다. 세기 전환기의 모스크바에서는 15평 아파트에 11명이 거주하는 일도 있었고 1904년의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투 룸에 15명이 거주하거나, 방 하나에 10 ~ 20명이 거주하는 일도 있었다. 모스크바의 집값, 집세는 서유럽에서 가장 집값과 집세가 비싼 베를린보다 더 높았다. 이러한 인구 과밀은 심각한 주거난과 건물주들이 집세를 받기 위해 한계까지 임차인을 받고 하나의 방을 여러 개의 간이 방으로 쪼개서 임대한 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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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소련 수뇌부들은 귀족과 부르주아, 건물주들로부터 주택을 몰수해 노동자들에게 분배하여 주거난을 완화하고 새로운 주택들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도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도시를 어떻게 건설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는 공산주의는 개조인 앵겔스부터 도시 문제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비판해 왔기 때문이었다. 밧줄에 매달리거나 벤치에 앉아서 잠들고, 관짝에 누워 자는 게 호사일 정도로 심각한 주거난, 깨끗한 물과 공기를 구하기도 힘든 위생, 부족한 식량과 공공 서비스 등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겪는 고통은 공산주의자들이 결코 좌시할 수가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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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련 수뇌부들은 노동자들을 도시 문제에서 해방한다는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다양한 의제들을 논의하고 건축가들을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과 건축가, 행정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격론이 일어났다. 도시의 규모와 형태, 주택과 녹지의 배치, 상공업 지구의 편성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서로 다른 의견들이 쏟아졌고 도시화를 부정하고 도시 그 자체를 없애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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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일명 코무날카라 불리는 공용주택이 지배적이라 한 가정에 방 하나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혁명 직후 귀족들이 버리고 간 대주택 안에 여러 가구가 방을 배정받은 경우도 흔했다.] [[흐루쇼프]] 이후로는 한 가구 당 한 주택이 기본이 되었으며, 주거면적도 꾸준히 확장되어, 흐루쇼프때 1가구 1방짜리 아파트에서 브레즈네프 정부 때는 1가구 3방짜리 아파트가 보편화되는 등 주거환경도 점차 나아졌지만, 지속적인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1970년대 기준으로 연 210만호 가량의 아파트를 지속적으로 공급하였음에도 주택을 배급받기 위해 몇년씩 기다리는 것은 여전했다. 1980년대 중반 기준으로 주택보급률은 85% 정도로 아파트를 받기 위해 공동아파트 단칸방에서 살며 대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상당수 존재했다. 고르바초프 집권기 때는 주택보급기간을 최소한을 줄이기 위한 1가구 1아파트 주택건설계획을 세웠지만, 소련 해체로 주택을 무상으로 받는 제도가 사라지면서[* 다만 러시아 공무원들은 주택을 여전히 무상으로 받으며,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러시아의 공무원 급여수준이 일반 사기업보다 낮아 부정부패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평을 듣는데,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공무원들의 실질 급여를 높이기 위해 무상아파트 배급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돈없는 빈민층의 주거환경은 도로 열악해지고, 신혼부부들도 무상아파트를 못 얻게되면서 상속에 기대는 경우가 태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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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처럼 개인이 자유롭게 주택을 사고 팔 수 없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개인이 주택조합을 통해 주택을 구매[* 정확히는 해당 주택에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거주권을 구매하는 형태였다. 오늘날 [[중국]]과 비슷하게, 소련에서 모든 토지 및 부동산은 원칙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었다.]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반적인 급여수준에 비하여 비싼 편이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당시 단칸방 아파트의 가격이 대략 6,000루블에서 7,000루블 정도였다. 방이 3개 있는 아파트의 경우 약 10,000루블 정도에 달했다. 당시 노동자 평균 월급이 150에서 200루블 정도였다는 걸 감안했을 때, 일반적인 노동자가 오랫동안 일해도 쉽게 구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https://www.rbth.com/history/333815-soviet-apartment-buy|(출처) Could ordinary Soviet people buy themselves an apartment? (영어)]]]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장시간 공용아파트나 단칸방, 또는 다락방이나 기존에 가족들과 살던 집[* 이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보통 자녀가 성인이 될 경우 독립하여 분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겨졌지만, 소련에서는 주택문제로 인하여 집을 구하기 여의치 않을 경우 [[미혼]]인 성인자녀가 부모와 계속 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에 거주하면서 국가로부터 집이 나오길 기다렸다. 보통은 기숙사나 주택 또는 관사를 제공하는 직장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전문직종에 종사하면서 자녀가 있을 경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선적으로 배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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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거주 이전도 자유롭지 않아[* 중국의 [[호적|후커우]] 제도와 비슷하게, 소련에서는 거주지 등록제도를 이용해 도시 거주인구의 거주허가를 제한하여 사람들이 도시에 과도하게 몰리지 않도록 방지했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거주지 제한이 풀리자 사람들이 일자리나 학업으로 주요 도시로 몰리면서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한국의 [[서울 공화국]]과 유사하게 수도 집중이 심한 편이다.] 이사가기는 쉽지 않아서 식구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아파트를 재할당받을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소련인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사는 아파트를 가리켜 토끼집이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다만 소련 붕괴 이후 부동산이 민영화되고 임대료와 부동산이 급속히 오르면서 집값과 임대료 감당이 힘든 서민들은 이런 이유로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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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르 코르뷔지에]] 등 현대건축의 영향을 받아 [[도시계획]]을 구상할 때 녹지 면적을 많이 조성한 편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구소련권 국가들이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음에도 경제적 상황이 비슷한 국가들에 비해 눈에 보이는 슬럼가가 별로 없어서 경제적 형편이나 도심 외관이 나아보인다는 평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아파트들의 모양새가 비슷비슷하여서 칙칙하다는 평도 듣기도 한다. 다만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국내여권|거주지 등록]]같은 거주이전 제약이 사라지자, 시베리아나 오지 지역에 정책적으로 조성된 도시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은 경제적, 사회적 여건을 이유로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유령도시가 대거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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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거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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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도시 지역은 건설 몇달, 늦어도 몇 년 안에 아파트를 바로 받을 수 있었지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예프 등 인구 100만 이상 혹은 각 공화국의 수도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 지역은 토지 부족 및 인구증가 억제를 위한 개발제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짧게는 몇년에서 길게는 10년 정도 대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대기기간 동안 공용아파트 단칸방[* 보통 외국의 스튜디오 아파트나 더 쉽게 설명해서 한국의 원룸을 떠올리면 된다.]에서 세내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파트를 받는다 해도, 건설비용과 건축 용의성을 고려해 거대한 소련의 영토 넓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비좁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도시화율이 높았던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의 출산율이 2명 초반 대로 크게 낮은 요인이 되었다.[* 이 당시 도시인구가 많은 유럽권 공화국들이 아이를 많이 낳지 않은데 반해 농촌인구가 많은 중앙아시아권이나 캅카스, 몰도바는 출산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이러한 출산율의 불균형은 1960년대부터 소련 당국에서 골칫덩어리로 여겨졌다. 다만 유럽권 공화국이라 해도 주택사정이 널널한 농촌은 출산율이 2명대 중반에서 3명대를 기록했기 때문에 1명대 중후반대인 도시지역에 비해 크게 높아 이 당시에 인구증가는 그럭저럭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로 농촌의 출산율도 급감하면서 인구감소 문제가 초래된 것. 이 당시에 유럽권 공화국 도시주민들을 대상으로 소련 당국에서 여론조사를 여러 번 실시했다. 사실 이를 반영해서 소련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의 넓이는 넓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집의 크기가 커졌다해도 주민들의 구미에 맞는 수준은 아니었다.] 소련 말기인 1990년 두샨베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벌어지던 시위도 [[아시가바트]]와 [[두샨베]]에서 주거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몇 년씩 걸려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중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으로 인하여 이주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이 우선적으로 아파트를 배정받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어났다.[* 당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은 아르메니아로 되돌아가던 상황이었다.] 그 대신에 아파트를 받으면 임대료와 관리비는 쌌기 때문에 주거비 부담은 매우 적었다. 1980년대 기준으로 소련 가계소득에서 임대료와 관리비가 차지했던 비율은 3%였다. 이는 웬만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공공임대주택 시스템이 발달된 국가들보다도 소득대비 임대료가 훨씬 낮았으며 이는 저축률을 크게 늘리는데 용이했기 때문에, 소련 시민들의 높은 구매력을 뒷받침하였다.[* 물론 소련 당국과 기업에서 이러한 높은 저축자금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 함정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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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련이 국토가 넓었음에도 주택이 부족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시골 간 [[사회기반시설]] 격차가 심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산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도시에 우선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에, 지방 인구가 일자리나 학업을 이유로 대도시에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따라서 농촌 인구는 정체되는데 반해 도시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도심지와 근교 지역 아파트를 받을려는 수요가 필연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때 대대적으로 아파트를 건설한 이후로도 주택난이 있었던 편이었다.[* 좀 더 쉬운 예로 한국에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산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방 인구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이주한 역사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사실 소련 뿐만 아니라 한국같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산업화를 '''단기간에 속성으로''' 진행한 국가들의 경우, 공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시의 식량 공급 및 물가를 이유로 농작물 가격을 저렴하게 유지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농촌 사회의 희생이 따랐다.] 다만 이러한 대도시 주택사정과 별개로 소련인들도 별장을 겸하여 시골에 단독주택을 가지는 경우는 많았다. 주로 국가에서 땅을 받은 경우가 주류였고, 남아도는 시골 주택을 상속, 임대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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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택난은 교통과 문화시설을 비롯한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외에도 자동차 보급이 높지 않았던 것도 주택난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가령 자동차를 한 대 받으려면 몇 년에서 십 몇 년씩 걸렸다. 사실 소련은 서방 국가들처럼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 대다수 구소련권 국가에서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보편화된 것은 21세기이고, 그나마도 경제 사정 상 중고차를 수입해 타는 경우가 많다.]이었던 관계로 단순히 땅을 나눠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으로 소련은 계획경제의 특성을 활용해 거주지를 최대한 직장과 인접한 곳으로 배치하여 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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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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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전반적인 노동조건은 스탈린 시절 이후 좋아진 편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주60시간 노동이 일상적이었다가 혁명 이후로 1일 8시간 주 48시간제로 바꾸었고 1927~33년에 이르는기간동안 1일 8시간 근무제에서 1일 7시간 근무제로 바뀌면서 주 42시간제 노동제도를 채택하였으며 주간 평균 노동시간은 대략 40.3시간 안팍이었다고 한다. 물론 대숙청 시기에 생산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근무태만으로 [[굴라크]]에 보내진다거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다시 근무시간이 증가하여 주 48시간제로 복귀되었던 시기가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로 주48시간제는 상당기간 시행되었다. 그러다가 전후복구가 어느저도 마무리된 [[흐루쇼프]] 시대인 1956년에 1일 7시간 근무제로 복귀함과 동시에 주41시간 노동제를 시행하였고(토요일은 6시간 근무), 이어 1961년에 토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그 대신 평일 근무시간을 1시간씩 늘리는 방식으로 주5일제 주40시간 제도가 전면 시행되었다.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부터는 직장 분위기가 크게 여유있게 변하면서 소위 복지 천국이라고 불리는 [[북유럽]]보다 근무조건이 개선되었다. 당시 소련 노동자는 휴가도 길게 배정받았고, 병으로 근무하지 못하는 때도 허가를 받아 국립 요양원에서 치료 목적으로 요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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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배정하였기에, "공식적으로는" 실업률이 0%대였고, 대부분의 기업이 공기업이었기 때문에 직업안정성은 하나는 높아서 한번 입사하면 어지간히 큰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평생직장이 보장되었다.[* 물론 그 대신에 급여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다만 공공요금이 쌌고, 집을 싸게 임대했으며, 시장에서 부업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걸로 버텼다.] 그렇지만 단기간 계약으로 일하는 노동자도 상당수 있었고, 약 1,100만명 가량의 노동자가 매년 직업을 바꿨으며, 기술학교를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거나, 실제 필요 인원에 비해 과다하게 배치되는 등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https://content.time.com/time/subscriber/article/0,33009,842009,00.html|(출처) Soviet Union: Are the Jobless Unemployed? (영어)]] (소비에트 연방: 무직자는 실업자인가?), 1965년 8월 20일, TIME.] 따라서 소련은 공식적인 실업률은 매우 낮았어도 실제로 모든 인민이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생활한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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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무직자나 부랑자 등 일정한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 일명 사회적 기생 혐의를 적용하여 처벌하였고, 스탈린 말기와 [[유리 안드로포프]] 시대에는 노동규율 강화를 명목으로 일정 수입이 없는 부랑민들도 단속을 했기 때문에 실제 실업률이 얼마인지 정확한 통계를 집계하기 어려웠다. 보통 4개월 이상 별다른 이유없이 일을 안하면 처벌하는 식이었고, 그래서 소련에서는 [[고프닉]]이나 부랑민도 최소한 부업을 가지거나 단기 혹은 단시간 계약직에 지원하여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정하고 몇년간 직장 안다니고 놀려면 최소한 자격증 시험이라도 본다는 핑계는 대던가, 병원 다녀와서 허위진단서라도 떼는 식의 수고는 들여야했던것이었다. 물론 가정주부들과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농민과 사냥꾼들은 이 규정에서 당연히 예외이기는 했다. 사회적 기생죄는 특히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쓰였는데, 주로 반체제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사회적으로 기여도가 낮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벌했다. 대표적으로 198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Иосиф Бродский)는 소련 당국을 비난하는 문학작품을 내놓다가 사회적 기생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한동안 아르항겔스크에 있는 국영농장에서 노역해야 했다. 이 때문에 언더그라운드 가수나 반체제 문인처럼 소련 당국에서 탄압했던 사람들도 별도로 부업에 종사했다. 가령 빅토르 초이는 화부로 일했으며, 마이크 나우멘코는 극장 스태프였으며,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경비원으로 일했다. 유리 셰브추크는 미화원이나 화부, 야간경비원 등으로 여러 단기직업을 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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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브레즈네프]] 집권 후반기에는 노동생산성을 깎아먹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점이 되었다. 그래서 [[유리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등극하고 나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잠시 이를 단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드로포프 사망 후 보수파 인사였던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집권하면서 다시 느슨해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에는 국민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음주를 제한하는 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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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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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사회통제를 중요시 여겼다. 특히 보안기관이었던 합동국가정치부(OGPU)가 [[NKVD|내무인민위원회(NKVD)]]로 합병된 1930년대 중반에는 '''경찰관이 곧 비밀경찰관 그자체였다.''' 특히 대숙청 시기 NKVD는 소위 NKVD 트로이카라 하여 지역당 서기, 검사, 지역내무서장 3명만 있으면 신분지위를 막론하고 체포하여 즉결처분을 내릴 수 있었다. 트로이카의 활동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1936년 10월부터 1938년 11월 사이 '''약 150만명 가량이 체포되었으며, 그중 66만명 가량이 총살되었다.'''[[https://istmat.org/node/14957|출처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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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공포기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이후 [[스탈린 격하 운동]]을 겪으면서 막을 내렸다. 스탈린 시기 공포 통치를 견뎌내야 했던 공산당 간부들은 스탈린 사후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 분위기를 완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치안기관인 내무부(MVD)와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를 별도 부처로 분리시키고, KGB 또한 소련 정부 직속기관으로 변경되면서 이전보다 권한이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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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숙청]] 시기와 같이 공권력이 누리던 무소불위의 권력이 줄었을 뿐, 소련 사회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사회였다. 특히 소련은 반정부시위에 시위진압경찰을 투입했던 서방권과는 달리, 당국에 불만을 표출하는 대중시위에 군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으로 대응한 사례가 많았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1957년 노보체르카스크 학살이 있으며, 1989년 트빌리시 시위 유혈진압과 이후 1991년 1월 리가, 빌뉴스에서 소련군과 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한 무력진압 시도는 당시 텔레비전 등을 통해 소련 전국에 보도되면서 이후 [[소련 해체]]를 가속화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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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총기소지에 대한 규제는 동아시아권에 비해서 관대했던 편이었는데, 이는 인구밀도가 낮아 야생동물에게 습격당하거나 범죄를 당했다고 신고해도 출동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는 지역이 많았고, 이 때문에 소련 당국에서도 사냥용 [[엽총]] 소지는 허용했다. 물론 사전에 사냥허가를 받아야된다는 전제조건이 달려있기는 했다. 그래서 미국에 비해 살인범죄율이 낮은 편이었지만, 치안은 아주 좋은 것까지는 아니고, 보통수준으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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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치면서 소련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범죄율이 급속히 증가했다. 이 당시에 사냥용 엽총들이 암시장에 풀리기 시작한데다가, 동시에 밀무역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총기를 밀수하는 경우도 급속히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범죄율 증가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 SFSR]] 통계를 기준으로 보면 1987년에는 10만명당 살인률이 6.3명이었던것이 1990년에는 14.2명으로 급속히 증가하였고 이는 당시 안좋은 치안을 자랑하던 미국(10만명당 10명)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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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 전인 1990년에서 1991년 즈음에는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군대가 치안에 투입되어 거리에서 군인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러시아에서 전반적인 경제기반이 붕괴하면서 범죄율이 폭증했다. 비교적 경제사정이 안정되는 200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는 [[레드 마피아|마피아]]나 [[네오나치|스킨헤드]], [[부패]] 등 여러 범죄 소굴로 악명 높았다. 당장 불과 2010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에서 유학하던 한국 유학생이 네오나치 폭력배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0021900927|(출처1) 한국유학생, 러시아서 집단폭행 당해 사망 '충격', 2010년 2월 9일, 한국경제신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059266|(출처2) 러시아 한인 유학생 괴한에 피습 중태, 2010년 3월 8일,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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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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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국민은 건강 보호를 요구할 자격이 있으며 소련의 모든 의료 기관에 무료로 입장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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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헌법]](1977년 [[브레즈네프]] 헌법) 제4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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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인류 최초로 무상 의료 제도를 실현한 국가였으며 특히나 [[공중보건]]에 관심을 기울여 [[결핵]], [[티푸스]], [[소아마비]]같은 질병을 예방하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78년에는 [[알마티|알마아타]]에서 공중보건 증진을 촉구하는 알마아타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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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인들은 별도의 세금 없이 의료 및 약제비까지 모두 무료로 진료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의료 체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휴식하면서 치료할 수 있는 [[요양원]] 체계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급할 때 치료는 물론이고 돈 많이 들어가는 [[수술]]도 무료로 받을 수 있어 접근성도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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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높은 의료 접근성에 비해 질은 다소 떨어졌다. 특히 지역 간 격차가 큰 문제로 꼽혔다. 물론 이 문제는 어느 정도 국토가 넓은 나라라면 다들 겪는 문제라 특이한 것이 아니지만, 소련은 그 정도가 상당히 심한 편이었다. 가령 [[영아사망률]]도 도시화율이 높은 [[발트 3국]]은 [[선진국]] 수준의 양호한 수치를 보였지만, [[농촌]]에 주거하는 비율이 높은 [[중앙아시아]]권 국가들은 영아사망률이 [[개도국]] 수준으로 높게 나오는 식이었다. 또한 [[치과]] 치료도 품질이 썩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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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 [[붕괴 후 혼란기|후 혼란기]]에 빠졌던 [[러시아]]가 [[1990년대]]에 의료를 유료 서비스로 바꾸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러시아인]]이 속출하기도 했다. 나중에 상황이 좀 안정되면서 오늘날의 러시아도 무상 의료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별도의 [[세금]]을 추가로 납입하며, 약제비는 개인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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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마쉬코 의료 제도의 도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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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국영 무상 의료 제도를 설계하고 구현한 사람은 1918년에 초대 보건 인민 위원 평의회 의장에 취임한 니콜라이 세마쉬코(Nikolai Semashko, 1874~1949)였다. 쿠르스크 태생의 세마쉬코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의학생으로서 빈곤 계층의 의료 접근성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제정 러시아 사회의 경제 · 사회적 불평등을 목도한 그는 청년 시기부터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참여해 사회 변혁을 부르짖었으며 의료 활동을 사회적 평등과 복지의 필수 요소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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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권은 의료 체제의 수립과 개혁을 추진했다. 광대한 영토와 유럽 최대의 인구,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민족들이 살아가는 사회 · 문화적 특성, 행정 체제의 낙후성 등으로 인해 제정 러시아는 세계 최초로 보건부를 세우고 상당한 성과를 올렸음에도 여전히 의료 문제가 심했고 의료 전반을 종교 병원과 귀족 · 부르주아들이 세운 민영 병원, 자선 병원, 젬스트보 병원에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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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세마쉬코는 여러 기관으로 나뉘어 혼란스러운 의료 체계를 재정비하고 일원화된 공공 의료 제도를 수립하기 위한 장대한 계획을 추진했다. 먼저, 그는 "만인을 위한 무상 의료"라는 구상을 세우고, 이 위에서 보건 정책을 설계했다. 그는 제정 시기의 의료 제도를 제한적이고 엘리트층 중심의 의료로 간주하고 새로운 노동자의 나라에 보편적이고 노동자 · 농민 중심의 대중적 의료 제도를 세운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만, 세마쉬코의 이 주장은 제정 러시아 또한 점진적으로 무상 의료 제도를 구축해 나갔다는 사실을 다소 폄하한 점이 있다. 제정 말기가 되면, 상당수 의료 기관에서 병원 소재지에 거주하는 주민이나 저소득층에게는 무상 의료를 제공했다. 다만, 재원과 인력 부족 및 광대한 영토로 인해 세마쉬코의 지적처럼 제한적인 혜택만 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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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마쉬코는 보건 인민 위원 평의회에서 가용 가능한 모든 의료 자원을 확보해 중앙집권적으로 통합하고 제정 시기에 여러 부처와 민간 단체로 분열해 있던 의료 체계를 일원화했다. 세마쉬코는 이를 통해 보건 정책의 효율성을 강화하고 공중 보건과 예방 의학을 확대해 소련 인민들의 건강을 개선하는데 성공했다. 도시 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에도 의사와 간호사들을 배치하고 지역 진료소와 병원을 설치하여 의료 접근성을 대폭 확장한 덕에 기존에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던 농민과 노동자들도 기초적인 의료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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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0년대 내내 인력과 재원이 부족한 탓에 의료 체계의 구축이 미비해서 지역별로 의료 수준이 상이한데다 의료 접근성 문제와 전염병 감염 문제가 계속 일어났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나라의 의료를 중앙집권적으로 운영하다보니 각 지역의 특성을 잘 배려하지 못해서 많은 지역에서 크렘린에 갖가지 요구 사항과 진정을 보내고 불만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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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간기 청소년 노숙 문제와 학교 보건 제도의 수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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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은 러시아의 아동들에게도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수십만의 가정이 파괴되고 부모들이 죽거나 실종되어 무수히 많은 숫자의 아동들이 고아가 되었다. 특히나 내전기에는 볼가 대기근과 콜레라 판데믹 같은 자연 재해들이 퍼져 성인에 비해 저항력이 낮은 아동들이 기아와 전염병으로 무참히 죽어 나갔다. 1920년대 초, 러시아에서 정해진 거처가 없는 아동의 숫자는 450 ~ 700만으로 추정할 정도이며 많은 수의 아동들이 거리에서 생활하면서 범죄나 노동 착취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청소년 범죄도 급증해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범죄율이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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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마쉬코는 위원회를 조직하고 여러 부처와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내무부 · 교육부 · 노동부 · 보건부 등이 여기에 참여해 종합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경찰과 지방 당국은 청소년 노숙자의 수를 파악하고 이들을 보호 시설로 이송했으며 당과 노동 조합, 여성 단체, 콤소몰과 피오네르 소년단 같은 청년 단체들도 아동들을 원조했다. 당대 러시아 사회는 공공 기관과 민간 단체를 막론하고 아동 쉼터와 보육 시설을 건설해 최대한 아동들을 보호하려 했다. 20 ~ 30년대에 운영된 이 아동 · 청소년 보호 기관들은 청소년 범죄와 아동 유기를 막기 위해 지역 사회와 연계한 보호 제도를 갖추고 있었고 사회 복지 제도와 법 제도에 의거해 아동 · 청소년들에게 안전과 복지를 제공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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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쉼터는 거리에서 발견한 아동을 임시로 보호하는 기관이었으며 연령과 신체 상태, 교육 수준에 따라 아동을 고아원이나 노동 코뮌에 보냈다. 고아원은 단순히 아동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기초 교육과 직업 교육을 제공했으며 많은 아동들이 고아원에서의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노동 코뮌은 빅토리아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구빈원과 유사한 시설이나, 그보다는 훨씬 인간적이었다. 코뮌은 아동을 재사회화하고 집단 생활과 교육을 통해 사회성을 기르고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코뮌의 교육 과정은 아동에게 직업 훈련과 기초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실용적인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고 농학 · 산업 기술 등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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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력 덕분에 20년대 초에 최대 700만 이상으로 파악하던 청소년 노숙자의 숫자가 27년에는 10만여 명으로 감소했다. 고아원과 코뮌에서 많은 수의 아동들이 숙식을 제공받고 교육 과정을 이수해 자립할 수 있었다. 청소년 범죄는 물론, 전반적인 범죄율이 감소하고 사회적 불안도 점점 완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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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원과 인력 부족 문제로 인해 고아원과 코뮌, 아동 쉼터 모두 그 수가 충분하질 못했고 일부 고아원은 열악한 환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 고아원과 코뮌은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운영에 문제가 발생했고, 아동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들이 크렘린에 보고되는 일도 많았다. 게다가, 국가적 노력과 지역 사회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고아원이나 코뮌 출신 청소년들이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혀 의심을 사거나 차별받는 일이 많아 사회에 복귀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도시에서 청소년 노숙자 문제를 해결한 뒤에도 농촌 지역에서는 상당 기간 동안 청소년 노숙자 문제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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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건강이 국가의 미래와 경제적 · 사회적 안정성과 직결된다고 믿은 세마쉬코는 학교 위생과 청소년의 건강을 국가 의료 체계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학교 위생 문제를 전담할 부서를 세우고 학생들의 건강을 증진시킬 체계적인 위생 제도를 수립했다. 또한, 모스크바 의과 대학을 위시한 여러 고등 교육 기관에 학교 위생학과를 설립해서 독립적으로 청소년 건강에 대해 연구하게 하고 전문 인력을 육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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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교에 의료 인력을 배치해 학생들의 건강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보건 교사'가 학생들의 영양 · 체육 활동 · 학습 환경을 관리하고 질병을 예방하게 했다. 위생 규정을 도입해 교실의 크기와 조명, 공기질, 가구의 설계를 규제하고 수업 시간과 휴식 시간을 조정해 학생들의 피로를 관리했다. 보건 교사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건강 검진을 통해 질병 감염을 예방하고 학생들의 건강을 관리했다. 학생들이 균형잡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학교 급식 제도를 시행하여 영양학적 기준에 맞춘 식단을 제공했다. 체육 교과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고 신체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체육 활동을 장려했으며 학교 운동장과 각종 체육 시설의 건설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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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특수 교육 기관과 치료 시설을 설립하여 장애 학생들이 전문적인 치료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리고 장애 학생과 비장애인 학생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힐 수 있도록 통합 교육을 실시하고 장애 학생들에 대한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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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책과 제도의 시행은 학교의 환경을 개선해 학생과 교직원들의 피로도를 낮추고 질병 감염을 예방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예방 접종와 건강 검진을 실시함으로써 질병 감염율을 떨어뜨리고 학생들의 건강을 향상시켰다. 집중력 향상과 좋은 학습 환경 조성을 위해 조명과 공기 순환에 신경쓰고 인체공학적으로 가구와 교구를 설계한 것은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체육 활동을 장려한 것은 학생들의 건강 증진과 우수한 체육 인재의 육성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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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다른 조치들과 마찬가지로 학교 위생 분야도 재원과 인력 부족 문제를 겪었고, 도농 격차가 존재했다. 인프라가 우수한 도시에서는 체계적인 관리와 인력 · 재원 투입이 가능했지만, 농촌 지역에서는 정책과 사업 집행이 제한적으로 이뤄져서 농촌 지역 학교들이 많은 어려움에 처했다. 또한, 일부 학교는 학급 과밀 문제가 심해 학생 개개인에 대한 관리가 부족했고 의료 인력들이 업무 과중으로 곤란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연방 정부의 관심과 투자로 차츰 해결되어 가다 브레즈네프 정권 후기부터 문제가 재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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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간기 농촌 지역의 의료 부족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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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초기에는 정부 당국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젬스트보 의료 제도와 교회 병원, 각종 자선 병원들을 흡수한 소련의 의료 체계는 재원과 인력 부족 문제로 인해서 농촌 주민들에게 기존에 비해 크게 개선된 의료 혜택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농촌 지역은 상대적으로 도시 지역에 비해 사망율이 높고 의료 접근성이 낮았으며 전염병 발생 문제도 계속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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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26년 기준으로 농촌 지역의 42.3%에는 병원이 전혀 없었으며 21.3%의 읍(во́лость.볼로스트)에는 진료소도 없었다. 이는 상당수 지역의 농민들이 안정적인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문제 때문에 연방 정부는 의료 마차를 개발하고 의사들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의료 혜택을 제공케하는 대안을 써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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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런 조치를 취했음에도 27년 기준으로 농촌 진료소의 26%만이 교통 수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환자 가족이 제공한 교통 수단을 활용하거나 의사 본인이 어떻게든 확보한 교통 수단에 의존했다. 그래서 정규 의료 시설이 없는 지역들은 의사의 왕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러시아의 농촌은 주로 산촌이고 도로망이 열악해 의료 인력의 이동 시간이 오래 걸렸고, 이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았고, 응급 환자들이 골든 아워를 놓치는 일이 빈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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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지역의 병원들도 의료 시설로 설계한 건물이 아니라, 의료 시설로 임시 개조한 건물이 많았다. 원래 의료용으로 설계된 곳이 아닌데다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수도 · 전기 공급이 원활치 않아서 의사와 환자들이 불편함을 겪었다. 상당수 병원과 진료소에 전기와 수도의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병실에는 이불과 시트, 병상 같은 설비가 부족했다. 쥐와 벌레 같은 해충들이 병원을 침범하려 해서 위생 문제와 감염 문제도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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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20년대에는 의료 장비와 약품이 부족해 농촌의 여러 병원들은 수술 장비는 커녕 기본적인 의료 장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의약품은 '약품 기근'이라 부를 정도로 부족했다. 그래서 환자를 치료하고 싶어도, 여건이 부족해 기초적인 진료만 해주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으며 응급 상황이 발생해도 제대로 된 진료를 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는 마취제가 없어서 환자에게 주류를 들이키게 하고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신과 의약품이 부족하니 소련이 자랑하는 예방 의학은 농촌에선 그 설 자리를 잃었다. 예방 접종 계획과 위생 교육의 집행은 지지부진했고 중도에 집행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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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열악한 인프라와 과다한 업무량, 낮은 급여와 나쁜 근무 조건으로 인해 농촌에서 의사들이 점차 도시로 유출되었다. 1920년대 초에는 농촌에 8280명의 의사들이 일하고 있었지만, 33년에는 6180명으로 감소했다. 그런데, 인구 증가로 인해 의사 1인이 담당하는 인구는 1911년 기준 22,900명에서 20년 26,900명으로, 33년에는 35,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20년대의 농촌 의사들은 하루 평균 200명 이상의 환자들을 진료해야 했고, 과로가 심해 의사들이 환자에게 제대로 신경을 써주기가 힘들었다. 의사들이 환자 진료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니 의료 혜택의 질적 수준이 낮아지고 진료 과정에서 질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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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런데, 급여가 낮고 주택과 생활 여건도 열악했기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농촌에서 일하기를 꺼려서 의사 탈출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1913년만 해도 농촌에서 근무하는 의사가 전체 의사의 30%를 차지했지만, 1926년에는 13.2%로 급감했다.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의 피해를 고려해야 겠지만, 전후 경제 재건이 상당 부분 이뤄진 26년에조차 의료 재건은 요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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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환경과 의사들의 탈출 현상은 농촌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사기를 낮추고 양질의 의료 인력이 사라지는 현상을 야기했으며 이 때문에 농촌 지역은 상대적으로 의료 인력의 질적 수준이 낮아지게 되었다. 농촌 의사의 상당수가 교육 과정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거나 경험이 부족했고, 이 때문에 의료 사고가 증가했다. 의과 대학이나 의학교를 졸업해 제대로 된 교육 과정을 이수한 의사들도 실습이 부족해서 수술 중에 환자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상황이 개선된 30년대에조차 의사 과실로 환자가 사망하는 의료 사고들이 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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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들도 많았지만, 일부 의료진들은 환자를 무례하게 대하거나 성의 없이 대해서 농촌 병원과 의료진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을 심화시켰다. 응급 상황인데 퇴근 시간이 되었다는 이유로 의사가 칼퇴근을 해버렸고, 결국 방치된 환자가 사망하는 일에 대한 보고들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 정부는 성적이 좋은 학생이나 유능한 전문직 종사자들을 강제로 군 장교로 징발하던 방식을 의료 분야에도 적용했다. 의과 대학과 의학교 졸업생들을 농촌 지역에 강제 배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졸업생들이 농촌 배치를 어떻게든 피하려 했고 기회만 있으면 도시로 돌아가려 했다. 강제로 끌려온 것이다보니 농촌 의사들의 일부는 의료 활동에 의욕이 없었고 환자들을 형식적으로만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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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20년대에는 임산부와 신생아들을 위한 의료 혜택이 매우 부족해 다수의 임산부들이 병원이 아닌 마을의 조산사나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이 때문에 농촌 지역에서는 산모와 신생아 사망율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심지어는 농촌 여성의 80%가 전통적인 조산사나 가족의 도움을 받아 출산했다는 보고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병원에서 출산을 하더라도, 상술한 인프라 부족과 병원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임산부와 신생아의 질병 감염 위험이 상당히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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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농촌 의료 문제의 원인에는 연방 정부도 있었다. 농촌의 의료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연방 정부가 핵심 지지층인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도시 지역의 의료에 재원을 집중하는 정책을 쓴 것이다. 20년대 동안 연방 정부는 전체 인구의 70 ~ 80%를 차지하는 농촌 지역에 보건 · 의료 예산의 30%만을 배분하고 70% 이상의 재원을 도시 지역에 집중했다. 이 때문에 농촌 지역의 의료 공백이 심화되어 농촌 주민들이 소외되는 결과가 발생했으며 위생 환경과 공중 보건 수준, 상 · 하수도망의 개선이 지지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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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농촌의 일부 주민들은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의료 시설을 방문하기 보다는 전통적인 민간 요법이나 마을의 치료사에 의존했다. 일부 농촌 주민들의 의료 불신과 일부 의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양자 간의 갈등을 낳았다. 의료진들은 주민들의 요청을 이해하지 못했고, 주민들을 의료진들을 믿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또한 정부의 강제성을 띤 위생 교육과 보건 정책 집행도 농촌 주민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켜 의료 정책의 효용성을 낮추고 위생과 보건 수준의 향상을 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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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련 초기 농촌 의료 체계의 낮은 수준과 열악한 의료 인프라는 의료 인력의 양적 · 질적 부족, 열악하고 부족한 시설 및 장비, 의료 인력의 과중한 업무 부담, 감염병 관리 부족, 정부의 잘못된 예산 집행, 주민들의 신뢰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는 농촌 주민들의 생명에 위협을 끼쳤으며 소련 의료 체계의 구조적 문제를 더욱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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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의료 부족 문제는 20년대 내내 지속되었고, 30년대부터 개선 과정이 가시화되었다. 강압적인 농업 집단화로 인해 연방 전체의 농민들이 엄청난 불만과 분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스탈린이 어느 정도의 혜택을 제공해 농민들을 달래려 했던 것이다. 스탈린 정권은 집단 농장을 중심으로 전력 · 수도 · 교육 · 문화 · 의료 등 다양한 인프라와 시설들을 구축하기 시작해 농민들의 분노를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의료 분야에서는 집단 농장 병원들이 설립되고 의료 접근성이 향상되었으며 의료 인력의 숫자와 질적 수준과 개선되기 시작했다. 전력망과 수도망도 갖춰지기 시작했으며 위생 교육과 공중 보건 캠페인의 집행이 촉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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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방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그렇게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도농 간의 의료 접근성과 의료 혜택의 양적 · 질적 차이는 좁혀질지언정 계속 잔존했으며 중앙아시아와 극동처럼 인력과 예산,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곳, 격오지들은 중심 지역에 비해 의료 수준과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러한 도농 격차는 농촌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박탈감을 선사했다. 또한 양적 개선에만 치중해 질적 개선은 부족했다는 평가도 있으며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2 · 3차 의료 기관을 방문하는 과정이 오래 걸려 중증 환자나 만성 질환자들이 불편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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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도농 간의 격차는 선진국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이고, 의료 선진국인 미국도 마찬가지로 겪고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도농 간의 의료 격차가 존재했던 사실을 들어 소련의 의료 제도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연방 정부와 의료 인력들의 노력, 선진국에도 도농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로 소련의 의료 제도에 비난을 퍼붓는 것은 온당치 못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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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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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의 젬스트보 의료 제도의 유산을 물려받은 소련의 의료 체제는 1) 지역 보건의 · 직장 보건의 → 2) 읍 · 면, 시 병원 → 3) 군 · 구 병원 → 4) 공화국 · 대학 · 전문 병원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환자들은 1차적으로 일반의인 지역 보건의나 직장 보건의에게 초진을 받은 다음, 외과 · 안과 · 정신과 · 이비인후과 등 각 전문 과목에 소속된 외래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았다. 아동은 소아과 의사가, 성인은 내과나 일반의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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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지역 의사들은 소도시 의사들의 지휘 · 감독하에 근무했다. 농촌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고 보건소나 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교통 접근성과 교통 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병원과는 별도로 지역 보건소와 소규모 진료소, 응급 진료 · 조산소(Фе́льдшерско-акуше́рский пу́нкт. ФАП) 등을 설립했다. ФАП은 1개소당 약 8 ~ 15km 범위를 책임지고 약 5천 ~ 7천 명의 농촌 주민들을 담당하며 ФАП의 설립 기준은 정착지와 병원과의 거리에 따라 정한다. 내부적으로 펠드셰르(фельдшер. 의학 보조원), 응급 구조사, 조산사, 간호사 등이 근무하고 직원 사무실 · 대기실 · 진료실 · 탈의실 · 격리실 · 응급 분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24시간 운영했다. 79년 기준으로 연방 전체에 89,000여 개의 ФАП와 13,700여 개의 농촌 진료소를 운영했다.[* ФАП의 번역인 응급 진료 · 조산소는 공식적인 번역이 아닌 편집자의 자의적인 번역입니다. 현재 러시아 연방에서 ФАП를 운영 중이기에 적절한 번역 명칭을 찾으면, 즉시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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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의 의사들은 전문 과목 중 1가지를 선택해 6년 간 교육 과정을 이수한 뒤에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대국으로서 고질적으로 인프라 부족 문제를 겪던 게 러시아였기 때문에 의사와 간호사만으로는 의료 수요를 감당키 어려웠기 때문에 연방 정부는 다양한 의료 보조 인력을 육성해 활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펠드셰르(фельдшер)와 조산사(акушерк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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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스트보 의료 체제를 구축하던 시절부터 운용한 유서 깊은 의료 인력인 펠드셰르는 독일 지역에서 활동하던 Feldsher를 러시아에 도입하면서 태동한 직군이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펠드셰르는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 속하는 전문 인력으로서 현대 서방 세계에서 운용하는 의학 보조원(Physician Assistant)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의학 전문 학교(медучилище. 메두칠리셰)나 의과 대학에서 2 ~ 4년 간의 교육 과정을 이수한 뒤, 응급 진료 · 조산소 · 농촌 진료소 · 공장 · 군대 · 광산 등에 배치되어 간단한 진료와 처방 · 문진 · 응급 처치 · 예방 접종 · 출산 보조 등의 업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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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산사(акушерка)들은 조산사 학교나 의학 전문 학교의 교육 과정을 이수한 의료 인력으로서 출산 보조, 산전 · 산후 진료, 여성 질환 상담 등의 업무를 맡았다. 이들은 응급 진료 · 조산소와 산부인과, 지역 병원에서 근무했다. 의학 보조원과 조산사 외에도 병실의 청소와 환자 이송 · 전염병 방역과 소독 · 환자 식사 지원 등을 맡는 간병인, 대형 병원이나 위생 · 역학 센터(санэпидстанция)의 임상 실험실에서 체액과 조직 등의 시료를 분석하는 임상 검사 기술자, X-선 촬영을 맡은 엑스선 기술자, 위생 · 역학 센터 소속으로 전염병 방제 및 방역 · 주거지 소독 · 공공 시설의 위생 관리를 맡은 방역원, 주거지와 직장, 학교 등에 파견되어 위생 교육과 식품 안전 교육을 담당하는 의료 지도원 등의 의료 인력들이 활동했다. 여기서 간병인은 별다른 자격이 필요 없었으나, 다른 의료 인력들은 의학 전문 학교, 또는 대학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거나 관련된 기술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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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마쉬코 체제가 의료 자원과 인력, 용역을 전국적으로 공평하게 제공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의료 제도는 의료 전달 체계가 아주 조직적 · 체계적이고 의료 인력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할당할 수가 있었다. 또한 연방 정부가 의료 인력의 육성에 주력했기 때문에 소련은 인구 대비 의료 인력 수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았다. 인구 1만 명당 의사 수는 1913년에 4명 · 40년, 7.2명 · 50년, 14명 · 60년, 18.6명 · 63년, 20.5명 · 80년, 32.9명 · 89년 36.4명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직전 기준, 인구 4천 명 이하의 소도시(yча́сток. 우차스토크)에는 내과 의사가 성인 2000 ~ 2500명, 소아과는 750 ~ 1250명, 직장 보건의 중에서 공장 지역 보건의들은 1천 ~ 2천 명의 공업 노동자들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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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이 붕괴하던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을 기준으로 해도 연방의 인구 대비 의료 인력 숫자는 미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85년을 기준으로, 미국은 병원 1개소당 183명의 환자를 담당해야 했지만, 88년의 소련은 80명을 담당했고 86년에 미국의 의사들은 1인당 419명을 담당했지만, 88년의 소련 의사들은 1인당 229명을 담당했다. 세계 식량 기구(FAO)에서 정한 최소 식량 요구량의 경우, 미국은 138%이고 소련은 132%였다. 허나, 이는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를 기준으로 한 수치이며 소련 경제가 아직 활력을 띠고 있던 60 ~ 70년대에는 소련이 미국보다 더 나은 수치를 갖고 있었다. 인구당 병상 수의 경우, 89년에 1만명 당 139개의 병상을 확보해 OECD 평균인 90개보다 더 많았고 급성기 병상도 85%로 OECD 평균인 56%보다 더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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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소련의 의료 제도는 국가 중심 의료 제도가 갖는 단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환자들은 의사 선택권이 없어서 해당 지역을 떠나지 않는 한, 다른 의사를 만날 수가 없었고 1차 의료 기관의 역량과 의사의 능력을 의심해 일반의를 찾아가 초진을 받지 않고 곧장 외래 전문의를 찾아가거나 상급 의료 기관에 입원하는 일이 많아서 2 · 3차 의료 기관들이 과다 입원 문제를 겪었다. 이는 의료 인력에게 제공하는 인센티브가 부족해 의사와 의료 기관들이 자발적으로 역량과 의료 서비스의 수준을 개선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서방 국가에서 의사들은 고임금을 수령하는 직종이지만, 소련은 상대적으로 의사들의 급여와 처우가 낮은 편이어서 우수한 인재들이 의료계가 아닌 다른 전도유망한 분야로 진학하는 일이 많아 우수한 의료 인력을 많이 확보하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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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인해 의료 체계가 경직되어 있어 효율성과 신속성이 떨어졌고, 영국의 NHS와 마찬가지로 제도의 효율성이 예산 투입량에 비례했기 때문에 70년대 브레즈네프 정권 후기부터 연방 정부가 의료 예산을 감축하기 시작하면서 의료 수준과 접근성이 서서히 하락했다. 소련 경제가 쇠퇴기에 접어든 80년대의 의료 예산은 GDP 대비 4%로 OECD 평균인 8 ~ 9%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의료 예산이 줄어들자, 의료 행정에 부정부패가 발생해 환자들이 의료진들에게 뒷돈을 주는 일이 관행처럼 되고 블랴트를 이용해 명백히 불법인 개인 진료를 하는 의료인들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고위 관료와 당 간부들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누리고 개인 주치의까지 부리니 인민들 사이에서 박탈감이 심해지고 당 간부 · 관료와 인민 사이의 괴리감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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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70년대의 소련이 서방 세계의 특허 체계에 편입되고 60년대 후반부터 대외 교류가 활성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 · 소 간의 갈등과 기술 봉쇄로 인해 소련의 의학과 의료 기술, 제약 산업은 서방의 선진 의학, 의료 · 제약 · 의료 기기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 제한적이었고 의사와 의학자들 간의 교류 기회도 부정기적이어서 발전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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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굴라그를 폐쇄한 소련 정부가 그 대체품으로 정신 병원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소련 의료계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행하고 오테펠을 통해 스탈린 시대보다 유화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한 크렘린은 반체제 인사들을 잡아다 정신병자로 몰아서 소위 '제 6병동'이라 이름 지은 공간에 수용하는 '인도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각당하자, 소련 정신 의학계는 세계 정신의학계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들었고 결국 세계 정신의학회(WPA)에서 탈퇴해야 했다. 국제 사회와 국내의 민주화 운동 세력, 정신 의학계의 비판을 수십 년 동안 듣고도 꿈쩍하지 않던 소련 정부가 제 6병동을 폐쇄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가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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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 의학에만 집중하고 심혈관계 질환과 호흡기 질환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다보니 흡연과 음주를 즐기는 소련인들이 관련 질환으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를 기준으로 소련의 인구 1000명당 사망률은 25.2명으로 미국(10명)보다 훨씬 높은 편이었다. 88년을 기준으로 평균 수명을 따지자면, 미국의 평균 수명은 남성 68.8세, 여성 76.3세인 반면에 소련은 남성 65세, 여성은 73.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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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 보건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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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전근대적인 사회상과 정부의 지원 부족, 지나치게 광대한 영토와 자연 환경 문제 때문에 산업 혁명 이후에도 영아 사망율이 매우 높았다. 20대 이상 인구의 사망율은 미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낮은 편인데, 영아 사망율만큼은 심각하게 높은 지경이었다. 다행히 제국 정부에서 심각성을 인지해 개선에 나서고 자선 병원, 미르에서 세운 진료소, 젬스트보 진료소와 병원들이 제기능을 다해 세기 전환기에 이르면, 상당한 개선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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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은 통상 태어난 아이의 50%가 죽는다고 인식하고, 1897년에 농촌 지역을 돌며 무상 의료 봉사를 했던 체호프가 농촌 지역 영아의 60%가 영유아기에 사망한다는 보고를 내놓고 있던 러시아의 영아 사망율이 대폭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지역 사회, 종교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 1907 ~ 11년간 러시아의 영아 사망율은 1000명당 244명으로 매우 높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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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시기 의료 전문가들의 유산을 물려받고 높은 영아 사망율 문제를 인지하고 있던 연방의 수뇌부들은 모자 보건과 관련된 사안을 심각한 문제로 인지했다. 특히나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제정 시절에 이뤄낸 성과와 인프라가 파괴된 상황이었기에 사태의 심각성은 더 높았다. 소련의 의료 제도를 세운 세마쉬코는 '어머니와 아이의 건강은 국가의 노동력과 미래 세대의 역량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며 따라서 이를 보호하는 것은 사회의 보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라는 철학을 세우고 대응에 나섰다. 세마쉬코와 보건부의 관료, 의료 전문가들은 모성과 유아 보호를 연방 의료 제도의 핵심으로 간주해 모자 보건 제도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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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정부 또한 모자 보건 제도를 사회적 평등과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 혜택을 보여주는 요소로 간주해 이를 대폭 지원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더욱이, 모자 보건 제도를 성공적으로 수립한다면 1천년 넘게 모성 보호를 위해 노력해 온 정교회와 모성 보호를 국가 시책으로 삼아 추진해 온 제정 러시아 정부를 뛰어넘는 업적을 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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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노동자들을 고통에 빠뜨린 도시 문제와 러시아의 농촌에 만연한 악습을 목도한 볼셰비키들에게 모성과 아동을 보호하는 것은 의무이자,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볼셰비키들의 의도를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러시아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정자로서 의무 위반이며 사회주의자로서는 자격 상실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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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시기, 농촌에서는 시아버지에게 강간당한 며느리가 낳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난로의 장작으로 쓰이거나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고, 산 채로 묻혀 루스의 대지모신 모코쉬의 품에 다시 안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돈 많은 손님들에게 자기 아이들의 성을 제공하고 화대를 요구하는 어머니들도 있었다. 체벌이 만성화된 상황이어서 체벌을 하지 않는 부모가 회고록이나 역사 기록에 특기될 정도였으며 불륜을 명목으로 폭행치사당하거나 성관계를 지나치게 강요받은 탓에 하혈이 심해 과다출혈로 사망한 여성들도 있었다. [* 1890년대 말에 농촌 지역을 여행하던 막심 고리키는 불륜을 명목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신이 된 채로 채찍질 당하던 여성을 구해주려다 분노한 농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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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들의 경우에는 살아남는 게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귀족 가문에서는 사생아들을 친분 있는 가문에 입양 보내거나 고아원에 보내는 식으로 처리했지만, 농촌에서는 그러기가 힘들어서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기를 질식시켜 죽이는 일이 많았다. 운 좋게 일정 기간 동안 자라날 수 있었던 아동 같은 경우에는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방치해 아사시키거나, 루샬카에게 제물로 바쳤으며 몰래 황린이 들어간 성냥을 먹여 천천히 독살한 사례도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죽인 사실을 발각당하더라도, 아동 살해범은 고작 몇 개월 정도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이조차 뇌물을 쓰거나 경찰이나 판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 형벌의 강도를 낮출 수 있었다. [* 다만, 제정 러시아 정부라고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강간하는 악습인 스노하체스트보와 영아 살해는 정교회가 1천년 넘게 막으려고 노력하던 일이었고 세속 정부도 꾸준히 단속했다. 니콜라이 2세의 경우에는 영아 살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과 사생아의 인권을 개선하는 법을 제정했다. 칼루가의 주지사 알렉산드르 아프로시모프는 강력한 단속 정책을 집행해 칼루가 주의 스노하체스트보를 대부분 근절해 버렸다. 스노하체스트보는 칼루가 주 같은 북부 지역에 특히나 만연해 있던 것인데 이걸 퇴치해 버린 것. 이 업적으로 아프로시모프는 러시아 지식인들의 찬사와 칭송을 받았다. 따라서, 제정 러시아의 문제는 모든 농촌 지역의 영아 살해와 악습 퇴치는 이루지는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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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임신 · 출산 · 육아 휴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만삭의 몸으로 일하다가 출산 당일만 쉬고 그 다음날에 공장에 가서 일해야 했다. 출근하지 않으면, 무단 결근으로 3일치 일당을 공제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출산 휴가조차 주지 않아 출산한 당일에도 출근해서 일해야 했다. 산모가 육아를 할 시간이 거의 없어서 영아들은 모유 대신에 매일 설탕물을 젖신 천을 약 12 ~ 14시간 동안 물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러시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영유아의 60%가 2살이 되기 전에 [[천국|천상]]의 부름을 받았고, 나머지 40%는 운명을 저주하며 [[저소득층|지옥]]에서 살아야 했다. [* 제정 러시아의 공장들은 15분만 지각해도 하루치 일당을, 하루 '무단' 결근을 하면 3일치 일당을 삭감했다. 이러한 폭거는 노동법 개정과 노동권의 개선으로 줄어들지만, 비밀리에 규정을 유지하거나 가혹한 규율을 강요하는 공장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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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참담한 실정을 개선하기 위해 연방 정부는 혁명 직후인 1918년부터 아동의 영양 개선을 꾀하는 법령을 반포하고 20년에는 아예 모성 및 유아 보호부를 설립해 모자 보건 업무를 전담케하는 등 모성 보호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임산부 진료소와 여성 의원, 아동 병원, 보육원, 유치원 등 다양한 모자 보건 시설을 포괄하는 통합 체계를 설계하고 중앙집권화를 단행해 모든 여성과 아동에게 균등한 의료 혜택을 제공하려 했다. 임산부와 유아를 대상으로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시행하고 임산부가 정기적인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산전 진료소를 세웠으며 산후에도 계속 진료를 받을 수 있게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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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부는 신생아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적으로 모유 수유를 장려하는 한편, 영유아에게 제공할 분유와 우유의 품질 검사를 강화하고 분유 생산 시설을 증설해 급여량을 늘렸다. 30년대부터 연방 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 기술자와 관료들을 파견해 식품 가공 기술과 설비를 도입했는데, 여기에는 영유아에게 필요한 분유와 우유의 생산 개선에 필요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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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교육부와 연계하여 산부인과 · 소아과 의사와 간호사들을 육성하기 위한 전문 교육 과정과 전문 교육 기관을 수립하고 선진국에서 최신 기술과 지식을 도입했다.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연방 정부는 중앙 모성 - 유아 보호 연구소를 설립해 모자 보건 문제를 연구하게 하고 유아 교사들을 육성하여 산모들에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보육법을 가르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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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 출산 지원금과 모유 수유 지원금 제도를 운영하고 임산부 고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했다. 임산부와 기혼 여성들을 위해 병상을 확보하고 보육원과 유아 급식소를 확충했다. 스탈린 정권 시기에 이르러서는 인력난 문제를 해결하고 연방의 미래가 될 아동들을 키워내기 위해 물질적인 지원을 더욱 늘리고 의료 · 보육 예산을 대폭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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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부터 국가 의료 보험 기금에서 지급하는 출산용품 구매 지원금을 32루블에서 45루블로, 모유 수유 지원금을 5루블에서 10루블로 인상했으며 보험 비가입자들에게도 이 혜택을 확대해 주었다. 출산 지원금 제도를 신설해 6명의 자녀가 있는 가정은 아이를 더 낳으면 그 아이의 첫 돌부터 5년간 2,000 루블을, 10명의 자녀가 있는 가정은 아이를 더 낳으면 일시금 5,000 루블을 지급하고 새로 태어난 아이의 첫 돌부터 4년 동안 연간 3,000 루블을 지급했다. [* 모유 수유 지원금은 수유를 하는 산모의 영양 보충을 위해 제공하는 지원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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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가 건강 문제를 이유로 노동 강도가 낮은 업무로 이전하더라도 기존 6개월 동안 받던 임금의 평균치를 지급하고, 임신을 이유로 고용과 급여면에서 차별을 한 게 발각당하면 형사 처벌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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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정권은 도시 지역에서는 36년에 2천개, 37년 4천개, 38년 5천개의 산부인과 병상을 확충하는 한편, 농촌에는 39년까지 3만 2천개의 병상을 확충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16000개의 병상을 국가 예산으로, 나머지 16000개는 집단 농장에 산부인과를 세운 다음, 75%의 조달 비용을 집단 농장에 부과하고 나머지 25%는 국가에서 부담하는 식으로 조달했다. 이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연방 정부는 36년, 농촌 병원과 집단 농장 병원에 각각 4천 개, 37년과 38년에 각각 6천개의 병상을 확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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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정부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임산부들을 위해서 36년, 농촌 지역에 2700개의 산부인과를 설립하고 1370명의 산부인과 의사를 집단 농장 산부인과에 보냈다. 37년에는 5,000개의 농촌 산부인과와 2천명의 의사, 38년에는 6700개의 농촌 산부인과와 2천명의 의사를 확충했다. 아동 병원 역시 늘렸다. 35년까지 총 40만 개의 아동 병원 병상을 확보하고 있던 연방 정부는 36년에 10만 개, 37 · 38년에 각각 15만 개를 조달해 총 80만 개의 병상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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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까지 유치원은 70만 개로 증설하고, 36년에 20만 개소, 37년 24만 개, 38년에 26만 개를 건설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농촌 지역에도 37년에 6만 개소, 38년에 5만 개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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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정부와 사회 운동가, 의료 · 교육 전문가들의 헌신과 노력 덕분에 산모와 신생아의 사망율은 점차 하락했고, 소련의 모자 보건 제도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는 소련이 만들어 낸 확실한 성과였다. 산모와 신생아의 유병율과 사망율은 혁명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감소했고, 매독과 같은 성병, 각종 전염병의 감염도 줄어들었다. 보육원과 유치원, 산부인과, 아동 병원, 급식 시설의 수가 대폭 증가했으며 기존보다 더 나은 식단과 분유를 급양해 아동의 영양 실조와 발육 부진 문제도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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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초창기에는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의 상흔으로 인해 자원과 인력이 모두 부족해서 제도의 확산이 지지부진했고, 모자 보건 제도는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던 나라에서 임산부들이 의료 인력 부족이나 병상 부족으로 죽는 일도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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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연방 정부의 모자 보건 정책과 교육 계획은 강제성을 띠고 있어서 일부 의료진과 교육 전문가, 지역민들은 정책 시행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농민들은 농촌의 전통과 관습에 어긋나는 새로운 정책의 집행에 반감을 느끼고 저항했다. 이 때문에 다수의 주민들이 정부의 조치를 불신해서 새로운 제도를 완전히 이식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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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인력의 부담도 과중했다. 1930년대와 대조국 전쟁 시기의 보육원은 2교대로 운영되었고, 근무 시간은 하루 16시간이었다. 아무리 휴무를 보장해준다지만, 제정 러시아 최악의 공장에서나 볼 수 있던 노동 시간을 강요한 것은 심히 비인간적인 조치였다. 경제와 행정 부문에 만연하던 부서 병렬주의 문제가 의료와 아동 교육 부문에도 전염되어 교육부와 보건부는 물론, 각 기업과 노조, 콤소몰까지 보육원과 유치원 운영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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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국 전쟁 이후에도 꾸준히 개선이 이뤄졌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계속되었고 브레즈네프 정권의 의료비 지출 삭감은 모자 보건 제도에 악영향을 미쳤다. 영아 사망율이 증가하고 의료 혜택의 품질이 낮아졌으며 환자 대기 시간은 길어졌다.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찾아온 파국은 한때, 전세계가 주목하던 연방의 모자 보건 제도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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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방 의학과 공중 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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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예방 의학을 통해 대규모 전염병과 감염병의 발병을 차단하고 위생 교육과 생활 습관의 개선을 통해 공중보건의 수준을 끌어 올려 질병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려 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통해 국민의 건강을 향상시키고 국가 발전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소련의 의료 제도를 세운 세마쉬코는 "질병은 예방이 치료보다 중요하다"는 논지를 강조하며 예방 의학이 국민 건강의 유지와 국가 자원의 절약에 필수적이란 주장을 내세웠다. 그의 철학에 따라 소련의 보건부는 체계적인 공중보건 정책을 추진하고 예방 의학을 소련 의료 체계의 핵심으로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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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정부가 이렇게나 예방 의학을 강조한 것은 러시아가 오래도록 전염병으로 고통받았기 때문이었다. 광대한 영토, 많은 인구와 높은 출산율, 다양한 민족과 자연 환경, 인프라와 전문 인력의 부족, 행정망의 미비, 맬서스 트랩 및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난, 유럽 하위권의 생활 환경과 경제 상황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유럽에서는 점차 감소하고 있는 천연두와 흑사병이 러시아에서는 자주 유행하고 갖가지 역병들이 마구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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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정부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사망율을 낮추고 공중 보건을 개선했지만, 1909 ~ 1914년간 사망률은 100명 당 28.5명, 1900 ~ 1910년 간 천연두 발생 보고는 약 41만 건, 1904 ~ 1914년 간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3,500명이었다. 1914년 기준, 러시아의 감염성 질병 환자의 숫자는 약 2284만 명으로 유럽 러시아 인구의 약 25%에 달했다. 감염성 질병의 감염률은 1만 명당 19.7명으로 유럽 최악이었다.[* 1896 ~ 1900년 간 사망율은 32.1%이었고, 감염성 질병 감염율과 사망율도 이보다 더 높았다. 제정 러시아라고 해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위 항목에 상술한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인 악영향을 미쳤던 게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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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적으로 티푸스 환자가 약 727만 명, 결핵과 매독 환자를 합쳐 283만, 병명 불명의 급성 감염성 질병 환자가 약 1184만 명이었다. 이밖에도 원인 불명의 발진이 나타난 환자가 약 550만 명이었고, 만성 염증 질환인 트라코마 환자가 약 89만 명이었다.[* 병명 불명의 급성 감염성 질병은 천연두, 콜레라, 페스트 등의 전염병으로 추정된다. 트라코마는 비러시아계 민족 지역에 만연했다. 감염성 질병 감염율을 유럽 각국과 비교하자면 영국(7.8명), 스웨덴(6.6명), 벨기에(4.8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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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부에 올라온 질병 발생 보고는 약 190만 건으로서 디프테리아(약 41만 명), 성홍열(약 36만), 홍역(약 39만), 백일해(약 48만), 볼거리(약 24만) 등의 전염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무부의 질병 발생 보고는 행정망 미비와 공무원들의 태만으로 인해 제대로 된 파악을 하지 못하던 문제와 책임 추궁 때문에 공무원들이 실제보다 더 적게 기록하는 조작을 저지르는 문제가 있어 실제로는 더 많은 감염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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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같은 경우에는 1904년 기준, 모스크바 668개 공장에서 의무실이 있는 곳이 30%, 제대로 된 의사를 고용한 곳이 25%였다. 즉, 의무실이 있는 공장의 약 15%는 의무실에 의사가 없거나 돌팔이였을 것이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대상인 가문에서 출발해 뼈대 있는 상인 집안임을 자랑하는 모스코브스카야들이 가부장주의적 인식을 갖고 최소한의 조치를 취해 줬기 때문에 모스크바는 그나마 이 정도 수준을 갖추었지만, 제국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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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의 자본가들은 노동자 복지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어서 1900년 기준으로 페테르부르크의 공장 중에서 의대나 의학교를 졸업한 제대로 된 의사를 고용한 곳은 단 1곳이었으며 그곳에서 일하는 의사도 하루 2시간만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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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노동자의 20 ~ 30%만이 이용할 수 있었던 아파트의 환경도 유럽 최악이었다. 화장실은 공용이고 그조차 부숴진 곳들이 많아, 화장실이 파괴된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공용 화장실에 절대 보내지 않았다. 노동자 임대 아파트를 탐험한 의사와 탐험가, 지식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윗층 화장실의 오물이 복도 천장과 벽면을 타고 복도 바닥에 스며들고 같은 층 화장실의 악취와 섞여 대단히 화학적인 악취를 풍겼다는 기록,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면 아파트 바깥에 있는 공용 화장실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코를 덮쳤다는 기록, 아파트 내부에 30분만 있어도 두통과 메스꺼움을 느낄 수 있다는 기록, 화장실이 망가지거나 비위생적이라 다들 노상에서 용변을 해결했고 임대 아파트 단지는 그 주변부까지 인간의 배변 냄새가 진동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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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벽지는 벌레로 수놓았다는 기록, 지하층은 환기가 불가능한데다 극도로 습하고 더러웠다는 기록, 우천이나 우설, 라스푸티차가 터지면 거리의 오물과 빗물, 눈 녹은 물들이 섞여 밀려들어오는 형편이어서 큰 강처럼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수준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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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 하수도망도 부족해서 러시아인들은 상시 수인성 질병에 감염될 수 있었다. 1912년 기준, 러시아 전체에서 제대로 된 상 · 하수도망을 갖춘 도시는 10개 뿐이었다. 제 2 수도인 모스크바조차 상수도는 있어도 하수도는 중심부에만 연결되어 있는 지경이었다. 모스크바 아파트 중에 상수도가 없는 곳이 47%, 하수도가 없는 곳이 40%, 전력 공급이 안되는 곳이 34%, 중앙 난방이 없는 곳이 87%였다. 러시아 도시의 빈민들은 공동 수도나 우물을 식수로 썼는데, 우물은 거의 다 오염된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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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는 10월 혁명까지 하수 시설이 제대로 없어서 가정용수와 공업 오폐수가 그대로 네바강으로 흘러갔다. 주민들은 원시적인 정화 시설이 약간 정화한 네바강의 물을 그대로 식수로 써서 콜레라, 장티푸스에 항시 감염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나은 점이 있다면, 페트로그라드 임대 아파트의 75%에 상수도가 연결되어 있고 약 60%의 아파트에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는 네바 강과 같은 하천들이 입지해 있고 원래 늪지대이다보니 지하수가 풍부해서 다른 도시들처럼 수돗가에서 물통을 들고 오래 기다리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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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성 질병은 러시아의 최고 통치자인 황제와 황족들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00년, 황제인 니콜라이와 1황녀 올가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맨 일도 있었다. 이 때, 니콜라이가 장티푸스에 감염된 일은 장난 같은 일이 아니었다. 정말 황제의 목숨이 위태로워서 비테를 위시한 최고위 관료들이 황후와 후계를 논의하고 법학 전문가들과 황족들이 황위 계승 서열을 따지고 있던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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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병도 심각했다. 도시든 농촌이든 매독이 만연해 있어서 마을마다 매독으로 코와 얼굴이 망가져 '들창코'라 불리는 이들을 곧잘 볼 수 있을 정도였다. 1914년 기준, 인구 1만 명당 매독 환자 수는 76.8명, 임질 환자 수는 40명이었다. 제정 러시아 정부도 성병 문제가 극심하단 것을 알고 있어서 관리에 나서긴 했지만, 인력 · 재원 · 인프라가 부족해 개선이 지지부진했으며 관리도 부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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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도 성병이 만연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페트로그라드이다. 페트로그라드는 건설 직후부터 도시 건설을 위해 모여든 남성 노동자들이 많아 성비가 망가진 상태에서 시작한 도시이고, 남성 노동자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중공업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다보니 여성의 비중이 늘어날지언정, 남초 성비가 계속 유지되었다. 이런 탓에 페트로그라드는 수립 초기부터 성비 불균형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고, 성범죄 문제가 발생했으며 성매매가 만연했다. 러시아는 공창제를 시행하는 국가여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합법, 비합법을 가리지 않고 창관과 성매매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성매매의 증가와 성비 불균형은 성병 문제를 야기했지만, 정부 당국의 관리에도 불구하고 성병 문제는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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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성병 검사이다. 제정 말, 노동자 인구가 집중 거주하는 지역과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는 각종 성병과 전염병이 만연해 있어서 각 공장은 정부의 요청으로 성병 검사를 하곤 했는데, 그 방식은 의사가 노동자들을 일렬로 세우고 바지를 내리게 한 뒤에 무작위로 생식기 몇 개를 연필로 툭툭 치고 검사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사는 보고서에 '감염자 없음'으로 쓰고 시청에 제출했다. 이런 형식적인 성병 검사조차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휴가를 떠난 명절 기간에 1회 시행하고 끝냈기에 검사하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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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가 쌓아 올린 유산이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으로 붕괴하고, 기존의 문제들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에 연방 정부는 대규모 예방 접종 캠페인을 시작하고 전염병 통제를 위해 노력했다. 디프테리아, 천연두, 결핵, 소아마비 등 다양한 전염병 백신을 수입, 라이센스 생산, 기술 이전 등의 방식을 통해 보급했으며 자체 개발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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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령대의 인민을 대상으로 이뤄진 접종 덕분에 감염병과 전염병 발병율이 감소하고 러시아를 괴롭히던 판데믹 문제가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또한 전국적인 건강 검진 계획을 시행해 질병을 초기 단계에서 발견해 치료하려 했으며 농민과 노동자, 임산부와 영유아들을 대상으로도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겪는 업무상 질병 문제를 완화하고 임산부와 영유아들의 건강을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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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보건의 개선에도 노력했다. 연방 정부는 초창기부터 공중 보건 수준의 향상을 위해 대규모 위생 교육을 실시하여 인민들의 위생 의식을 개선하고 감염병 확산을 차단했다. 손 씻기, 식품 위생, 깨끗한 물의 중요성 안내 등 기본적인 위생 수칙을 교육했으며 이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라디오, 포스터, 신문 등 가용 가능한 모든 대중 매체를 활용해 위생적인 생활 습관을 홍보했다. 그리고 러시아를 오래도록 괴롭힌 수인성 질병들을 퇴치하기 위해서 상 · 하수도망과 공중 화장실을 확충하고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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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된 서방의 프로파간다 중 하나가 바로 소련군의 수도꼭지 절도설이다. 환경이 열악한 소련에서는 수도꼭지가 귀하다보니 베를린 전투 이후에 교육 수준이 낮은 소련군이 수도꼭지만 있으면 물이 나올 줄 알고 그것만 떼어 갔다는 소리인데, 이미 스탈린 정권 시기에 대규모 토목 사업과 도시화 산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도시에서 수도꼭지와 근대적인 상 · 하수도망은 일상 생활의 요소였으며 농촌에서도 보편화된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군은 하찮은 수도꼭지만 훔친 게 아니라, 연방의 경제와 과학 기술에 필요한 것이라면 모조리 강탈했다. 소련에 비해 산업이 발달하고 과학 기술 수준이 높은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심지어는 만주국과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지에서도 산업 설비와 각종 기계, 인력, 물자들을 모조리 강탈해서 모스크바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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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정부는 의료 인력의 양성과 의학 발전을 위한 조치도 취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등의 주요 도시에 공중 보건 및 위생학 연구소를 설립해 감염병 예방, 위생 개선, 만성 질환 관리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게 하여 성과를 쌓고 정책 기반을 마련했다. 예방 의학 및 공중 보건 전문가들을 육성하기 위한 별도의 교육 과정을 도입하고 일반 의료진들에게도 예방 의학과 환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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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력 덕분에 1천 년 넘게 러시아를 유린하던 전염병과 각종 감염병, 수인성 질병들은 대부분 퇴치되었고 예방 의학 중심의 의료 체계는 비용 절감과 노동력 손실의 감소로 이어졌다. 이는 국가 경제와 예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연방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생산한 백신들은 공산권과 제3세계 국가들의 전염병 근절에도 도움이 되었고 전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던 천연두와 소아마비 같은 범유행 전염병들을 퇴치하는데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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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0 ~ 40년대까지는 재원이 부족하고 도시를 우선적으로 사업을 집행하다보니 농촌 지역에는 의료 시설이 부족하고 위생 환경 개선이 어려웠으며 상 · 하수도망의 확충과 공중 화장실의 건설 속도가 느렸다. 그리고 강제성이 있는 정책 집행과 농촌의 보수성은 정부 시책이 전통적인 삶과 문화를 파괴한다는 인식을 낳아 위생 정책과 교육에 저항하는 이들도 일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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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신 개발과 제약 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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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대국인 소련은 전국토를 유린하는 전염병들을 퇴치하기 위해 건국 초기부터 분투했다. 그래서 의료 체계의 구축과 함께 백신의 도입과 개발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나선다. 1번째, 결핵은 신경제 정책 시기부터 프랑스에서 개발한 결핵 백신을 도입해 스탈린 정권 동안 신생아들을 대상으로 접종을 시작해 결핵 유병율과 치사율을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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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흑사병과 콜레라, 티푸스와 장티푸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콜레라 백신의 임상 실험을 추진하고, 1962년에 WHO와 협력해 장티푸스 백신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3번째, 홍역은 1967년부터 홍역 백신을 전국적으로 보급한 덕에 80년대부터 홍역과 결핵 백신 접종율이 90 ~ 95%를 상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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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진드기 매개 뇌염 백신의 경우, 1930년대 후반부터 개발을 추진해 50년대부터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코메콘과 우방국에 제공했다. 5번째, 천연두는 미국과 더불어 WHO의 천연두 퇴치 사업에 주도적으로 나서서 58 ~ 80년 동안 수천만 도스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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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째, 소아마비는 종전 이후부터 감염 사례가 속출하기 시작해서 심할 때는 연간 10만 명 이상이 소아마비에 감염되었고, 50년대부터 통상 3 ~ 5만 명 이상의 소련 인민들이 소아마비에 감염되고 수천 명의 마비성 소아마비를 겪는 환자들이 생겨났다. 이에 연방 정부는 소아마비 백신의 자체 개발을 추진하는 한편, 세계 각국의 연구 현황과 동향을 살폈다. 1956년 1월, 1차 대만 위기를 비롯해 냉전의 긴장이 심화되던 상황에서 모스크바 소아마비 연구소 소장인 미하일 추마코프, 그의 아내이자 바이러스학자인 마리나 보로실로바, 동료인 아나톨리 슬로덴체프는 소크 백신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 연구 시설을 방문하고 학자들과 의견을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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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프롭스키와 더불어 생백신을 연구하던 세이빈은 미국 정부에서 부작용이 없는 소크 백신에 집중한 탓에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소아마비 백신 개발을 위해 레닌그라드로 떠날 준비를 했다. 세이빈의 진의를 의심한 FBI에서 그의 출국을 방해했으나, 세이빈은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레닌그라드에서 추마코프, 보로실로바와 연구를 추진해 세이빈 - 추마코프 백신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세이빈은 개발한 백신을 멕시코와 소련에서, 그의 동료인 코프롭스키는 콩고와 폴란드에서 시범적으로 접종을 시행했다. [* 세이빈이 사백신 대신 생백신을 연구한 것은 소크 백신이 대부분의 소아마비 합병증을 예방할 수 있지만, 폴리오 바이러스가 중추 신경계를 공격하기 전에 장으로 이동, 장을 감염하고 증식하는 것은 막지 못한다는 점, 의료 인프라와 행정 능력이 부족하고 재원이 부족해 3번씩이나 접종을 해야 하고 관리 · 유지의 난이도가 높은 소크 백신의 도입이 어려운 국가들이 매우 많았다는 점, 생백신은 구강 투여가 가능하고 집단 면역 형성에 유리한 점 등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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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빈 - 추마코프 백신은 59년에 1천만 명 이상의 소련 아동에게 접종을 했고, 61년부터 상업화가 이뤄져 전국적인 접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소아마비 백신 도입은 미국에 비해 늦었지만, 경구 투여가 가능하고 소크 백신에 비해 접종과 보급이 간편하다는 점을 이용할 수 있어서 전국적인 접종과 대규모 보급은 미국보다 더 빨랐다. 크렘린은 WHO와 협력하여 총 60여 개국의 국가에 소아마비 백신을 제공해서 소련의 대외적 위신을 높이고 해당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써먹었다. 선진국에서는 부작용을 우려한 탓에 소크 백신에 비해 접종 빈도가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인도를 비롯한 인구 대국과 개발 도상국들은 부작용보다는 감염율과 치사율을 낮추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세이빈 - 추마코프 백신의 도입과 보급에 적극적이었다. 64년에는 3개 혈청을 모두 통합한 백신의 개발이 이뤄져 백신의 효능과 효율성이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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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의 경우, 대조국 전쟁 이전에 리소자임과 페니실린에 대해 연구하던 지나이다 예르몰료바가 소련산 페니실린을 자체 개발해 야전 병원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페니실린 대량 생산 체제를 도입하기 시작하여 1950년대 중반부터 대량의 페니실린과 항생제들을 제조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으며 그라미시딘 S와 에크몰린 같은 항생제를 자체 개발해 활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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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소련에서 생산한 백신들은 기술력 부족, 생산 공정 관리와 품질 관리 부족 등 다양한 문제가 있어서 초기 생산 과정에서 애를 먹었고 상당 기간 동안 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야 했다. 게다가 저렴한 의약품 공급을 위해 의약품의 조달 가격을 낮게 책정하다보니 제약 회사들이 이윤 부족 및 적자 문제에 시달려 재투자가 어려워지고 생산 개선과 기술 개발에 난항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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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협력하여 범유행 전염병의 퇴치에 공을 쌓은 소련이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생물 무기 개발에도 열을 올렸다. 전염병 백신을 만든 나라에서 비밀리에 전염병 기반의 생물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관리도 잘 못해서 개발 과정에서 무기가 유출되어 버렷고, 이 때문에 개발 연구소가 위치한 지역에서 물고기과 야생 동물의 집단 폐사, 수질 및 토양 오염 등이 발생하고 주민들이 원인 불명의 질병에 시달렸으며 심지어는 사람이 죽는 일까지 터졌다. 비밀리에 개발하는 일이다보니 지방 행정 당국과 지방 당 차원에서도 아는 바가 없어서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거나 크렘린으로부터 침묵을 강요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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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자체 개발한 의약품들 중에는 해외에 수출을 하고 현대 CIS 국가에서도 사용할 정도로 효능을 입증한 것들이 많으나, 멜도니움, 페닐피라세탐, 브로만탄처럼 스포츠 선수들이 도핑을 하는데 오용하여 불명예스러운 오명이 생긴 의약품들도 있다. 먼저, 멜도니움은 원래 협심증을 비롯한 심혈관 질환과 이명, 어지럼증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의약품이나, 복용하면 심폐 지구력도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 페닐피라세탐은 우주 비행사들을 위해 개발한 약품으로 인지 능력 향상과 피로 감소 효과가 있고, 군인들을 위해 개발한 브로만탄은 신체의 민첩성을 개선하고 활력을 일으키면서 피로 방지까지 하는 효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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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을 노린 러시아의 스포츠계에서 선수들의 경기력 개선을 위해 의약품들을 오용했고, 이 때문에 이 3개 약품들은 모두 세계 반도핑 기구(WADA)에 도핑 금지 약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스포츠계에서는 여전히 금지 약물을 비밀리에 오용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고 몇 차례에 걸쳐서 약물 복용이 적발된 바 있으며 샤라포바, 무드릭 같은 세계적인 스타 선수들이 멜도니움을 복용한 게 적발되어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현재도 러시아의 스포츠계는 러시아산 도핑 약물의 오용 문제로 인해 세계 스포츠계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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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액학의 발전과 혈액 은행의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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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진 수혈과 전간기 혈액학의 발전은 소련도 주목하는 일이었고, 소련 혈액학의 발전에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세르게이 유딘, 블라디미르 샤모프 같은 뛰어난 의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 레닌과는 독립적인 볼셰비키 계파를 이끌었던 중진인 보그다노프는 수혈에 큰 관심을 지닌 의사이기도 해서 1925년에 수혈 의학 연구소를 세우고 본인이 28년까지 연구소장으로 재임해 혈액학과 수혈 의학을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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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샤모프는 사체의 혈액을 수혈에 이용하는 연구를 한 의학자로서 사체의 혈액이 10시간 동안 유지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샤모프의 연구 성과에 관심을 갖고 있던 세르게이 유딘은 1930년에 이제 막 죽은 환자의 혈액을 과다 출혈로 죽어가는 환자에게 수혈해 회복시켰다. 이후, 유딘은 스탈린과 접촉해 세계 최초의 혈액 은행을 세웠으며 혈액 보존법을 개선하여 대량의 혈액을 은행에 저장해두고 환자들의 치료에 활용했다. 국가적으로도 헌혈 캠페인을 전개하고 헌혈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조치들이 효과를 발휘한 덕분에 대조국 전쟁 시기에는 수백만의 인민들이 부상병과 환자들을 위해 헌혈을 했으며 수백만의 군인과 민간인 환자들이 수혈을 받아 살 수 있었다.[* 유딘이 세계 최초로 사체 혈액의 수혈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 위험성 때문에 소련에서 사체 혈액을 수혈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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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몇몇 의사와 정치인들이 혈액을 이상한 짓에 이용하기도 했다. 소련 혈액학의 선구자인 보그다노프부터가 문제였는데, 그는 교환 수혈을 통해 노화를 억제하고 인체의 재생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원자들을 받아 교환 수혈 실험을 했으며 본인도 자원해서 수혈을 받았다. 초기에 수혈을 받았을 때는 탈모도 억제되고 신체가 재생된다고 좋아하던 그였지만, 성과에 눈이 먼 탓인지, 혈액 관리에 실패해 교환 수혈에 지원했던 학생 1명이 사망하고, 보그다노프 본인도 수혈 이후에 발생한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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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교환 수혈을 이용한 '회춘' 연구가 끝나는 것으로 보였지만, 교환 수혈에 흥미를 보인 스탈린이 수혈 의학 전문가들을 모아 수혈을 통한 초인 양성 연구를 지시했다. 이로 인해 소련은 유전학에 이어서 수혈 의학 분야에서도 사이비가 생겨나는 어이 없는 일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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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
=== 참고 자료 ===
596
* 붉은 의료
597
* 소련의 건강 보장
598
* On Rural Health in the USSR
599
* The Curative Protective Hospital Regime
600
* USSR: Upgrading the Pharmaceutical Industry
601
* N A Semashko and his role in the development
602
* The evolving Semashko model of primary health
603
* The Evolving Semashko Model of Primary Healthcare
604
* Soviet Agriculture and Industrialisation (Mark Harrison)
605
* The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Organizing Penicillin Production
606
* N. A. Semashko and His Role in the Development of Soviet Healthcare
607
* Sectoral Growth: The Case of Soviet Agriculture (Hans-Jürgen Wagener)
608
* Modeling Soviet Agriculture for Assessing Commanding Economy Policies (Padma Desai, Balbir Sihag)
609
* Vaccine diplomacy during the Cold War (i), heads or tails: Mikhail Chumakov and the oral poliomyelitis vaccine of Albert Sabin
610
* Some Results of the Work on Mass Immunization in the Soviet Union with Live Poliovirus Vaccine Prepared from Sabin Strains
611
612
== [[소련/문화|문화]] ==
613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문화)]
614
소련은 [[발레]]와 음악, 문학 등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온 전통을 유지하고 장려했다. 소련 영화의 경우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유수의 영화 감독들이 세계 영화사 발전에 한 획을 그었으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같은 걸출한 작곡가들을 배출하면서 클래식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대중문화에서도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를 비롯한 발라드 가수에서 한국에서도 소련 락음악의 거장으로 알려진 [[키노(밴드)|키노]]까지 다양한 예술성을 선보인 음악인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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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시에 소련은 문화에 대한 [[검열]]과 감시가 심한 국가였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국가가 판단하기에 거슬리는 표현은 중죄를 선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혹독했지만, 이후 스탈린에 비판적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오늘날 소련 수용소의 현실을 고발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당시 소련에서 출판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하지만 문화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검열은 여전히 엄격했다. 예를 들어 당시 소련 입장에서 "이념적으로" 불순한 [[록 음악]], [[펑크]] 음악가들은 검열에 신경쓰거나 해적판 음반으로 겨우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야 할 때가 많았다. 당시 소련의 검열이 다른 [[현실사회주의]] 국가보다는 여유롭다고 해도, 엄연히 창작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현실은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은유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풍자, 비판하거나, 더나아가 아예 서구권으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영화 [[백야(미국 영화)|백야]]로 유명한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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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문화계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그 대가로 소련 시절에 비해 대중 문화 수요의 질적 하락[* 한국만 해도 케이블 TV가 보급되기 이전 다큐멘터리 등등의 시청률이 높았다가 케이블 TV 보급 이후 채널 선택권이 폭증하면서 결과적으로 교양 관련 프로그램 시청률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하락하는 문제 등이 발생했었다.]이 발생하였다. 소련 시절에는 오페라나 문학 같은 취미를 권장하던 편이었으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국가적 지원이 사라지면서 대중문화 수준이 질적으로 하락했으며 특히 영화산업은 정부지원이 끊긴 이후 큰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경제가 회복되면서 다시 회복할 조짐을 보였으나,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러시아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는 다시 소련식 관제문화로 회귀한다는 반발과 우려가 나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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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
=== 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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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인들은 해외여행은 주로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불가리아]], [[쿠바]], [[헝가리 인민공화국|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 [[베트남]],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루마니아]]를 비롯한 소련과 관계가 친밀한 공산국가나 [[인도]], [[멕시코]]. [[이집트]] 같은 제3세계 국가들 위주로 갔다.[* 다만 제2세계 및 제3세계 국가들도 여행을 가는것도 1세계 국가로 여행가는것에 비해 훨씬 쉽기는 했어도, 이것도 심사를 받아야되었기 때문에 아무때나 갈수있던것은 아니었고, 2년에 한번 갈수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물론 당국에서 예술이나 학술적 목적으로 허락을 얻었거나, 선원이나 항공기 승무원같이 직업 특성상 해외를 방문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 '''원칙적으로''' 1세계 국가로 갈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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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평범한 소련인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제1세계 국가로 여행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쉬운 예를 들자면 1989년 여행자유화 이전 일반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갈 때 난이도가 당시 소련인들이 해외여행을 갈 때 난이도와 비슷했다.] 우선 소련에서는 해외여권을 발급할 때 지역이나 직장 [[소련 공산당|당조직]]에서 발급 심사를 거쳤다. 따라서 당국이 불순하게 여기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여권이 나오기 힘들었다. 출국 목적도 어학연수나 직무상 출장, 또는 학업같은 필수적인 이유여야 했으며, 여행 목적으로 신청할 경우 개인이 아닌 [[패키지 여행|단체 관광]]으로 진행해야 했다. 설령 이러한 과정을 거쳐 허가가 나도 제1세계로 '''정치적 망명'''을 두려워하여 관광 가이드라는 명목 아래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과 동행하는 등 애로사항이 많았다.[* 그럼에도 냉전 시기 예술가나 운동선수를 비롯해 해외여행이 가능했던 고급 인력들 중에서는 해외로 출국한 때를 이용하여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워낙 많았다.] 그래서 당시 소련인들의 대표적인 불만사항 중 하나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해외여행 자유화 정책을 시행해서 1세계 국가로 제한 없이 갈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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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인들이 선호했던 국내 관광지로는 주로 기후가 온화한 [[크림 반도]]를 비롯해 흑해 연안이나, 캅카스, 발트 3국 해안가, 바이칼 호수 등이 있었다.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소련인들의 경우 중앙아시아를 이국적인 관광지로써 선호하기도 했다. 소련에서는 여행권을 주로 패키지 단위로 팔았는데, 일반인을 기준으로 시설이 좋은 리조트나 해변 호텔은 식비 포함해서 3주 머무는데 160~220루블이었고, 일반 호텔은 1달 숙박에 40루블이었다. 직장인의 경우 노동조합이나 지역당 내 공제를 통해 일정액을 직장에서 대신 부담해주었기 때문에 할인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노약자나 미혼모, 퇴역군인은 무료였다. 아무튼 여행비용은 21세기에 비해서 훨씬 저렴하다는 평으로 이는 소련의 교통비가 저렴했다는 점도 한 몫했다. 다만 인기휴양지는 인원제한이 있었기때문에 대개 몇 년에 한번씩 숙박권을 받아 갔다고 하며, 여의치 않으면 가까운 지역이나 [[별장]]에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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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냉전]] 시기 한국인들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적대국가로 지정되어 1990년 9월 한국과 소련이 정식 [[한소관계|외교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여행금지|여행금지국가]]였다. 이 시기 소련을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언론인이나 운동선수 또는 특수직 종사자 같이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1970년대 들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한국인들이 소련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게 된 시기는 [[북방정책|한소수교]] 이후인 1990년 9월부터였으나, 불과 1년 뒤 소련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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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 [[/교육|교육]] ===
630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교육)]
631
632
=== 스포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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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인민 복지의 증진과 여가 활동 제공을 위해 [[체육]]을 많이 장려했다. 제정 시기의 나쁜 여건과 환경으로 인해 노동자 대중들의 건강과 발육이 평균적으로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민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수영장을 비롯한 다양한 체육 시설을 건설하고 체육 활동을 장려했으며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체육 활동 시간을 보장했다. 또한 노동 현장에서는 일과 전, 일과 후에 반드시 체조를 하도록 했다. 이는 굳은 몸으로 노동을 하다 신체에 무리가 가는 일을 방지하고 노동으로 인해 생긴 신체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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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산주의에서 신경제 정책을 실시하기 이전까지, 소련 수뇌부들은 공동체 의식과 집단주의를 강조하고 경쟁을 강조하는 종목이나 구기 종목 등은 경원시했다. 모든 참가자가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스타 플레이어 몇 명만 관심을 받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은 정부에서 제공해주는 체육 활동보다는 경쟁이 중심이 되는 다양한 스포츠를 훨씬 더 좋아했기 때문에 혁명 이전처럼 작업장, 공장 간의 축구 경기를 주최해 관람, 참여하거나 각종 스포츠 경기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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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신경제 정책으로 경쟁이 강조되자, 구기 종목을 위시한 다양한 스포츠들이 성장하기 시작하고 다양한 스포츠 클럽들이 창설되었다. 노조와 여러 사회 단체에서 다양한 스포츠 클럽을 결성하고 전업 선수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그 규모가 커져 갔다. 축구의 경우, 신경제 정책 시기의 축구 선수들은 급여만 많이 준다면 언제든지 팀을 갈아치웠고, 클럽은 더 많은 급여와 수당, 혜택을 약속하지 않고서는 팀을 떠나는 선수를 막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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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축구 클럽과 그 후원 기관들은 서방 세계의 프로 리그만큼은 아니었지만, 경쟁적으로 자본을 투입해 선수들을 확보하곤 했다. 그러나 돈 때문에 소속 팀을 저버리고 경쟁 팀으로 이적하는 선수들은 소련의 스포츠 팬들도 좋지 않게 바라 보아서, 스포츠 잡지에서는 이런 선수들을 '봄 철새'라고 비난했다. '봄 철새'라고 부른 이유는 선수 이적이 비시즌 기간인 봄에 주로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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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인기 종목은 축구 · 농구 · 핸드볼 · 아이스 하키 · 권투 등이 있으며 소련의 스포츠 리그도 이들 종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구단은 [[소련군|군대]]나 [[비밀경찰|보안기관]], [[러시아 철도|철도청]], 광업부 같은 정부 기관, 여러 노동 조합, 기업에서 창설하거나 후원했다. 소련의 스포츠 클럽에는 서방 세계의 클럽들처럼 특정 종목에만 참여하는 클럽 외에도 다양한 스포츠 팀을 거느린 종합 스포츠 클럽으로 성장한 곳도 많았다. 이렇게 탄생한 구단들은 연방이 해체된 지금까지도 대다수가 운영 중에 있다.[* 대표적으로 축구에서는 오늘날 독립 국가 연합에서 최상위권 팀으로 분류되는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스파르타크 모스크바]], [[FC 디나모 키이우|디나모 키이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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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정권 시기에는 [[노동과 국방을 위한 준비]] 같은 [[체력장]] 제도를 도입해 인민의 체력 증진을 도모했다. 생활 스포츠 수준도 높아졌으며, 도시에 반드시 체육 시설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받은 정부 당국은 [[수영장]]과 [[체육관]], [[운동장]] 같은 시설을 조성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지금도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운동을 좋아한다. [[학교]]에서도 체육을 중시하는데다 많은 [[대학|대학교]]에서도 [[체육]]을 중요 과목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험으로 [[체조]]나 [[턱걸이]] 같은 걸 해야 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외국인]]이면 빼주는데, 그래도 수업 자체는 수강해야 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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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초창기, 소련의 지도자들은 올림픽의 귀족주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비판하고 IOC가 노동자들을 계급 투쟁에서 이탈시켜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래서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노동자 국가인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의 축제"인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대신에 소련은 자체적인 IOC라 할 수 있는 적색 스포츠 인터내셔널를 설립하고 스파르타키아드(Spartakiade)라는 체육 대회를 따로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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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더해서, 스탈린 정권은 정권 안정화와 5개년 계획의 착실한 추진, 대공황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서방 세계의 동향을 보고 자신감을 얻어 스포츠를 통해 서방 부르주아 국가들과 소련 인민들에게 소련의 체제 우위를 보이려 했다. 그 예시로,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 각국의 공산당에 올림픽 정신을 활용할 것을 제안했으며 베를린 올림픽에 대해 비난할 때는 이념 공세를 퍼붓던 과거와 달리 나치 독일이 올림픽 정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를 들 정도로 기존에 비해 많이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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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스탈린 정권은 경쟁 중심적인 스포츠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공훈 선수 제도를 시행해 스포츠 선수들을 육성했다. 이미 스타하노프 운동을 전개해 돌격 노동자(우다르니크), 노동 영웅 등이 존재하는 상황이었기에 스포츠 분야에 '스타하노프 운동가'를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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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시기의 소련 스포츠도 대숙청을 피하진 못했다. 많은 수의 스포츠 선수, 트레이너, 리그 관계자, 관련 부서의 공무원들이 숙청당해 굴라그나 감옥으로 끌려 가거나, 총살당했다. 소련 축구 리그의 스타들인 스파르타크의 스타로스틴 형제도 베리야에게 밉보인 것 때문에 굴라그로 끌려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스타로스틴 형제는 연방 전체가 사랑하는 인기인이었고 이는 굴라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용소 소장과 간수들은 물론, 인간성이 메마른 냉혈한들인 NKVD의 요원들까지 형제들에게 많은 편의를 봐주었으며 그 덕에 이들은 노역을 하는 게 아니라 굴라그 축구팀이나 유형지에 있는 축구팀을 지도 · 운영하는 일을 하며 형기를 보냈다. 심지어 스파르타크의 창설자인 니콜라이 스타로스틴이 축구 얘기라도 시작하면 죄수는 물론, 간수들까지 몰려 들어 경청했다. 48년에는 스탈린의 차남인 바실리의 도움을 받아 굴라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NKVD의 정보망에 걸려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나마, 굴라그가 아니라 카자흐의 유형지에서 축구팀 코치로 생활했기에 최악은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아크몰린스크에서 알마 아타로 간 니콜라이는 어느 축구 팀에 도움을 주었는데 바로 카자흐스탄의 유명 구단인 FC 카이라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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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소련 국가 대표들은 제한적으로 국제 경기를 치렀다. 소련은 IOC 가맹국도, FIFA 가맹국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재밌는 점은 소련 수뇌부가 올림픽에 비난을 퍼부었음에도 소련이 올림픽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올림픽을 주최하게 된 프랑스와 미국이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소련의 IOC 가입을 추진했으나, IOC는 수장인 앙리 드 바예라투르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바예라투르는 소련의 올림픽 참여가 청년층의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소련의 IOC 가입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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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국제 스포츠 무대에 참여하는 일이 계속 무산되었지만, 소련 수뇌부들은 올림픽 출전에 그리 연연하지 않았다. 괜히 출전했다가 성적이 안 좋으면 나라 망신이니까 무리해서 출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게다가 영국과의 외교적 갈등, 파시즘의 대두로 인해 스포츠에 관심을 기울이기 어려운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소련의 국제 스포츠 단체 가입은 늦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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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이후, 전후 재건에서 성과를 거두고 나치라는 인류의 적에 맞서 승전을 했다는 자신감이 커진 소련은 스포츠 분야로도 눈을 돌렸다. 여러 국제 스포츠 단체에 가입하기 시작하고 스포츠 인프라도 개선했으며 니콜라이 로마노프를 위시한 소련 체육계의 관료와 주요 인사들이 연방의 올림픽 참가를 위해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소련 선수들의 성적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이에 소련 수뇌부들의 인식도 점차 전환되지만, 1위에 집착하는 기질까지 강해졌다. 소련 레슬링 국가 대표팀이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2위를 했다는 이유로 스탈린이 관련자들을 질책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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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흐루쇼프]] 정권 시기가 되면, 소련의 국제 스포츠 대회 참가는 더욱 확대되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스파르타키아드는 국제 대회가 아닌 연방 전체 구성국이 참여하는 국내 대회로 변경했다.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4년에 한 번씩, 하계 대회와 동계 대회를 함께 운영했으며 하계 대회는 모스크바에서, 동계 대회는 거의 스베르들롭스크(예카테린부르크)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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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소련은 학교 교육에서 미리 재능있는 스포츠 영재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성적이 좋은 선수들에게는 막대한 혜택을 부여했다. 올림픽 신기록이나 세계 신기록을 갱신하면 노동자 평균 임금의 수십 배에 달하는 포상금을 지급했고, 국내 신기록과 국내 대회 수상도 각각 차등을 두어 지급했다. 이외에도 국제 대회에서 성적이 좋은 스포츠 선수들에게 넓은 [[아파트]] 분양, 승용차를 비롯한 비싼 사치품을 즉시 지급하는 등의 보상도 해주었고, 자유로운 서방권 여행같은 짭짤한 혜택들도 있었다. [*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소련에서는 일반인이 동구권을 제외한 해외에 출장 및 여행을 가기 매우 어려웠다.] [* [[https://www.nytimes.com/1978/03/12/archives/sports-psychologists-and-the-soviet-athlete-should-try-coaching-a.html|(출처) Sports Psychologists and the Soviet Athlete, Herb Weinberg, March 12, 1978, New York Times]]]. 스포츠 리그의 인기 선수들 같은 경우, 기본 급여는 평범했지만, 구단으로부터 각종 수당과 상여금을 두둑하게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소련에서 운동 선수는 소련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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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체육사에서 소련은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올림픽의 경우, [[프랑스]], [[영국]], [[독일]] ,[[중국]]이 각각 자국 홈에서 1위를 해본 것 말고는 [[미국]]의 1위 자리를 빼앗은 나라는 소련, [[독립국가연합]] 뿐이다. (6번, 1번)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에도 소련의 기록이 [[체조]], [[레슬링]], [[역도]], [[카누]], [[배구]], [[핸드볼]]에서 여전히 1위를 기록하고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oviet_Union_at_the_Olympics|참고]].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op_hty&fbm=1&ie=utf8&query=%ED%95%98%EA%B3%84%EC%98%AC%EB%A6%BC%ED%94%BD|네이버 하계올림픽 우승국 참고]]] 다만 올림픽 선수들에게 경기력 향상을 이유로 [[도핑|약물을 투여]]하는 불법, 편법을 쓰는 경우가 횡행했다. 특히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KGB]] 차원에서 도핑 검사에 개입하여 약물검사 결과를 조작하기도 했다.[* [[https://www.rferl.org/a/the-1980-moscow-olympics-rank-as-the-cleanest-in-history-athletes-recall-how-the-u-s-s-r-cheated-the-system-/30741567.html|(출처) The 1980 Olympics Are The 'Cleanest' In History. Athletes Recall How Moscow Cheated The System, Aleksei Aleksandrov, July 22, 2020.]]] 이러한 관행은 훗날 러시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2016년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 2022년 [[카밀라 발리예바 도핑 적발 사건]] 등 대규모 도핑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 사실 2000년대 전까지 소련 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동독 등 당시 체육계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이던 국가들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다만 미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 미국 체육계 내부인사들이 올림픽에서 도핑이 이루어진 사실을 폭로하면서 미국반도핑기구(USADA)가 국제표준에 맞추어 독립기구로 발족하면서 도핑심사를 강화해 갔다면, 러시아에서는 소련 시절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아 [[FSB|연방보안국]] 차원에서 국가적인 도핑 프로그램을 주도하고 '''심지어 러시아반도핑기구 차원에서 도핑 프로그램을 은폐하다가''' 결국 내부자 고발에 의해 실상이 폭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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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휴일/소련|공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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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공휴일/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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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군|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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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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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은 전성기 시절엔 대규모 병력과 세계 1위의 기갑부대들을 자랑했고[* 다만 그 명성에 비하면 보급 역량은 굉장히 형편없었다.], 해군은 미군에겐 밀렸지만 그래도 대적은 가능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군은 뒤떨어지는 레이더 공학 기술 때문에 대체로 미군에게 밀리는 편이었고 그래서 지상 기반 대공 미사일 시스템에 의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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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보단 전력면에서 확실히 밀렸지만 소련군도 양과 질 모두 뛰어났고 미국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나 단지 미국을 압도할 능력은 갖추지 못하고 그저 위협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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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력으로는 1986년 핵탄두 45,000발을 보유, 미국의 핵탄두 보유 수량인 25,000발을 뛰어넘는, 사실상 '''[[미국]]을 압도하는 핵 전력 물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에게는 주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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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매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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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절 제작된 서방 매체에서는 [[반공]]의 영향으로 악의 제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첩보물에서 단골 악역으로 등장하며, [[레드 던]]처럼 아예 대놓고 악의 축으로 그리는 반공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제작된 매체에서는 냉전기가 배경이라도 소련을 좀 더 비중있거나 입체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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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를 다루는 미디어에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써 주인공 또는 선역으로 등장하지만, 미국, 영국과는 달리 동시에 스탈린 시기 독재나 전쟁 범죄 등 어두운 면모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물론 [[극우 미디어물]]을 제외하면 무조건 악역, 동네북으로 나오는 [[일본 제국]], [[나치 독일]]과는 달리 가끔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해서 훨씬 나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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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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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과 [[제2차 세계 대전]], 그 중에서도 [[대조국전쟁|동부 전선]]을 '''조금이라도''' 다룬다면 반드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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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
|| '''개봉연도''' || '''제목''' || '''시대적 배경''' ||
685
|| [[1948년]] || '''베를린 함락 2부작''' || [[1940년|1940]]~[[1945년|45년]] (독소전쟁 발발 전부터 나치 독일의 패망까지) ||
686
|| [[1965년]] || [[닥터 지바고]] || [[1912년|1912]]~[[1917년|17년]] ([[러시아 혁명]]) ||
687
|| [[1970년|1970]]~[[1972년|72년]] || '''[[유럽의 해방]] 5부작''' || [[1940년|1940]]~[[1946년|46년]] (독소전쟁 발발 전부터 종전 이후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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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 [[레드 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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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 [[붉은 10월]] || [[1984년]] ([[콘스탄틴 체르넨코|체르넨코]] 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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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2014년]] 재개봉) || [[스탈린그라드(1993)|스탈린그라드: 최후의 전투]] || [[1942년]] (독소전쟁 중기) ||
691
|| [[2001년]] || [[에너미 앳 더 게이트]] || [[1942년]] ([[독소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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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 [[K-19 위도우메이커]] || [[1961년]] ([[냉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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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 [[제독의 연인]] || [[1914년|1914]]~[[1920년|20년]] ([[러시아 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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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 '''브레스트 요새''' || [[1941년]] [[독소전쟁]] 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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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 [[스탈린그라드(2013)]] || [[1942년|1942]]~[[1945년|45년]] ([[독소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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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 [[차일드 44(영화)|차일드 44]] ||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치하) ||
697
|| 2015년 || '''1941:세바스토폴 상륙작전''' || [[1941년|1941]]~[[1942년|42년]] (독소전쟁 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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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 [[판필로프의 28인]] ||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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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 [[히든 피겨스]] || [[1962년]] ([[우주 경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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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 [[스탈린이 죽었다!]] ||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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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나의 작은 동무]] || [[1950년]] ([[에스토니아 SS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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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 [[테트리스(영화)]] || [[1988년]] ([[고르바초프]]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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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할리우드]] 영화이면서도 소련군 측을 주인공삼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다. 하지만 철저히 서방의 시각에서 소련을 묘사했기 때문에 영화초반 돌격장면 등 소련군에 대한 왜곡과 고증오류가 담겨있어 실제 구 소련 출신 참전용사들이 해당 영화를 보고 "우리가 저런 꼴로 싸우지는 않았다!"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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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코미디 영화 [[아이언 스카이]] 속편 엔딩에서 뜬금없이 화성 표면에 있는 '''[[낫과 망치]]''' 모양의 기지를 보여주면서 떡밥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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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
=== 게임 & 애니메이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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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시리즈]]: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에서는 원래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이스턴 프론트]] 모드에서 주역으로 등장한다. 거기에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는 아예 배경이 독소전쟁이다. 그러나 2의 경우 소련군 캠페인에서 소련군을 나치 독일보다도 악으로 묘사해서 논란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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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람항로]]에 소련을 모티브로 한 세력인 노스 유니온(북방 연합)이 등장한다. 모티브답게 소속 인원들이 전부 하얀 털코트를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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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 아카이브]]에 등장하는 [[붉은겨울 연방학원]] 또한 소련을 모티브로 등장하는 학원이다. 서기장인 [[체리노]]의 경우 [[스탈린]]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그런데 사회는 마치 혁명 직전 [[러시아 제국]]을 닮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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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 오브 탱크]]와 [[워 썬더]] 에서는 소련 국가가 등장하며 대전기 및 냉전기 장비들이 등장한다. 은근슬쩍 소련장비를 버프하고 미국 영국을 너프하는 등 소련 밀어주기를 하고 있다.[* 월드 오브 탱크를 만든 [[워게이밍넷]], 워썬더를 만든 [[가이진]] 둘 다 옛 소련 지역에 있는 회사이다. 특히 가이진은 [[돈바스 전쟁]]에서 [[노보로시야]]를 후원했다는 의혹이 있다.] 물론 최근에는 타 진영에 강력한 골탱의 등장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소련의 위세는 많이 꺾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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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사의 게임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배경이 배경인만큼 1936년부터 1944년까지 빠지지 않고 플레이어블 국가로 등장한다. 아무래도 국력이 국력이다보니 게임에서의 성능은 미국, 독일과 함께 최강급이다. 물처럼 쏟아나는 인력으로 독일을 상대로 한 인해전술을 선사하는데 가히 충격과 공포 수준이다. 하지만 게임의 밸런스를 위해 공업력이나 테크는 시리즈 대대로 현실에 비해 부족하게 나오는 편. 그래도 AI들에게 맡겨놓으면 고증대로 독일이 초반에는 몰아붙이다가 결국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하고 점점 밀려나게 된다.[* 하지만 독일이 이기는 경우도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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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슨 가족]] 시즌 9의 영화 [[크림슨 타이드]]를 패러디한 에피소드에선 러시아 연방이 위장이었고 소련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성 바실리 성당에 낫과 망치 소련깃발이 걸리고 퍼레이드는 장갑차들로 가득차고 소련 보병들이 길을 행진한다. 붕괴된 베를린 장벽이 다시 부활하는 건 덤. 또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좀비]]가 되어 관을 깨고 뛰쳐나온다. 나오자마자 하는 말이 "[[자본주의]]를 [[반자본주의|쳐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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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걸즈 & 판처]]에 등장하는 학교 중 하나이자 전차도 4대 강호 중 하나이며 [[현립 오아라이 여학원]]의 제 63회 전국 전차도 대회 준결승전 상대였던 [[프라우다 고교]]의 모티브가 되었다. 학교 이름 자체 부터 러시아의 일간지 프라우다에서 따온 명칭이고 학교의 엠블렘도 소련 국장의 패러디다. 별이 가위로, 낫과 망치가 제도용 자로 바뀐게 포인트다. 학원함도 [[키예프급]] 항공모함이고 보유/사용 전차들도 모두 소련제 전차들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전차도 부 대장 카츄샤도 [[이오시프 스탈린|강철의 대원수]]와 닮은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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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라이트 노벨이자 애니메이션인 [[마법과고교의 열등생]]에서는 신소련으로 부활한 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병합했고, 중국과 함께 일본 및 미국의 적성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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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 [[AKIRA]] 에서 원작 만화 후반부에 네오도쿄에 해군 및 해병대 병력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인 미국과 함께 세계를, 나아가 국제사회의 질서를 양분하는 [[UN]][[상임이사국]]에 함께 속해 있는 국가로 나온다. 설정상 일본 간토 지구 신형폭탄 폭격 이후로 제3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및 [[북대서양 조약기구]], 일본을 비롯한 기타 나토 지원국 및 동맹국들과 비핵전 세계대전을 벌이며 끝내 승부를 가르지 못하자 서로 휴전 선언을 하고 전쟁을 끝내 다시금 평화 공존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후반부에 네오도쿄의 통제권을 잃은 일본 정부가 교토로 이전함에 따라 홋카이도를 재빠르게 점거하며, 일본 국방군과 소련 해군, 소련 공수군이 해상대치 중이라는 언급만 되며, 후반부 등장인물 중 초상능력학 연구 과학자인 두브로브스키 박사가 미 함대에 설치된 "주버나일 A"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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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시리즈에서는 아인슈타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히틀러]]를 지워버렸기 때문에 소련이 공산화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나치 독일의 포지션이 되고 미국, 유럽 등 자유 진영이 연합군이 되어 소련군의 공산주의 야욕에 대항을 한다.[* 다만 이쪽은 나치 독일과는 다르게 정사는 아니더라도 소련캠페인에서 소련이 세계를 지배하는 엔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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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로게]] [[ToHeart2]]에서 언급이 드문드문 되는데, 작중 세계는 암만 봐도 [[근미래]]이다. 오버 테크놀로지의 옛날이면 말이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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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트로 유니버스]]의 [[붉은 라인]]은 이 소련의 후신을 자처하는 세력이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상징을 내세우는[* [[제4제국]]은 [[하켄크로이츠]]를 변형한 깃발을 쓰며, [[한자 동맹]]은 링라인이라는 정식 명칭에 걸맞게 갈색 원을, 주인공 세력인 [[레인저(메트로 유니버스)|레인저]]는 메트로의 M에서 따온 문양을 상징으로 쓴다.] 메트로 내 다른 세력들과 달리 [[СССР]]가 새겨진 구소련의 깃발을 그대로 쓴다. 소련의 국가 중 하나였던 [[인터내셔널가]]의 러시아어판을 부르고 다니는 건 덤이었다. 여담이지만 [[최후의 승자]]로 볼 수도 있는 세력이다.[* [[메트로: 라스트 라이트]]의 D6 전투에서 크게 패해 세력이 위축되었으나 여전히 4제국과 기타 공동체보단 크고, 레인저를 거의 반 몰락 상태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가장 위험한 적수였던 한자 동맹은 [[보이지 않는 감시자|잔존 러시아 정부]]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붉은 라인에 관심이 멀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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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아웃 시리즈]]에서는 대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존재하여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언급된 게 없다. 아마 독자적인 유전을 보유한 덕분에 [[중국(폴아웃 시리즈)|대륙]]이 자원 부족문제를 겪을 때도 생존이 가능했던 것 같다.[* 따로 생각해 보면 다른 냉전 매체에서 다루는 것과 달리 매우 굴욕적인 모습이다. 더럽게 큰 땅덩어리와 여러 공산주의 국가를 주도했던 국가인데 해당 시리즈에서는 중국한테 밀려서 2인자 공산주의 국가로 물러났고 다른 나라가 전쟁으로 난장판이 되던 시기에도 언급조차 적다.] 그나마 폴아웃 1편에서 제법 많은 스토리가 나오는데 중국이 부상하면서 현실 역사와 달리 미국 - 소련관계가 꽤 우호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볼트에 소련 대사관쪽 사람도 들어갈 수 있었다고. 다만 반소 감정은 여전히 미국에 존재했었는지, 폴아웃 4의 등장인물인 코즈워즈가 '러시아 빨갱이' 운운하며 이들을 비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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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장기에프]]가 소련 대표로 나온다. 장기에프와의 대전 장소도 소련(USSR)으로 나온다.[*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그 당시에는 소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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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게임 시리즈]]에서는 당연히 레드 포 세력의 리더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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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펜슈타인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다트 이슈드|이상할 정도로 강해진]] 나치 제국에게 완벽한 패배를 당해 멸망했으며, 미국과 함께 매체 속 악역으로나 등장하는 등, 현실에서 나치가 당하는 비난과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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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AD AHEAD]]에서 [[우르사 연방]]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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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kers & Resources: Soviet Republic]]에서는 플레이어가 소련의 계획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주제이다. 다만 실제 러시아는 아니고 가공의 동유럽 국가이다. USSR은 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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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믈린의 위기]]에선 소련의 서기장이 되어 소련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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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rhammer 40,000]]에서는 소련에서 발사한 로켓을 본뜬 장난감이 4만 년이 지나서도 남아 감상평을 남기게 된다. C.C.C.P라는 뜻이 무엇인지는 여기선 잊혔고, 로켓의 구조가 너무 원시적이라는 식이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blacklibrary&no=9992|#]]. 그래도 소련이 인류 최초로 [[홀리 테라]] 밖 우주로 보낸 [[유리 가가린]]은 '선한 목자 유리'라는 이름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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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전선]]에서는 주요 배경 국가로 등장한다. 현실의 소련과 마찬가지로 1991년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들어섰으나, 2031년 다시 혁명이 발생하여 '''[[신소련]]이 등장'''했다는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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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토믹 하트]]에서는 미국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개입하지 않아 나치 독일에 홀로 대항하기 위해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한 평행세계의 소련이 게임의 주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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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 인 컨플릭트]]에서는 배경은 냉전 말기로서 소련이 유럽과 미국을 공격한다는 제3차 세계 대전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일종의 대체역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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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리스티드]]에서도 [[모스크바 공방전|모스크바 전투]]캠페인의 연합군 진영에 있다. 하지만 소련군 기갑하면 떠오르는 t-34가 없다.[* t-34는 이미 1940년부터 생산했었다.] 그래도 IL-2 같은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장비들도 많고, 모신 나강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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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 오브 듀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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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 오브 듀티 1]]부터의 2차 대전 타이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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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국과 함께 주인공 격으로써 나치 독일과 싸운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싸우는 병사들이 인상적이며, 러시아어를 안쓴다.[* 당연하겠지만 게임적 허용이다. 애초에 그렇게 따지려면 외계 세력들 명칭에 영어식 명칭을 쓰는 것도 문제삼아야 한다,[[하프라이프 시리즈]]의 [[콤바인(하프라이프 시리즈)|콤바인]]이라던가, [[헤일로 시리즈]]의 [[코버넌트(헤일로 시리즈)|코버넌트]]도 고유명사로 바꿔야 한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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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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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배경이라 [[소련 붕괴|당연히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 메인 적 세력인 [[국수주의파]]의 상징이 [[낫과 망치]]다. 또한 소련 붕괴의 결정타를 날린 '''[[체르노빌 원전 사고|어떤 유명한]] [[프리피야트|폐허]]'''도 작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참고로 프리피야트 캠페인에서 [[PPSh-41]]을 든 소련군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762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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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처음으로 적국으로 등장. 2차 대전 시리즈의 용맹함은 어따 팔아먹었는지 필요 없어진 [[디미트리 페트렌코|병]][[레즈노프|사]]들을 토사구팽하려질 않나, 적국에 [[노바 6|생화학 테러]]를 감행하려고까지 하는 비겁하고 추악한 나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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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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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을 배경으로 다시 한번 주적으로 등장. 붕괴가 얼마 남지 않은 80년대가 배경이라 골골대지만, [[벨(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월드앳워 이후로 참으로 오랜만에 [[페르세우스(콜 오브 듀티 시리즈)|'''승리한다''']].[* 다만 정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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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의 왈츠]]에서는 S국으로 등장하고 전차쪽 [[코레류 게임]]이라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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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인소 맨]]에서도 등장하는데 시간대는 1997년도로 현실에선 이미 소련이 붕괴한 시점이지만 작중에선 [[포치타|이런저런 사정]]으로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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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TA 온라인]]의 [[카요 페리코 습격]] 업데이트로 등장한 플레이어의 조력자 [[파벨]]은 [[소련 해군]]에서 복무한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파벨]]이 상주중인 잠수함 [[코사트카]]는 소련의 [[델타급 잠수함]][* 정확히는 델타III급.]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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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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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에서는 주로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등장하며,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적 내지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미드에서 적성국으로 등장하는 [[나치 독일]]처럼 악의 제국까지는 아니지만, 소련 시절 공산주의 체제의 부정적인 모습을 자주 그릴 때가 많다. 단순히 (미국 출신) 주인공을 적대시하는 악당 세력에서 어떨 때는 미국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모습으로 그려질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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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한 이야기(미국 드라마)|기묘한 이야기]] 시즌 3에서는 마인드 플레이어 다음가는 주적으로 등장한다. 미국보다 먼저 뒤집힌 세계를 연구하고 있었으나 그 넓은 국토 내에서 제대로 된 '관문'을 찾지 못했고 결국 외국으로 눈을 돌리다가 이미 문이 열린 적이 있었던 호킨스 마을에 비밀 기지를 세워서 다시 관문을 열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연구기지를 [[FBI]]의 눈에 들키지 않고 운영한 것이나, 마지막화의 쿠키 영상을 보면 미국 연구기관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데모도그까지 길들이는 등 만만치 않은 능력을 보여준다. 다만 암호 통신을 보내다가 더스틴 일행에게 감청당하고 암호가 뚫리는가 하면 비밀스러워야할 적성국의 아지트에서 버젓히 소련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등[* 이걸 보고 [[스티브 해링턴]]은 [[레드 던]] 드립을 쳤다.] 은근히 허당스러운 모습도 보여준다. 시즌 4에서도 등장할 확률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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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폴로 계획]]보다 먼저 소련이 달착륙에 성공했다는 배경의 [[Apple TV+]]의 미국 드라마 [[포 올 맨카인드]]에서도 달착륙은 물론 최초로 여성을 달까지 보내고 달 기지까지 노리면서 주인공인 [[NASA]]를 계속 긴장시킨다. 일단 미국이 달의 얼음지대에다가 먼저 달 기지를 짓고 여성 우주비행사까지 배출하면서[* 이 때문에 현실의 역사보다 성평등이 더욱 가속화했다. NASA의 수장이 [[베르너 폰 브라운]]박사의 제자인 여성이고, 흑인 여성 우주비행사도 등장한다.] 소련을 따라잡았으나, 소련 또한 미국의 기지 인근에다가 달 기지를 지으며 우주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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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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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라는 명칭, 특유의 체제, 공산주의 종주국, 특유의 국력에서 나오는 특유의 카리스마 때문인지 대체역사물에서 '만약 소련이 21세기까지 생존했다면?'의 What if가 나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물론 원 역사의 소련 그대로 갔다가는 답이 없기 때문에 매체마다 작가들이 소련의 생존을 위한 나름대로의 체제 개편을 묘사하며, 그 방향성이 작품마다 다르다는 것도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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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nS5_EQgbu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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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Back in the U.S.S.R.]]이란 곡도 있다. [[링고 스타]]가 [[폴 매카트니]]의 훈계질에 빡쳐 밴드를 탈퇴해 폴 매카트니가 대신 드럼을 친 음악으로 유명한 곡이다. 물론 여기서는 소련 그런 거 없고 소련 여자가 예쁘다면서 찬양하는 것이 가사의 전부다(...). 오히려 [[The Beatles|같은 앨범]]에 수록된 [[Piggies]]가 비틀즈 멤버들의 정치적인 성향을 좀 더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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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코믹스 만화 [[왓치맨]]에서는 실제 역사대로 미국과의 냉전을 벌이고 있으나 미국이 [[닥터 맨하탄]]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손에 넣은[* 사실 닥터 맨하탄은 언제든 원하는대로 할 수 있고 미국을 떠나 소련에 붙는다 하여도 그것에 대해서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고 아예 소련이고 미국이고 집어치우고 지구를 통째로 불태우고 얼리고 짜부려뜨려도 인간들은 저항할 방법이 전혀 없으니 손에 넣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일단 미국 대중이 믿는대로 표현하자면 그랬다.] 이후부터는 [[베트남 전쟁|베트남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미국의 거만하고 무례한 태도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며 동맹국들 사이에서 위신이 추락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끝이 없을 것 같은 평화와 번영 속에서 흥청대는 동안 [[와신상담]]하며 균형이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닥터 맨하탄이 미국 대중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어 지구를 등지고 화성에 은둔하자 즉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실제 역사처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지원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의 일방적인 구타 양상으로 순식간에 점령당한다.] [[베를린 봉쇄|서독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초강수를 둔다. 미국이 닥터 맨하탄만 믿고 대비를 방만하게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펜타곤의 상호확증파괴 시뮬레이션은 NATO가 간신히 [[모스크바]]를 파괴할 동안 서유럽과 미국은 방사능 황무지가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보여준다. 물론 소련도 서방과 함께 공멸하는 것은 원치 않았고 이에 어색한 탐색전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뜻밖에도 [[뉴욕]]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파괴되는 대사건[*스포일러 상호확증파괴 핵전쟁을 막고자 했던 [[오지만디아스(왓치맨)|오지만디아스]]의 음모였다.]이 벌어져 소련이 미국에 구호물자와 구조 인력을 지원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빠르게 해동되어 냉전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 실제 역사와는 반대로 뉴욕의 파괴로 국력을 심하게 소진한 미국이 소련에게 저자세로 타협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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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러시아 선수들을 언급할 때 소련 선수들이라고 하는 바람에 나머지 멤버들한테 마구 까인 바 있다. 비교적 최근에 멸망한 나라이다 보니, 중장년층과 심지어 1980년대 후반 생들 중에서도 무의식중에 러시아를 소련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격동기의 근현대사를 겪으신 노년의 어르신들은 오히려 러시아란 단어가 더 낯설다.[* 그렇게 된 이유중 하나가 과거 소련이 존재했던 시절에도 서방권에서 소련을 지칭할 때 러시아라고 대신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은연중에 러시아=소련 이렇게 된 것도 있다. 영화 [[록키 4]]를 보면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에, 소련 선수와 경기를 하는 모습인데도 '러시아'라고 지칭하는 예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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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역사물인 [[고종, 군밤의 왕]]에선 소비에트 자유국 연방이란 이름으로 건국되며, [[러시아 내전]]이 평화롭게 끝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지 않아 공산주의임에도 왕권을 긍정하는, 실제 역사와는 180도 달라진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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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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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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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구 소련 구성 공화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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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제2차 세계 대전 참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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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소련의 대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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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러시아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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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소련/문화, version=242, uuid=0221f6af-e9a1-423b-b7a3-f8b7e96879cb, title2=소련/문화, version2=258, uuid2=329ac403-afc9-47f2-9866-094865e0caab, title3=소련/상징, version3=145, uuid3=d5d74fa9-fb1a-4b5d-9b5d-5d4304ad8987)]